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현의 실루엣 단상

프런트 에세이

작가 이현의 실루엣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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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쯤이면 으레 닥쳐올 입시철이 생각난다. 내가 지금 입시를 생각할 나이는 아니지만 입시철만 되면 두 마리의 나비가 환무를 하듯 팔랑거리는 실루엣 같은 영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벌써 40년이 지난 일이고 특별한 의미도 없는 생활의 한 단면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고 내장되어 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프런트 에세이]작가 이현의 실루엣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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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루엣의 근원은 40년 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K대학에 합격한 그해 2월경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입시 추위는 있었다. 변변찮은 내복과 부실한 식단에 원인이 있었겠지만 긴장과 불안 같은 마음속의 추위가 한층 수험생들을 떨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지독했던 입시 추위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는 지금처럼 입시제도가 전문화 되어 있지 않고 매우 단세포적인 구조여서 무조건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시험을 쳐서 점수만 좋으면 합격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험문제도 각 대학이 독자적으로 출제했는데 전부 주관식 논술형이었다.

내가 지원한 대학은 다섯 개의 논제를 주고 3개 이상만 맞추면 합격시켜주는 관용을 베풀고 있었다. 그날의 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지금 자세히 가늠할 수는 없어도 연필을 쥔 손이 얼어붙어서 시험이 끝난 후까지 고생을 했다는 것은 생생하다. 아마 그때 시험 당일 쓴 답안지 내용이 지금 A4용지 20여 매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시험 과정이 내게 남달리 어렵게 느껴진 것은 가족들 모르게 나 혼자 진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집은 가난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비참한 상태였다.

천 석 넘는 유산을 물려받은 아버지는 제일고보와 동경대를 마치고 숙명처럼 좌경 활동을 하다가 6·25 때 월북하셨고 당시 환갑을 넘긴 할머니와 우리 5남매가 삼십대 중반의 어머니 등에 삶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내가 대학을 가겠다고 나서는 것부터가 불효이고 억지였다.

[프런트 에세이]작가 이현의 실루엣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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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덜컥 합격을 해놓고 보니 그 또한 혼자서 풀 수 없는 문제여서 고민 끝에 어머니와 할머니께 털어놓게 된 것인데, 그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대학의 당락은 고사하고 “저 철없는 아이”, “지 애비 닮은 천왕세(세상 물정 모르고 책만 읽은 사람)” 등으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는 법이어서 입학금 마감일은 바싹바싹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에 비해 신식 교육을 이해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그런대로 내 입장을 이해하고 어떻게든 진학을 시켜보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셨지만 당시 삯바느질 하던 어머니의 미싱틀 하나 보고 돈 빌려줄 사람은 없었다.


입학금 마감일을 불과 삼일 남겨 두고 어머니가 나를 불러 결심이라도 한 듯 잘라 말씀하셨다.
“승우야,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군산에 가봐라. 군산 세관장으로 있는 윤기호라는 사람이 네 아버지와 제일고보 동창이고, 일본에서 대학도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군데, 방학 때면 우리 고향집에 와서 놀기도 한 사람이라서 할머니도 잘 알고 나도 잘 안다. 내가 편지를 써줄 테니까 가서 잘 얘기하면 입학금은 대줄 거야! 그 길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분이 아버지도 안 계신데 얼굴도 모르는 나한데 그런 큰돈을 주겠어요?”
“아니다. 그분은 우리 사정을 잘 알고 계실 거야! 그리고 그분은 윗대부터 그 지방 갑부였어. 그런 돈 아낄 사람은 아니니까 한번 가봐라!”

“어쩔 수 없으니까 가긴 가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세관에 계시는지도 확실히 모르잖습니까?”
“아니다. 작년에 내가 그 얘기를 들었으니까 틀림없이 그대로 계실 거야. 마음 단단히 먹고 한번 가봐라.”
“네, 가보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해놓고도 자신도 없고, 차비 걱정부터 앞섰다. 그런 내 마음을 이미 알아차리신 듯 어머니가 꼬깃한 지폐 몇 장을 내놓으시며 나를 달랬다.

“승우야! 아무리 돌아다녀도 돈은 이것밖에 더 구할 수가 없다. 돌아올 차비가 안 될 것 같은데, 어쩌면 좋겠니?”
“괜찮습니다, 어머니. 아무려면 그런 분이 돌아올 차비도 안 주시겠습니까?”

