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윤예영 시인의 ‘툭’

시인과 함께 읽는 시

⑧윤예영 시인의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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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일상을 이어 붙인 비명 소리


#1 금요일 밤 강남역은 혼란스럽다. 2호선 막차에는 삼겹살 냄새, 알코올 냄새가 진동한다. 술은 종종 직장인들의 유일한 도피처다. 새벽이 되면 사람들은 좀비처럼 비틀거린다. 비틀비틀, 집으로 간다. 벗고 놀든 진탕 취하든 취기가 가시면 다시 집이고, 주말이 지나면 다시 회사다. 도피의 끝은 그렇게 허탈하다. 아무도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안간힘을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틀이다. 삶은, 그런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이어 붙인 거대한 모자이크다.

[시인과 함께 읽는 시]⑧윤예영 시인의 ‘툭’

[시인과 함께 읽는 시]⑧윤예영 시인의 ‘툭’

“식탁 모서리에 올려놓은 작은 물잔이 쉽게 떨어지는 순간처럼, 그렇게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고 살아요. 잘 못 풀고 살아서 그런가(웃음)?`”


#2 치밀하게 이어 붙인 모자이크에도 틈은 있다. 윤예영 시인은 일상의 틈에 주목한다. ‘벽에 걸린 달력 떨어지는 순간’, ‘앞서 가던 남자의 모가지가 떨어지는 순간’……‘식탁 모서리에 올려놓은 참은 숨 떨어지는 순간’ 지독하게 일상적인 균열은 의외로 치명적일 수 있다.

“남편 옷을 고르다가 갑자기 마음이 떠나서 집을 나가는 여자처럼,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마음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순간이 있죠. 내가 바라는 것, 기대하는 것에 대해 붙잡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바꾼 거예요. 인간관계에서 그럴 수도 있고. 끝까지 몰린 거죠.”

활짝 웃는 남편의 앞니에 낀 고춧가루 때문에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은 정이 다 떨어졌다든가, 약지발가락이 엄지발가락보다 길어서 이별을 결심했다는 건 흔한 얘기다. 인연, 사랑, 일상 같은 사소하고 진부한 담론은 이렇게 미세한 균열 때문에 붕괴할 수 있다.


#3 ‘끈을 놓는다’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끈이 삶이라면 죽음이 되고, 정신이라면 광기(狂氣)가 된다. 술은 이성의 끈을 놓으려는 소극적인 시도고, 여행은 잠깐이나마 일상의 끈을 놓아버린 결과다. ‘바빠서 죽겠는’ 현대인은, 회사의 허락 없인 여행 갈 시간도 없다.

“내 의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처한 상황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균열이 생기는 거죠. 정신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데, 주변의 요구와 억압이 많으니까. 그래서 스트레스도 생기고.”
결국 일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 사이의 치열한 다툼이다. 토끼 같은 딸자식 때문에 부부는 여행을 갈 수 없고, 나만 보고 사는 가족들 때문에 회사도 그만두지 못한다. 두려움이 너무 크다. 균열은 사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 따윈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온다.

#4 하지만 언제 두려움이 현실인 적 있었나. 인간의 마음이 무서워하는 것은 항상 ‘미지(未知)’였다. 해보지도 않고 접는다. 보지도 않고 안다고 생각한다. 탐험가는 그래서 칭송받는다. 모두가 탐험가가 될 수는 없지만, 두려움의 실체를 아는 것은 위태로운 일상의 균열을 회복하는 데 일말의 도움의 된다.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이렇게 안 쓸 것 같아요. 항상 코너까지 몰아가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그 줄이 끊어져 버릴까봐 두렵거든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스스로 넘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죠.”

불륜으로 점철하는 아침드라마가 아직도 인기 있는 이유는 대다수의 주부들이 불륜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매체는, 그런 환상을 팔아 먹고산다. 드라마가 환상이듯, “두려움도 현실이 아니다(Fear is Never Actuality).” 인도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 무르티의 말이다.


#5 버지니아 울프는 인생을 거미줄에 비유했다. 얇아서 위태롭지만 끈끈해서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이 얽히고설켜 ‘인연’이 되고, 또 다른 구속이 된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는 발버둥 치면 칠수록 헤어나지 못한다.

[시인과 함께 읽는 시]⑧윤예영 시인의 ‘툭’

[시인과 함께 읽는 시]⑧윤예영 시인의 ‘툭’

“드라마나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거긴 욕망과 꿈의 공간이잖아요. 저는 시(詩)를 쓰고요. 모범생인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시기도 있었고, 또 많이 가봤지만 결국엔 돌아오더라고요. 사람이 변하기는 참 힘든 것 같아요(웃음).”

‘툭’은 나도 모르게 내뱉는 한숨 소리, 말 한마디에 상처받아 속으로만 지르는 비명 소리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지만 나에게만은 쩌렁쩌렁 울리는 마음의 소리다. 아슬아슬, 시인은 “그렇게 사는 게 일상”이라며 담담했다. 담담하게, 이름 옆에 발자국도 그려 넣었다. 윤예영 시인의 ‘툭’은 2008년 4월 초판 발행된 시집 「해바라기 연대기」(랜덤하우스코리아)에 실렸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원상희



윤예영 시인은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문학에 “동그라미 변주곡”외 네 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강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옛날 이야기와 기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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