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여 만에, 친정엄마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그동안 간간이 아버지는 이메일을 보내셨지만 엄마의 이메일은 오랜만이다. 수신인은 나와 올케, 이모들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메일 제목이 ‘이집 엄마도 뿔났다?’. 제목만 보고 더럭 겁이 났다. 그동안 전화 올림이 뜸해서 화나신 걸까?
늦복의 시작은 아버지의 은퇴였다.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일에서 해방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대한민국의 연세 드신 아버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태백’, ‘사오정’이 허다한 세상에, 1934년생이신 아버지께서 월급 받는 직장에 칠순 넘도록 계셨으니 은퇴 기념 잔치를 열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직장에 다니지 않는 당신의 인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신 아버지는 몇 번이나 은퇴를 미루며 망설이셨다. 몇 년 동안이나 올해까지만, 올해까지만 하면서 일을 놓지 못하실 때에도 함께 살지 않는 자식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은퇴하시겠다는 말씀은 그냥 입버릇이고, 아버지는 팔십까지 구십까지 당연히 직장에 다니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엄마의 운명은 우리처럼 태평하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감정 기복이 심하고 많이 불안해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자식들이 뭘 어찌할 수 있으랴. 처음엔 다 그러시다가, 옛 친구들과 등산도 하시고 분재도 가꾸시면서 한가롭게 소일하는 법을 배우시겠지. 큰 재산을 모아놓고 부부가 골프 파트너로 여생을 즐길 수 있는 형편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노부부가 그런 식으로 노년에 적응하지 않던가?
그러나 언제나 패기만만하게 세상과 맞장 뜨시던 나의 부모님. 두 분은 그렇게 평범한 노후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말다툼과 신세 한탄이 잦은 질풍노도의 한세월을 보내신다 싶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두 분은 잉꼬부부처럼 사이가 좋아지셨다. 그리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청도에 가서 6개월 동안 살기로 했다.”
“운문사가 있는 청도요?”
“아니, 산둥성 칭다오.”
우려 섞인 출발과는 다르게 두 분은 산뜻하고 유능하게 칭다오에 안착하셨다. 두 분이 겪은 혼선과 시행착오가 얼마만큼이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국제구조단이 출동해야할 만큼은 아니었다. 두 분은 친절한 조선족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장기 투숙객으로 짐을 푸셨다. 그 다음으로는 중국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셨고 현지에서 휴대폰을 개통하셨다. 중국 국내선 기차와 비행기를 이용해 몇 군데 여행을 다녀오시더니, 한국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칭다오로 초청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딸과 함께 초여름에 칭다오를 방문했다. 맥주와 바닷가가 유명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바가 없는 낯선 도시였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이 노년의 신접살림을 차리신 그곳은 더 이상 먼 곳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산둥성에는 우리나라 기업의 진출이 많아서 웬만한 국내 도시보다 비행기 편이 더 많고 다양했다(나는 운 좋게도 아시아나 항공사의 폭탄 할인 비행기표를 구했다. 인천-칭다오 왕복 비행기 티켓 값이 1인당 6만5천원, 초등학생인 딸은 할인을 더 받아서 4만5천원이라니, 서울-부산 국내선 비행기표보다 싸지 않은가! 돈 11만원으로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다면 이제 주말마다 칭다오에 놀러가겠다고 눈에 불을 켜는 순간, 잠시 눈을 의심했다. 분명 표값은 11만원인데 왜 신용카드의 총 결제 대금은 49만원인 거지? 내가 무슨 인터넷 사기라도 당한 건가? 알고 보니 비행기표 값은 11만원인데 국제선 유류할증료와 세금이 38만원이란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거다(결국 칭다오는 주말마다 휭 하니 놀러가기엔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외국 경험도 많고 영어도 운전도 능통하신 아버지는 별반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여러모로 예민하고 까다로운 엄마의 중국 생활은 과연 어떨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타향살이 고되고 외로워 청승맞은 모습이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로 밝혀졌고, 부모님은 유쾌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공항에서 우리 모녀를 기다리고 계셨다. 게다가 유능하기까지! 나는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젊음과 체력을 앞세워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중국에서 나의 젊음과 체력이란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중국에서 필요한 건 중국어였다. 몇 달 동안 피커폰 중국어회화로 갈고 닦은 부모님의 중국어 실력은, 두 분은 보잘것없는 실력에 불과하다고 겸양을 보이셨으나, 발군이었다. 비록 숫자와 오른쪽, 왼쪽 정도의 간단한 회화라도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하다못해 딸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도 나는 부모님을 앞세워 값을 물어보고 거스름돈을 받아야 했다. 유년기를 벗어난 이후로 내가 이토록 철저하게 부모님께 의존해야 했던 시절은 다시없었다.
부모님은 칭다오에 놀랍도록 잘 적응하고 계셨다. 칭다오의 모든 것이 두 분의 소유인 양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근래 발생한 쓰촨성의 지진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근간을 혹은 코앞으로 닥쳐온 올림픽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어조까지 어느새 상당히 중국인을 닮은 모습이었다.
