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스며든 삶의 체온, 함께 짊어진 세상의 무게
‘끊임없이 집을 삼키며, 집을 부수며, 폐허의 집터에서 한 채의 집을 복원하려 드는’ 시인 이정록은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농부일기’가,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에 ‘아이들에게’와 ‘감자꽃이 피기 전에 북을 돋워주세요’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혈거시대’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가 자신의 좌우명이라며 여유도 부리지만 온 세상을 시와 글로 채울 수 있을 만큼 부지런히 물갈퀴를 놀리는 글쟁이다.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1994)를 비롯해 「의자」(2006)까지 다섯 권의 시집과 「귀신골 송사리」 등의 동화집을 냈다. 현재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한문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
#2하지만 한 번도 아버지가 그 의자에 편히 앉아 아픈 어깨를 기대고 ‘흔들흔들’ 몸을 맡긴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의자가 아늑하고 넓은 거실 한편에 그림처럼 멋지게 놓여 있는 것도 볼 수 없었다. 흔들의자는 아무도 앉는 사람 없이 덩그러니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의자에는 엄마도, 나도 절대 앉지 않았다. 폭신한 의자를 차지한 건 아버지의 작업 바지, 집에서 입으시던 트레이닝 바지, 맨 안쪽까지 구멍을 하나 더 뚫은 허리띠, 그리고 국방색 윗도리뿐이었다.
나는 안방 문을 열어 그 의자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방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쁘고 고단한 삶이 녹아 있는, 그러나 먼지만 가득한 쓸쓸한 의자는 꼭 고집스러운 아버지 같았다. 넉넉한 풍채와 마음을 가진 중년 남성의 하루를 평온하게 마무리하도록 역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우리 집으로 팔려왔을 의자는, 겨우 가장자리가 다 닳은 허리띠 따위의 안식처밖에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나마도 흔들의자가 놓일 만한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기 한 달여 전에 망가졌다. 아버지가 나 때문에 엄청나게 화가 났던 날, 의자에 화풀이를 하다 부서진 것 같다. 아마도 흔들의자는 그 전에도 몇 번씩 분풀이를 받아줬을 것이다. 팔걸이 곳곳에 나 있던 흠집을 보면서 구체적인 어떤 날들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3사소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건, 이정록 시인의 ‘의자’라는 시를 읽으며 그때의 흔들의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꼭 한 사람의 인생 같기도 한 의자였다. 뚝딱뚝딱 만들어진 무생물에 불과했지만, 의자를 공유하던 우리 가족 외에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상당한 이야기가 저장된 의자였다. 아픔과 지침을 위로받고자 한 꿈도, 채우지 못한 결핍도, 결을 따라 새겨진 삶의 주름도, 곳곳에 남아버린 상처도.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없는 서사가 기록된 두꺼운 책처럼, 삶의 더께를 덕지덕지 묻힌 그런 의자.
“의자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잘려 나간 나무의 밑동이기도 하고, 흙 묻은 바닥이기도 하고, 걸터앉는 난간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하고. 무거운 몸을 내려놓고 아픈 허리를 기대는 곳이지요. 필요한 자리에 놓여 있는,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을 만한 ‘의자’입니다.”
의자는 소파와 다르다. 딱딱하고 삐걱거릴지라도 마냥 푹신하지 않고 다시 적당한 힘으로 앉는 사람을 떠받친다. 무게를 참고 견디며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시, 반작용할 수 있는 적당한 힘을 되돌려준다.
생의 이야기가 꾹꾹 새겨진 의자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 자신의 체온으로 덥힌 온기가 다시 오롯하게 전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받은 위로는 쉽사리 식지 않는다.
“사람도 의자가 될 수 있지요. 살아가며 힘들어하는 모든 숨 쉬는 존재에게 의자가 되길 바랍니다. 기댈 수 있고 어깨동무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넉넉한 의자요. 참외, 호박 같은 식구에게도 의자를 내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조차 모조리 ‘머리’로 보내려는 시대다. 중력을 거스르는 ‘이상한’ 세상에서도 마음의 움직임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려 몸을 덥히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 이정록. 무게를 함께 나눠 질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사람’의 또 다른 시를 하나 소개하며 끝을 맺고 싶다. 이 시는 이 글을 마무리하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따스함을 지피는 성냥 같은 시작이 될 것이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서시」 전문)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 이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