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에세이]동화작가 임사라의 아름다운 거리 도서관](http://img.khan.co.kr/news/2009/10/29/20091102001411_r.jpg)
[프런트 에세이]동화작가 임사라의 아름다운 거리 도서관
반가운 책들과 눈인사를 하다
도서관은 근사했다. 건물은 깔끔했고, 편리한 동선으로 잘 짜여 있었다(아, 물론 좀 썰렁하긴 했다). 신생 도서관답게 책꽂이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유서 깊은 도서관의 고색창연함을 벌써부터 기대할 수야 없지 않은가. 앞으로 어떤 고단백의 양식이 저 빈 서가를 가득 채우게 될지, 그 얼마나 많은 참새 떼들이 방앗간을 들락거리며 곯은 배를 채우게 될지, 생각만으로도 기뻤다.
나는 한 칸 한 칸 책꽂이를 훑으며 책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다리가 뻐근해지도록 서가의 책들과 첫 만남을 즐겼다. 두 권의 책을 빌렸고, 돌아가자마자 온라인 서점에 주문할 세 권의 책 제목을 메모한 뒤, 열람실을 나와 어린이자료실로 향했다.
어느 도서관이든 어른들이 이용하는 문헌정보실과 어린이자료실은 구조상 눈높이가 다르다. 어린이자료실은 오밀조밀 알콩달콩 뭔가 색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새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낮은 책 울타리 안에 길게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는 태평스러운 햇살 한 조각을 보는 순간, 나는 마음이 야들야들 노긋노긋 풀어졌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아이들의 친구로 남아 있는 낯익은 동화책 사이를 오가다 보니 오롯이 동심에 젖게 되었다.
유모차가 길목을 막고, 사서 선생님이 눈을 부릅떠도 아이들은 통제 불능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읽다 집어던진 그림책이 널려 있었지만, 침 삼키는 소리마저 부담스러운 수험생 독서실에서는 맡을 수 없는 활자의 향기가 가득 느껴졌다. 무거운 책장에 짓눌렸던 활자들이 활짝 기지개 켜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활자들이라고 어찌 해방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어른들은 책을 존중하지만 책과의 사이에 경직된 거리감을 둔다. 아이들은 책을 물어뜯고 집어던지고 버릇없이 굴지만, 주인공의 이름을 친구 이름처럼 불러주는 혼연일체의 친밀감은 아이들한테만 기대할 수 있다. 주인공이 책장에서 폴짝 뛰어나와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건다 해도 기절초풍 달아나지 않는 건 아이들뿐일 테니까. 아직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미취학 아동들이 많이 오가는 곳일수록 책 특유의 활자 페로몬이 더욱 강렬하게 진동하지 않을까. 책꽂이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처음 보는 낯선 외국 작가의 동화책을 발견했다. 책을 꺼내들고 구석 자리에 앉아 읽고 있는데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등을 돌린 어느 엄마와 딸의 목소리였다.
어느 엄마와 딸의 책 읽기
“잘 들어. 무지 중요한 책이거든.”
엄마는 발장난을 치고 있는 꼬마를 다그쳐 다가앉게 했다. 힐끗 보니 국민 동화로 자리매김한 권정생 선생의 그림책이었다. 대한민국의 그림책 독자라면 이 짧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강아지 똥처럼 하찮고 천한 그 어떤 존재라도 모두 소중하다는 교훈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그 헌신에서 새 생명의 창조가 비롯된다는 묵언의 가르침에 뭉클해하지 않는 사람 또한 없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똥 이야기라면 무조건 열화와 같은 호응을 보이니, 아이들을 책으로 유인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소재이다.
공공장소를 의식한 듯 속삭이던 그 엄마의 목소리는 차츰 높아졌다. 책 읽기가 끝나자 보잘것없는 존재에 대한 일장 훈시도 잊지 않았다. 나는 흐뭇하게 엿들으며 비로소 시작될 그 엄마만의 명강의를 고대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식적인 눈도장으로 ‘이상 끝’이었다. “이제 됐다. 다른 거 읽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프런트 에세이]동화작가 임사라의 아름다운 거리 도서관](http://img.khan.co.kr/news/2009/10/29/20091102001406_r.jpg)
[프런트 에세이]동화작가 임사라의 아름다운 거리 도서관
대상이 자신과 상관 있는 주변 인물로 개별화되지 않는 한, 아무리 감성이 풍부한 아이라고 해도 강아지 똥이라는 소재 자체만 가지고서는 주제의 일부만 겉핥기식으로 느낄 뿐이다. 어른에게는 당장 와 닿는 함축적인 정수를 간파하기에 아직 아이들의 사고력은 얕으니까. 강아지 똥의 상징 코드를, 파종에서 수확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길을 거쳐 우리 밥상에 온다는 쌀 이야기와 연계해봐도 좋을 텐데…. 무심히 받아먹는 밥 한 끼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의 ‘강아지 똥’ 같은 헌신이 숨어 있다는 걸 넌지시 일러준다면 아이들은 상징을 한결 선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바쳐진 부모 사랑의 뭉클한 헌신과 연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리 굵어진 후에 목청 키워, 엄마 아빠가 너 때문에 얼마나 희생했는지 아느냐고 종주먹을 대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그 어떤 진리든 대놓고 강조하면 퇴색하고 마니까. 전혀 다른 소재를 통해 퍼즐 맞추듯 진리를 한 조각씩 깨닫게 해주는 게 바로 문학의 힘 아니던가.
