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마음 ‘툭’ 떨어지는 소리에 꺼내 본 가슴속 연서(戀書)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사랑을 생각하게 되지요. 아직은 저릿한 찬바람에도 꽃이 피었다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봄입니다”
#2 매서운 북풍을 이겨내고 먼저 봄을 알리려 피어나는 동백꽃. 겨울이 혹독할수록, 시련이 클수록 동백은 더 붉게 타오른다. 그 고결한 자태에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의미를 새겨 전통 혼례식을 장식하기도 한다지만, 어쩐지 나에게 동백꽃의 느낌이란 처연하게 번지는 ‘뭉클함’이다. 벚꽃처럼 나릿나릿 흘려보내지도 않고 매화처럼 말갛게 보여주지도 않는, 그저 아무 일 없었던 양 가장 춥고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넣은 감정이 다져지고 다져져서 빨갛게 맺힌 듯한, 그런 느낌. 애써 아무렇지 않은.
#3 여자에게 버림받고 /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 맨발로 건너며 /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 이 악물고 / 그까짓 사랑 때문에 / 그까짓 여자 때문에 / 다시는 울지 말자 / 다시는 울지 말자 / 눈물을 감추다가 / 동백꽃 붉게 터지는 / 선운사 뒤안에 가서 / 엉엉 울었다
- ‘선운사 동백꽃’(김용택) 전문
‘그까짓’ 사랑, ‘그까짓’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까짓’ 것이 내 전부였음을 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낮추면 낮출수록 더 크게 다가오는 대상은 가슴속에서 싹을 틔운다. 그리고 붉게 울어버린다.
#4 꽃이 /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 아주 잠깐이더군 // 그대가 처음 /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 잊는 것 또한 그렇게 / 순간이면 좋겠네 // 멀리서 웃는 그대여 / 산 넘어 가는 그대여 // 꽃이 / 지는 건 쉬워도 / 잊는 건 한참이더군 /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최영미) 전문
하루가 저물고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꽃이 지듯이, 사람이 지는 것도 잠깐일 수는 없을까. 그것도 동백꽃 지듯, 선명하게 만개한 그 모습 그대로 ‘툭’ 하고.
사실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느낀 건 그 뒷모습 때문이었다. 여느 꽃처럼 사그라지어 떨어진다거나 질척하게 빛을 잃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다. 시들지 않은 온전한 꽃떨기가 이를 ‘앙’ 다문 듯한 결의로 툭 떨어진 동백꽃은 땅에서 한 번 더 피어난다. 마치 예리한 칼로 베어낸 듯하게. 마음 속 슬며시 번지는 핏빛은 비릿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후련하다. 송창식이 노래한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을 따라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눈물을 후두둑 흘려보내고 나면, 이제는 진짜 봄을 기다릴 차례다. ‘잊는 건 영영 한참’이라는 말처럼, 비록 그대를 ‘영영’ 잊지 못하게 될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동백은 떨어졌으니까.
에필로그
“특히 남녘 사람들은 대부분 동백꽃의 추억이 많아요. 꽃을 꺾어 목걸이를 만들고, 떨어진 꽃으로 소꿉장난을 하고, 대나무 대롱을 꽂아 꿀을 빨아 먹었지요. 어린 시절 마냥 신기하기만 했던 동네잔치 결혼식에는 동백꽃이 꽂혀 있었어요.”
시인은 철없던 그 시절부터 사랑과 인생을 알아가는 매 순간마다 동백꽃이 있었다고 했다. 절정기에 ‘모가지’째 떨어지는 동백꽃은 우리네 삶을, 사랑을, 고독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시인들 중에는 유난히 동백을 노래한 이가 많다.
동백꽃 무더기가 붉게 깔린 곳은 많지만, 특히 이형권 시인이 추천하는 곳은 쪽빛 바다 수평선과 어우러지는 거문도다. 트레킹 코스를 따라 해안 절벽에 다다르면 동백꽃이 떨어져 뭉클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강렬함 앞에서 조금은 쓰라린 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꽃과 함께 말없이 훌쩍 흘려보내낸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봄이 온다’고 설레는 편지를 써보도록 하자.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이형권 시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