두 분은 나에게 먹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1백 년 된 만두집의 날개 달린 군만두, 싱싱한 가리비에 가벼운 중국식 양념을 곁들인 가리비찜, ‘조국에서 모든 남새를 공수하는’평양냉면까지. 그리고 혹시라도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식사를 하게 될 경우 잊지 않고 해야 할 한마디는 “뿌야오 샹차이(향채를 빼주세요)”라는 자상한 설명도 곁들여졌다. 물론 내가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식사를 하게 되는 사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외국에서 살겠다고, 그것도 중국에서 살겠다고 처음 말씀하셨을 때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엄마가 중국 음식을 못 드신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체질적으로 채식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기름진 중국 음식은 특히나 거의 드시지 못했다.
중국으로 떠나시기 전 음식 문제는 괜찮겠느냐는 나의 우려에, 엄마는 씩씩하게 대답하셨다.
“요새는 갈비도 맛있고 중국 음식도 먹을 수 있더라. 중국에 뭐 탕수육만 있겠니? 청도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해산물도 많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엄마의 호언장담이 과연 얼마나 현실로 이루어질 것인지 상당히 궁금했는데, 직접 가서 확인한 결과 공약을 초과 달성하고 계셨다. 틀림없이 내가 좋아할 거라고 탕수육을 주문하셨는데, 물론 나도 아주 맛있게 먹었지만, 적어도 1/3 이상의 분량을 엄마가 맛있게 먹어치우셨다. 살기 위해 억지로 먹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맛있게 드시는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끼니때가 되면 식당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엄마가 벼르시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날씨가 덥다. 맥주를 꼭 마시자. 여기서는 맥주를 음료처럼 흔하게 마신다. 칭다오 비이주.”
우리 엄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놀라 자빠져야 마땅한 대사였다. 엄마는 한평생 맥주 한 모금이면 다리가 풀리는 분이었다. 역시 나를 위해 맥주를 사주시려고 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첫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두 번째 잔을 스스로 채우시는 엄마를 보니 꼭 나를 위한 맥주는 아닌 것 같았다. 멋진 노후의 만족감과 열정은 한평생 완고했던 엄마의 체질까지 훌떡 바꾸어놓았다.
일주일간의 즐거운 칭다오 여행이 끝나고 헤어질 때에는 팔려 가는 심청이처럼 그만 펑펑 울고 말았지만, 적어도 부모님이 칭다오에 얼마나 훌륭하게 적응하고 계신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마음은 편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약했던 6개월의 끝이 다가와 엄마는 금의환향을 알리는 이메일을 보내신 것이다. 엄마 없는 아이, 끈 떨어진 갓 같던 나의 허전한 생활도 드디어 끝이다.
아니아니, 잠깐만. 나의 엄마 없는 아이 생활은 끝이 아니라고 한다. 6개월의 중국 체류를 성공적으로 마치신 부모님은 더욱더 기세등등하셔서, 다음 행선지는 베트남으로 정하고 베트남 연구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아아, 우리 부모님을 누가 말리랴. 물가가 싸고 치안이 믿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이 두 분의 체류 후보지가 될 수 있다.
우리 집 엄마에게도 뿔이 났단다. 경사 났다. 엄마는 새 컴퓨터를 뿔처럼 앞세우고 돌아오실 예정이란다. 엄마가 이루어낸 첫 번째 모험에 비하면 그까짓 컴퓨터 정복쯤이야 너무 귀여운 목표가 아닌가? 중국을 정복한 우리 엄마라면 6개월 안에 컴퓨터를 조립해서 손녀들에게 선물로 줄 수 있을 것 같다. 경축, 엄마의 뿔. 탕수육도 잘 드시고 맥주도 잘 드시고, 무엇보다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우리 엄마의 아름다운 노후. 브라보, 우리 엄마의 세상에서 가장 멋진 뿔.
| 편집 후기 어머니는 일 년에 한 번쯤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우신다. 기도원을 방문할 때도 있고 이모들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일단 집을 떠나시면 휴대폰을 좀체 받지 않으신다. 어쩌다 한 번 전화라도 연결될 때면 집에서는 한 번도 들어볼 수 없는 명랑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럴 때면 ‘내가 알던 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화제의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에서 최근 엄마 ‘한자’(김혜자)는 일 년간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40년간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 한 번쯤 자신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한다. 그는 오피스텔을 얻어 살면서 네일 케어를 받고, 딸과 찻집에 앉아 담소도 나누고, 컴퓨터 강좌를 들으며 심야 영화를 보기도 한다. 심윤경이 전해온 어머니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웠다. ‘죄다 부러워서 침 질질 흘리는 늦복 터진 임여사’라는 표현대로 그의 어머니는 한자보다 한수 위였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거나, 평소 입에도 대지 않는 맥주를 자연스럽게 마시거나, 식성이 바뀌어 중국 음식까지 섭렵한 그는 어떤 드라마 캐릭터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가족에 묶여 있는 것일 뿐. |
Profile 소설가 심윤경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장편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장편소설 「달의 제단」을 발표해 2005년 제6회 무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6년 장편소설 「이현의 연애」를, 2008년 「서라벌 사람들」을 펴냈다.
■진행 / 두경아 기자 ■글 / 심윤경 ■ 사진/ 두경아, K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