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하고 싶을까? 아마도 이야기가 아닐까?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그녀/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녀/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귀가 간지러워진다(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통화료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수다쟁이가 되는 동안 그녀는 벙어리가 되고, 그녀가 수다쟁이가 되는 동안 그는 벙어리가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내 자신이 한없이 바보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수다쟁이와 벙어리 사이의 틈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리 들어도, 나의 어느 부분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는 이런 멋진 구절이 나온다. 잠깐만 인용해보자면,
이 연인들에게는 이야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길거리에 버려진 운동화도, 깨진 가로등도, 멋진 이야기들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것을 이들은 알게 된다. 나는 이 연인들이 자주 침묵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우리들은 모두 미로를 품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 미로를 탐사할 용기와 자유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겠지. 어떻게 그 미로를 탐사해야 하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해줄 것이다. 이야기로 찾으라고. 내 이야기가 아닌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이야기. 연인에게 밤새 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은 실연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그를 생각하며 맨발로 눈을 밟아본다거나 찌그러진 깡통을 걷어 차본 사람이라면, 별것도 아닌 사물들에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안의 이야기들이 비로소 바깥의 이야기들과 만날 때, 진짜 이야기가 탄생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다가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바깥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내 안의 미로가 궁금한 사람들도 나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사물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서 소설이 나온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야기를 듣던 시절은, 전설처럼, 저 멀리 흘러갔다. 이제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소설을 쓴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이야기를 엮으면 소설책 열 권은 쓰고도 남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분들에겐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분들의 삶은 소설책 한 권으로도 엮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그칠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소설을 쓰면서도 나는 파란만장한 삶들이 왜 다 소설이 될 수 없는지를 몰랐다. 그것은 조카들이 태어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조카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부터 아주아주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는 세상에 떠도는 먼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는 자주 이런 영상이 떠올랐다. 이십 년 후 나는 조카들과 마주앉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사물들과, 이미 죽었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내게 왔다면 내 이야기는 어디로 가는가? 똑같이 저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에서 어느 여자가 자신의 아이들과 마주앉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소설책 열 권으로 묶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에서(이야기에서) 나를 완성시키는 것은 내가 아니다. 타인이다. 사물이다.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다. 나를 뺀.
나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란 먼 곳으로 던져졌을 때 좋아진다고 믿는다(공간적인 의미의 먼 곳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그러지 못할 때 이야기는 나빠진다. 그런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몇 년 전에 본 어떤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있다(한 여자는 어떤 남자의 부인이고 한 여자는 그 남자의 애인이다). 그 이후의 장면은 우리 모두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부인이 남편의 애인 얼굴에 물을 끼얹겠지. 그러면 그 여자도 부인의 얼굴에 물을 끼얹을 것이다. 혹은 따귀를 때리든지. 나는 이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후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라고 어느 소설가는 말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피스칼 메르시어 지음)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이야기란 되갚는 것이 아니다. 즉 따귀를 따귀로 갚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얼굴에 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란 조금씩 일부분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버린 일부분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장률 감독의 영화 ‘경계’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아내와 딸을 떠나보낸 항가이라는 사내는 갈 곳이 없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이다. 이들의 침대 사이에는 커튼이 전부다. 어느 날 밤 항가이는 최순희(그 여인의 이름이다)의 마음을 오해하고는 그녀를 품에 안으려 한다. 이때 그녀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녀는 항가이가 지니고 있던 칼을 빼어든다(그 남자를 칼로 찌르겠구나, 라고 상상하신 분이 있다면 땡!). 그녀는 그 칼을 들고 남자의 가축우리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염소를 죽인다. 그녀는 난자된 염소를 끌고 나와 항가이 앞에 놓는다. 나는 이 장면에 이야기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범하려는 남자를 칼로 찌르는 대신 그의 염소를 죽이는 순간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멀리 확장된다. 창작자가 겸손해지는 지점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이야기가 확장된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나보다 더 커진다는 뜻이니까. 그와 반대로 따귀를 따귀로 갚을 때, 창작자는, 이야기를 영원히 그들이 만난 카페 안에 가두어버린다. 여자가 염소를 죽이는 순간 우리들은 온전한 개인이 탄생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카페에 앉아 서로의 얼굴에 물을 끼얹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우리들은 형편없이 무너지는 개인을 본다.
그렇다면, 후진 이야기들이 한순간 세상을 형편없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멋진 이야기들이 우리 앞에 남아 있다고 믿지 않는 순간, 사람은 늙어버린다. 10대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이 일인칭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쓰이지 않은 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광화문에 5만 명이 집결을 하면, 5만 권의 책이 모인 셈이다. 그들은 각자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수만 권의 책은 일인칭인 동시에 이인칭이고 이인칭인 동시에 삼인칭이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이야기가 그녀/그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이야기는 순환한다(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지루하다. 그 비밀은 여기에 있다).
마르케스 아저씨가 잘 말해주었듯이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서전을 미리 써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 멈추는가? 멋진 이야기들은 이야기꾼의 품을 떠나 세상을 떠돈다. 그런 원리에 의하면, 이야기를 절대 멈출 수가 없다. 이야기는 스스로 멈출 뿐이다. 백일 동안, 천일 동안, 내 이야기만 한다면 이야기를 멈추게 되어 있다. 세상에 이야기가 하나뿐이라면 그런 이야기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 그러니 스스로 멈출 수밖에.
나는 정말이지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조카들에게 “세상은 정말 재미있단다”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아직 넘겨보지 못한 페이지들이 가득한 거대한 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서전이란 성공한 이야기들로 채운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미리 자서전을 완성해놓은 사람이 할 일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자기 방에 앉아서 그걸 읽는 것. 독자가 한 명뿐이어도 아무 상관없을 것이다. 그 세계는 너무 완벽하니까. 찌그러진 깡통을 또 밟는 사람, 가로등 아래에서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 여드름 때문에 죽고 싶은 아이, 이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여인, 아무리 달려도 기록이 단축되지 않는 달리기 선수…. 이들 사이에 이야기들은 숨어 있다. 아직 이야기가 남아 있는 우리들은 조금 더 밖으로 나가 놀자. 내 이야기가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때까지. 서로서로가 독자가 되어줄 때까지.
1973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소설집으로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가 있다. 2007년 제14회 이수문학상(소설 부문)을 받았으며, 2005년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문 올해의 예술상, 2005 현대 문학상 등을 받았다.
편집 후기
수많은 광고나 스팸 메일 중 특별한 편지 한 통이 눈에 띈다. 윤성희 작가다. 그는 어김없이 약속한 날짜에 에세이를 보내왔다. 한 번도 발표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글을 접하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메일을 클릭한다 - 첨부 파일을 연다 - 읽는다. 간단한 과정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숨찬 순간이다.
윤성희 작가를 알게 된 건 2008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통해서였다. 기대에 가득 차 수상작은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나머지 우수작들은 다음으로 미뤄둔 상태였다. 나머지 소설을 읽은 건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였다. 길고 지루했던 그 공간에서 나는 이 책을 찾아 들었고, 그렇게 윤성희 작가와 만났다. 놀랄 만한 상상력, 죽음이라는 어두운 소재를 경쾌하게 풀어낸 작가의 능력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가 보내온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에세이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의 소재를 찾는 방법에서부터 개개인 모두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것까지. 문득 궁금해진다. 광화문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 그들은 수만 개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는 걸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는 걸까?
■ 진행 / 두경아 기자 ■ 글 / 윤성희 ■ 사진 / 원상희,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