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시인의‘먼 곳의 불빛’
#1시를 읽으며 사랑하는 이와 처음 손잡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지금일까, 아닐까’ 수만 번 생각의 뒤척임을 지나 손을 뻗어 그/그녀에게 다가갈 때, 온몸의 세포가 손으로 모여드는 것만 같은 전율이 느껴진다. 눈과 귀와 심장이 손끝으로 전이되고 머릿속 온갖 생각들도 한 곳으로 수렴된다. 이 때 손은 내 몸의 일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된다. 그리고 사랑이란 ‘눈과 코와 입이, 손과 발과 몸이, 얼굴과 머리와 몸통이, 그리고 피부와 심장이 전부 다 당신을 향해 두근대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2사랑을 알아봤을 때의 느낌은 특별하다. 사랑하는 이에게서는 ‘눈이 부셔 마침내 그가 지워지는’ 빛이 발현되어 내 눈을 멀게 한다. 한 곳에 지나치게 집중했을 때처럼 눈이 시려지면서 눈물이 맺히는 경험을,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했었다. 코믹 드라마나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그 사람’의 뒤에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상황도 겪었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망막에서 느껴지는 어떤 수런거림이 있다.
때로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사람처럼 멋지고 착하고 뛰어난 사람은 없다는.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왜 없겠는가. 다만, 사랑할 만한 사람은 있지만, 그것을 알아채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있지 않을 뿐이다.
#3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채우고자 한다. 사람이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나를 알리고 싶고, 포옹 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는 「사랑의 단상」 중 한 구절처럼 그 지독한 상실감을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과정은 ‘기울기 곡선’을 급격하게 만드는 일이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서로에게 놓여진 거리를 좁히고 몸을 밀착시키는 즐겁고도 처절한 몸짓이다. 몸을 기울여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이 바로 사랑하는 당신과 만나는 통로가 되어준다. 상대와 팔다리가 엉키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계란 노른자처럼 그 사람 쪽으로 중심이 조금 옮겨 가는 일’인 연애의 순간들을 우리는 겪었고, 겪고 있고, 겪고자 한다.
지금껏 알아왔던 것들을 가뿐하게 뒤집는 이러한 ‘사유’는 혹은 ‘사랑’은 우리를 둘러 싼 틀을 깨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에필로그
몸의 중심이 옮겨가면 마음도 따라서 기울어진다. 그리고 온몸에 도사리고 있는 감각들이 기울여짐과 동시에 흘러 넘쳐 ‘이합집산’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감정과 인식, 언어가 몸의 한 부분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죠.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입술이나 눈과 같은 몸의 일부가 전체가 되잖아요. 우리가 사랑하면서 사람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느낌을 다 더해 쏟아봤어요. 설렘과 떨림과 끌림으로 진동하는 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먼 곳의 불빛’을 비롯한 60여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권혁웅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좥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좦는 일종의 ‘연애 시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눈, 코, 귀, 입술, 심장 등 온몸의 감각기관에서 받아들이는 자극과 정보를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서인지 심한 사랑의 열병을 앓았거나, 누군가에게 급격히 기울어지고 있는 중이거나, 사랑으로 인해 온몸의 감각들이 살아나 있는 상태가 전제가 된 이들에게서 특히 큰 호응을 얻었다.
권혁웅 시인은 몸이 일러주는 순서에 따라 집중적으로 떠오르는 단상들을 시로 썼다고 했다. 시인으로서 시집을 낼 때는 독자들에게 완결된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평소 생각처럼 2005년 발표한 「마징가 계보학」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다. 한 권, 한 권 충분히 숙성시킨 세계의 일부를 꺼내놓는 시인인 그는 요즘 ‘좀 더 웃긴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몸의 개괄적인 느낌, 하나하나 만들어진 사랑하는 감각들이 하나로 고착되는 과정, 사랑과 감각을 이야기하는 작업이 신비로우면서도 힘이 많이 들었어요. 이 시집을 낸 후로 생각을 떨쳐내려고 6개월가량 시 쓰는 것을 쉰 것 같아요. 다음번에는 세상을 좀 더 유머러스하게, 삶을 좀 더 발랄하게 풀어내보고 싶어요.”
대학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서의 시를 가르치는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시가 누군가에게 위로와 치유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시’라는 돌다리를 놓아갈 생각이다. 그가 놓은 ‘시’의 길을 폴짝폴짝 밟아가며 연애를, 사랑을 하고 싶은 날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