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끝에 선 생명의 아름다움…조용미 시인의 ‘꽃잎’

절벽 끝에 선 생명의 아름다움…조용미 시인의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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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절벽 끝에 선 생명의 아름다움…조용미 시인의 ‘꽃잎’

절벽 끝에 선 생명의 아름다움…조용미 시인의 ‘꽃잎’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바람의 힘을 빌려 몸을 날리는 꽃잎처럼
뛰어내리고 싶었다


허공으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봄 저물녘의 흰 꽃잎들


삶이 곧 치욕이라는 걸,
어떤 간절함도
이 치욕을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걸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붉은 땅 위로 내리꽂히는 장대비처럼,
어둑한 겨울 숲에서 혼자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동백의 모가지처럼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발아래 까마득한 것들 다 공중으로
불러들이고 싶다


역류하는 것들의 힘으로
떨어지는 나는 폭발물이다


2004년 4월, 눈이 내리는 줄 알았다. 벚꽃이 빈틈없이 지고 있었다. 창밖은 백지 같았다.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웃는 사람들 틈에는 우는 사람도 있었다. 벚꽃이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지는 것처럼, 눈물도 조용했다. 삶은 시끄러울 수 있어도, 죽음은 고요해야 한다. 그래야 옳다고 생각했다.

벚꽃은 지는 순간에 가장 아름답다.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벚꽃에게는 마지막이다. 우리는 벚꽃의 죽음을 웃음으로 혹은 탄성으로 조문했다. 순간의 아름다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벚꽃의 아름다움은 극한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보는 사람에게 거의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꽃이 있어요. 제게는 양귀비, 능소화, 동백, 목련이 그래요. 그 꽃들을 바라보면 세계와 불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저처럼요. 그 꽃들은 대개 ‘통꽃’이죠. 잎이 하나하나 떨어지는 게 아니라 통째로 떨어져요. 툭, 하고. 그리고 검게 변해가죠.”

깊은 뿌리를 땅에 딛고 한철 피어난 꽃들은 다시 땅 위로 진다. 조용미 시인의 가슴을 울린 동백은 툭, 툭 땅을 울리며 진다. 가지를 떠나는 순간 생명은 뒷걸음질친다. 순식간에 갈변하는 과일처럼, 색 바랜 꽃은 더 이상 눈길을 끌지 못한다. 환경미화원의 무심한 비질은 그들을 땅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것들은 비닐봉지에 담기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렇다고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다시 탄생을 준비한다. 죽음을 슬퍼하느라 머뭇거리지도 않고 생명을 축복하느라 지체하지도 않는다. 숨 가쁘게 생멸을 거듭해온 한 해, 겨울의 침묵은 무심한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1월에는, 봄꽃이 지고 가을 낙엽을 쓸어 담는 동안 우리를 살아 있게 했던 온갖 즐거움과 슬픔을 조용히 반추할 여지가 남는다.

“‘멸(滅)’은 ‘생(生)’의 다른 이름이죠. 완전한 멸망을 꿈꾸는 사람은, 삶 속에서 죽음까지도 껴안아요.”
가만히 2007년을 복기한다. 숱한 만남과 이별이 있었고, 삶과 죽음도 선명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찬란한 아름다움에 행복하게 눈이 멀었고, 같은 눈으로 눈물 흘릴 일도 있었다. 그게 일상이었다. 극한 감정의 요동 속에서, 나는 아름다움의 극한을 봤다고 섣불리 생각했다. 이내 지겨워지기도 했다. 더 이상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시인의 마음을 완전한 파멸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고통이 길게 이어질 때 느껴지는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꽃잎’을 쓴 계기라고 했다.

“사랑과 파멸도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아름다움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하는 것처럼.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안 감독의 최근작 ‘색, 계’의 사랑은 두 사람을 파멸시켰다. 탕 웨이는 목숨을 잃었고, 양조위는 생명의 끝자락에서 사랑을 잃었다. 그 사랑은 경계해야 마땅했다. 위험하니까,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인가. 눈멀게 하지 않는 아름다움도 없다. 두 사람은, 아름다움을 좇아 끝까지 갔다. 폭발하는 생명력이었다.

삶과 죽음, 멸과 생, 사랑과 이별, 아름다움과 추함은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야누스의 다른 표정이다. 로마 사람들은, 문에는 앞뒤가 따로 없다고 생각해 문의 수호신 야누스도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문’은 시작을 의미해서, 야누스를 사물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했다. 1월을 뜻하는 영어 재뉴어리(January)는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라틴어 ‘야누아리우스(Januarius)’에서 유래했다. 로마 사람들도 끝과 시작이 결국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08년, 시간은 냉정하게 증명을 계속할 것이다.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움과 채 흘리지 못한 눈물은 올해도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줄 것임을. 잔인하고 아파도, 그래야 생이 가치 있다는 것을. 사실, 2007년도 그래서 아름다웠다.

▶시인 조용미는 1962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1990년 「한길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 등의 시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96), 「일만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2000),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2004)이 있으며, 2005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 장소 협찬 / 카페 ‘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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