그때 내게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우선 급한 김에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은 암담한 기분이었다. 서울을 한두 번 다닌 것 외에 이렇다 할 여행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군산이라는 낯선 곳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도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우선 지도를 펴 놓고 위치부터 찾아 봤다. 같은 나라지만 한 번도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도시 군산은 반도의 서남쪽 발치에 놓인 항구였다. 내가 살던 경북 오지의 ‘ㅇ’시에서 갈 수 있는 길은 당시의 교통 사정으로는 ‘ㅇ’시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가서 거기서 대전까지 가고, 대전에서 군산행 열차를 갈아타고 가는 길밖에 없었다.


돌아올 차비도 없는 불안한 여행과 생면부지 한 사람의 동정심에 의지하여 대학 입학의 가부를 결정해야 하는 참담한 현실 앞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도 없고, 이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일뿐이었다. 나는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다짐했다.

‘이 여행이야말로 내게는 피할 수 없는 투쟁이고, 유일한 희망이다’
나는 여행을 서둘렀다. 먼저 밤송이처럼 까칠하게 자란 까까머리를 처음으로 밑돌이로 깎고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물들인 군복을 교복 대신 입었다. 거울 속에 비친 상고머리에 뽀송한 청년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써 주신 편지를 신주 모시듯 깊숙이 간직하고, 지전 몇 장을 들고 출발할 때는 그래도 휘파람을 쓱쓱 불며 제법 경쾌하게 집을 나섰다.

2월 중순이고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은 대합실은 써늘했다. 대합실 천장에 달린 엉뚱하게 크기만 한 샹들리에와 크고 둥근 기둥들은 사람들을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고, 그 크기에 비해 희미한 불빛은 사람들의 얼굴 윤곽마저 가려놓아 한층 더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보였다. 많은 사람들의 웅얼거리는 무거운 소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서성거림들…. 나는 금세 그런 낯선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금 전까지 다져온 전의는 사라지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물론 홑겹의 군복 때문에 느끼는 외부적인 추위도 있었지만 그것은 긴장과 불안에서 오는 마음의 떨림이었다. 아직 여행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공연히 주눅이 들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긴 매표 행렬에 붙어 서서도 옆 사람에게 열차의 행선지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A역을 출발한 기차가 대구역을 거쳐 대전역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해질 무렵이었고 대전역에서 군산행 열차를 바꿔 탄 시간은 저녁 7시경이었다. 그때는 전쟁이 난 지 10년이 지난 때였지만 대전역은 여전히 군사 요충지로 군시설과 군인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얻어 탄 기차는 현대식 객실은 없고 나무의자가 서로 등지고 놓인 구형 객실이었다. 거기다 조명등도 당시 가정용으로 쓰이던 희미한 백열등이 띄엄띄엄 붙어 있었다. 기차는 역마다 서서 군용 열차들에게 길을 비켜주고 틈만 나면 제 멋대로 달렸다.

나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낯선 미지의 세계로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차창 밖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고 희미한 백열등이 드문드문 걸린 객실은 어느새 승객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빈 의자들만 공허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가다 말다 하던 기차도 밤이 깊어지자, 차츰 속도를 높이고 역마다 머무는 시간도 짧아져 수없이 드나들던 잡상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늘 갑자기 들이닥친 새로운 변화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으로 하루 종일 긴장과 불안에 시달리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피로와 공복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의식은 살아 있어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숭숭한 환영에 빠져 있었다.

고향집 툇마루가 기우뚱 떠오르는가 하면, 할머니의 흰머리가 있고 황갈색 불독이 이빨을 까뒤집고 덤벼드는데 아무리 뛰려 해도 발은 떨어지지 않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어머니! 어디선가 새소리, 바람소리 같은 노래 소리가 들리고 나는 갑자기 쿵하는 강한 충격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의자에서 떨어진 것이다. 건너편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고, 그 옆에 놓인 축음기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이십대 초반의 처녀와 그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보이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프런트 에세이]작가 이현의 실루엣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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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의자에 앉았지만 이내 아슴아슴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직도 객실에는 낭랑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여자들은 두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자가 느리고 부드러운, 슬픈 곡조였다가 이내 곡이 빠른 템포로 바뀌면서 춤은 더 격렬해졌다. 그것은 마치 두 마리의 나비가 환무를 하듯 팔랑팔랑 허공을 떠돌며 실루엣 영상처럼 희미하게 멀어졌다. 이윽고 열차가 덜컹 멎으면서 나는 두 번째 의자에서 떨어졌다. 희미한 백열등이 보이고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낯선 여자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있던 여자들이었다.

