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유재덕의 직업은 합법적인 칼잡이, 즉 요리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에서 20년 넘게 일했으며, 현재는 그곳에서 메뉴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요리사’보다는 자신을 ‘음식가’ 혹은 ‘파불루머’라는 명칭으로 불러주길 원한다. ‘음식물’이나 ‘영양물’을 뜻하고, 그래서 ‘마음의 양식’ 등을 표현하는 숙어에서 종종 활용되는 라틴어 pabulum(파불룸)에서 따온 단어다.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좌우명이다. 요리는 맛을 주지만, 음식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런 이유로 그는 언제나 손에서 칼을 내려놓을 때마다 책을 집어들었다. ‘파블루머 유재덕의 칼과 책’은 오늘도 그가 주방에서 읽고 있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쉰네 번째는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마이클 부스 지음 / 김현수 옮김 / 글항아리)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지 간다”는 말이 있다. 무릎을 치며 공감하게 만드는 희대의 명문장이다. 그런데 나는 역시 요리사이긴 한 모양이다. 이 멋진 문장을 읽으면서도 ‘요리사도 그런데! 어디든지 가는데…’ 하는 생각부터 했다.
나처럼 29년을 한 호텔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요리사는 칼 한 자루 들고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방의 용어라는 것이 대개는 쉽고 단순한 편이라서 외국어가 그리 장벽이 되지 않는다. 일부터 시작하고 나서 그 나라의 말을 배워 정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내가 근무하는 호텔의 뷔페 레스토랑에는 인도요리 코너가 있다. 여기선 아침마다 향신료와 커리 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준비한다. 처음에는 이 향이 좀 낯설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이곳 주방을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돈다. 인도인 주방장 잭 모한은 솜씨가 아주 좋았다. 그는 한국인 입맛에 거부감이 없도록 인도 커리의 맛과 향을 절묘하게 조절했고, 덕분에 인도요리 코너는 인기가 좋았다.
주방장 잭은 지성적인 인도인이었다. 그는 커리를 만들면서 양고기·닭고기·해산물·야채 등등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했지만 유일하게 쇠고기로는 만들지 않았다. 그가 힌두교도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의 대답이 궁금해서 나는 ‘전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럽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힌두교도에게 암소는 어머니처럼 숭배되기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의 지성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인도 인구의 약 80%가 힌두교이며, 그 외에 이슬람교 15%, 기독교 2.3%, 시크교 1.9%, 불교 0.8% 등등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붓다의 고향에서 불교도가 불과 0.8%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주방장 잭은 요리 솜씨도 일품이었지만 수다도 그에 못지않았다. 외로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주방이란 공간이 그렇다. 늘 사람이 북적대며 오가지만, 각자 자신이 맡은 일에 정신없이 몰두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7년이나 머물렀지만, 그는 여기서 자신의 고향에 대해 말할 기회가 별로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날 잭은 나에게 인도의 넓은 땅만큼이나 힌두교에는 신들이 많고 음식들도 동서남북으로 정말 많다면서, 신이 나서 인도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려주었다.
확실히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돌아와 인도 요리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었다. 인도의 지도를 펴 놓고 향신료의 산지를 찾아보기도 했고, 인도의 식재료들과 그것이 생산되는 지역의 기후를 연결해 보기도 했다. 급기야 인도의 문화유산들까지 살펴보고 있었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타지마할 궁전과 아그라 요새 그리고 소아미 박 사원을 걷고 있었다. 엄청난 인도 만찬을 앞에 두고 막 입에 넣으려던 찰라! 꿈은 꼭 이런 순간에 깬다. 잠에서 깬 나는 주방장 잭 모한의 수다가 어쩌면 마법의 주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는 우리 호텔에서 7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올해 초 떠났다. 코로나19 때문이었다. 인도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요즘도 가끔은 그가 들려주던 인도 이야기가 그립다.
그러던 중에 ‘미친 듯이 웃긴 인도 요리 탐방기’라며 내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다. 최근 출간된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라는 인문 에세이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 2010)’를 패러디한 제목 때문에 더욱 눈길이 갔다. 저자 마이클 부스는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출판·방송·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여러 매체에 여행·음식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정황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서른아홉 살의 나이에 느끼는 인생의 허전함,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데서 오는 서글픔, 그는 삶에 찌들고, 술에 빠져서, 결국 시골로 이사까지 했지만, 계속 정신적으로 지쳐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현명한 아내의 권유로 가족 모두 인도 여행을 하게 됐는데, 이 여행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에서는 저자의 인도 먹방 이야기부터 명상과 요가를 배우면서 깨닫게 된 것들, 그리고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게 되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다스림으로써 결국 진정한 행복의 기준을 다시 정립해 나갔던 전 과정을 아주 실감 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얼마 전 읽었던 최여정 작가의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가 자주 떠올랐다. 마이클 부스와 최여정 작가에게서 공통점이 느껴졌다. ‘공감각의 문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다가 눈 감으면, 그들이 묘사하는 그 시공간이 내 머릿속에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의 초대형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를 읽는 내내 나는 델리의 시내를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녔고, 길거리 음식을 먹었으며, 저자와 함께 요가와 명상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저자가 깨달았다는 그 ‘행복의 새로운 기준’이 어느덧 내 것이 돼 버렸다. 읽다가 보면 절로 행복해지는 그런 책이다. 주방장 잭 모한의 수다와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는 인도가 나를 부르는 마법의 주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