![[이진주 기자의 음식 이야기]죽 한 그릇의 힘](http://img.khan.co.kr/lady/201601/20160108113828_1_food_story.jpg)
[이진주 기자의 음식 이야기]죽 한 그릇의 힘
연꽃무늬가 있는 소박한 백자 그릇에 담긴 흰죽에는 마치 병아리들이 뛰어노니는 것같이 달걀노른자가 점점이 있었다. 식구들이 입맛 없어할 때면 구원투수처럼 나타난 이 음식을 가족은 달걀죽이라 불렀다. 만드는 법도 번잡스럽지 않다. 쌀을 두어 시간 불린 뒤 냄비에 넣고 달달 볶다가 물을 부어 끓여 쌀알이 적당히 퍼지면 곱게 풀어둔 달걀을 넣어 화르르 끓인 다음 그릇에 담는다. 달걀을 넣어 보기에도 심심하지 않고 고소하기까지 해 금세 한 그릇 뚝딱 해치우게 된다. 지금도 입맛이 없거나 야근한 다음날 입이 텁텁할 때면 어김없이 달걀죽 한 그릇이 식탁에 올라온다. 새벽녘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죽을 쑤던 엄마의 마음이 더해져 그릇의 온기는 감동으로 전해진다.
죽은 곡물로 만든 음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토기에 곡물과 물을 넣고 끓여 먹는 것이 그 기원이라 볼 수 있다.
농경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먹어온 전통 음식이기도 한 죽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엄마 젖을 뗀 뒤 처음으로 먹는 음식이며, 어른에게 올리는 정성의 음식이자 몸이 아픈 환자를 위한 치유의 음식이다. 예부터 서민들에게는 적은 양의 곡식을 끓여도 배로 늘어나니 대식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고마운 음식이었고, 양반가에게는 온갖 산해진미 넣어 만든 별미였다.
순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가 쓴「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에는 ‘죽십리(粥十利)’라는 내용이 있다. 죽을 먹으면 기운을 보하고, 혈색이 좋아지며, 수명이 연장되고, 소화가 잘되고, 갈증을 없애주고,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등 죽의 이로움 10가지를 서술한 것이다. 아침에 먹는 죽의 이로움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죽 한 사발을 먹으면 배가 비어 있고 위가 허한데 곡기가 일어나서 보의 효과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죽은 매우 부드럽고 매끄러워서 위장에 좋다’라고 쓰여 있다. 불교에서도 죽반(粥飯)이라 하여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을 먹는 것이 오랜 관습으로 내려올 만큼 아침 식사로 죽을 먹어왔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먹어온 만큼 죽은 조리법도 다양하게 발달돼왔다. 조선시대 문헌만 봐도 수록돼 있는 죽의 종류가 40여 가지에 이른다. 죽은 사용하는 재료와 농도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농도가 가장 묽은 미음, 쌀알을 굵게 갈아서 쑤는 원미, 쌀알의 형태가 거의 안 보일 정도로 곱게 갈아서 쑨 무리죽(비단죽), 곡식이나 밤 등의 가루를 밥물에 타서 끓인 암죽 등이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흰죽은 불린 통쌀로 끓이거나 갈아서 끓이는데, 물은 쌀의 5~7배 정도를 넣는 것이 적당하다. 쌀 외의 곡물로 쑨 죽으로는 녹두죽, 율무죽, 팥죽 등이 있으며 밤죽, 대추죽, 잣죽, 호두죽 등 견과류를 이용한 죽도 있다. 기본 곡물에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과 색감, 풍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곡물에 채소나 산나물을 섞어서 쑨 죽에는 호박죽, 방풍죽, 아욱죽 등이 있으며 우유를 넣은 타락죽, 해산물이나 고기를 넣은 전복죽, 닭죽 등이 있다. 지금이 제철인 싱싱한 해산물이나 우엉, 연근 등의 뿌리채소를 넣은 별미죽도 만들어봄 직하다.
바야흐로 죽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즉석식품으로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시대다. 종류도 더욱 다채로워 한식에서 죽의 위상은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할머니, 엄마가 만든 죽을 떠올리는 것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살피고 정성을 다해 담은 배려와 정의 힘 때문이 아닐까.
■글 / 이진주 기자 ■사진 / 조인기(프리랜서) ■요리 / 이지연(델리스키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