“학생! 괜찮아요? 이 땀 좀 봐!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은데, 왜 그러세요?”
“학생이 자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굴러 떨어져서 깜짝 놀랐잖아!”
“죄송합니다, 잠꼬대가 심해서….”

여자들은 안쓰러운 듯 몇 마디 위로를 하고 삶은 계란과 껍질째 삶아서 실로 꿴 땅콩 두 줄을 줬다. 그리곤 술병을 내밀며 마셔보라고 권했다.

“학생, 너무 피로하고 추워 보여. 이걸 마시면 열이 좀 날 거야. 조금 마셔봐 !”
무슨 술인지 약인지는 몰랐지만 그것은 내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당시 유행하던 도라지 위스키였고 비록 조잡한 인공주였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아 금세 취기가 올랐다. 두 여자가 다시 경쾌한 리듬에 따라 온몸을 흔들어댔다. 그것은 마치 두 마리의 나비가 불빛을 감싸고 다투듯 나래짓하는 실루엣처럼 팔랑거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여자들이 왜 그렇게 달리는 열차 안에서 미친 듯 몸을 비틀며 춤을 춘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낯선 곳으로 팔려 가는 호스티스나 다방 아가씨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나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초조를 털어내기 위해 값싼 위스키라도 한잔 마시고 그런 광란의 몸짓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몇 안 되던 승객마저 다 내리자 텅 빈 객실은 달리는 열차의 소음과 통속적인 노랫 가락에 맞추어 미친 듯 몸을 비틀며 펄럭거리는 영상들이 뒤엉켜 오히려 기괴한 광기마저 흘러 넘쳤다.

사실 목적지인 군산에 도착하여 세관장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억이 없다. 그리고 등록금에는 못 미치지만 상당한 돈을 받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결국 입학금을 내지 못해 K대의 진학은 무산되었고 다음 해, 또 다음 해를 넘기면서 8년 만에 나 자신도 생소한 대학을 졸업했지만 연좌제란 죄명으로 학력의 반대급부를 박탈당했다.

자유경쟁 사회에서 학력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학력이나 능력 이전에 연좌제의 멍에 때문에 그 사용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렵게 입사 시험에 합격을 해도 수습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다. 가는 곳마다 일 개월만 지나면 사장은 경찰에서 매월 나에 대한 동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내 인생의 황금기 삼십 년을 훔쳐 갔다. 인생은 길지 않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황금기 삼십 년을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몽매한 성장기와 황혼의 노년기밖에 없다.

결국 시궁창을 뒹굴며 얻어낸 나 홀로 장학생의 졸업장은 휴지조각이 되어 굴러다니다가 어머니 유품과 함께 불태워졌다. 그리고 세관장의 예언대로 나와 동생은 한 번도 직업다운 직업을 가져보지 못하고 자영업으로 신산한 인생행로를 걷다가 초로의 백발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우가 자영업인 글 장사를 해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우리 일족이 무사히 살아남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이야기기를 하면서 공연히 슬퍼지는 것은 자만일까 위로일까? 아마 슬픔일 것이다.

Profile 작가 이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동아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에 단편 「시선(施善)에 대하여」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0여 편의 중·단편을 발표했다. 이중 「시선에 대하여」는 MBC 베스트극장을 통해 방영되었다. 지난해에는 「시선에 대하여」, 「개와 맥주」, 「입석」, 「노조 탄생」, 「대미(大尾)」등 다섯 편의 단편과 중편 「수라도(修羅圖)」한 편으로 구성된 첫 소설집 「수라도」를 냈다. 월간 ‘의료계’ 및 미래문학 대표, ‘환경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소설가 이문열의 친형이다.

진행 / 두경아 기자 사진 / 원상희,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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