기독교 신자라면 지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인류를 위해 몸을 바친 예수의 삶이야말로 구원의 거름이 된 최고봉의 삶이었다는 걸 깨우쳐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원하게 살고 있거나 이미 돌아가셔서 아이들에겐 그저 사진 속의 존재일 뿐인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희생으로 비약해봐도 좋다.
그 무슨 고리이든 좋다. 중요한 건 주제와의 연관과 비약, 확장과 포용이다. 잘만 활용하면 그깟 민들레 한 송이만 피우고 갈 강아지 똥이 아닌 것이다.
책 읽기, 그 이후의 더 신나는 세계
그 엄마는 곧 다른 책을 폈다. 슬쩍 건너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클로드 부종의 그림책이었다. 요즘엔 천적들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가 많아 토끼와 여우의 우정 이야기 또한 자칫 흔한 소재로 생각되기 쉽지만,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다고 솔로몬도 말하지 않았던가. 소재보다 중요한 게 바로 전개 방식이다.
클로드 부종의 매력은 재치에 있다. 클로드 부종은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과 완벽한 동화를 이루어 자유롭게 감정표현을 한다. 자연스러운 게 최고의 실력이라는 말이 있듯,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언제나 당당하다. 어떻게 간단한 점이나 선으로 이렇듯 오만 가지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그의 재능에 탄복하게 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불행하게도 아기 토끼는 여우의 손에 유괴당한다. 인질로 삼고 돈을 요구한다면야 있는 홍당무, 없는 홍당무 다 팔아서 아기 토끼를 구출해 오련만, 여우가 원하는 건 아기 여우와 함께 토끼를 꿀꺽 해치우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 토끼는 애가 탄다. 다행히 아기 여우는 생각이 달랐다. 미끌미끌한 토끼 귀를 잡는 연습을 하거나 와작와작 씹어 먹는 것보다는, 토끼와 장난을 치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된다. 멋진 우정이 탄생한 것이다. ‘둘은 밤마다 들판에서 팔딱팔딱 뛰어노는 친구가 되었단다’라는 해피엔딩 자막을 끝으로 책장을 덮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천적끼리의 우정이 아름답다든가, 동심은 역시나 천진난만하고 맑다든가, 아이들은 편견이 없어서 누구하고든 친구가 될 수 있다든가…. 이렇듯 드러난 소재에만 초점을 맞추는 감상은 빤한 느낌표에 그치고 만다. 작가가 의도한 이야기의 끝이 거기까지든 말든, 독자는 이제부터 ‘마이 웨이’를 가야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책 역시 줄거리 전달에서 끝나고 말았다. 아직도 그 엄마 옆에 쌓여 있는 그림책이 많았다. 갈 길이 멀어 한 권당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눈치였다. 아이는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한 채 몸을 배배 틀며 장난 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정해진 시간 안에 누가 누가 더 많이 읽나, 내기를 하러 온 것도 아니건만….
클로드 부종의 그림책에는 토끼와 여우 말고도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아기 토끼가 자기 발로 여우 굴을 찾아간 게 아닌 이상, 아기 토끼를 잡아간 엄마 여우가 있고, 졸지에 아기를 잃은 엄마 토끼도 있다. 그들의 심정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질문을 던져보면 좋지 않을까.
자기중심적인 아이들에게 주인공과 반대 입장에 처한 조연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칫 엄마 여우는 못된 인물이고 토끼는 일방적인 피해자로 생각하는, 주인공 중심주의의 단면적 사고 체계를 갖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남보다 탁월한 사고력’을 갖기 원하는 건 모든 엄마들의 소원. 하지만 남과 똑같은 방법으로 책을 읽어주면서 남다른 전리품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 엄마 여우로서는 아기 토끼한테 위해를 가한 게 아니라 자식을 위해 먹잇감 사냥의 본분을 다한 것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주면 어떨까. 그 화두를 꺼내려면 자연스럽게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대해 가르쳐줘야 한다. 아직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유아라면 그 차이점부터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일시 정지’를 누르고 동물들의 숲 속 삶을 다룬 논픽션 그림책을 ‘따로 또 같이’ 펴볼 수도 있다. 먹고 먹히는 관계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된다면, 아이들은 여우하고 토끼가 친구가 된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더욱 절절이 느끼게 될 테니까. 이렇듯 종종 삼천포로 새면서 사고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엄마야말로 최고의 독서지도사이다.
생각지 못한 엄마 여우의 무죄 판결로 인해, 아이들은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해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중구난방 조리에 맞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나이니 만큼 말도 안 되는 상상과 연상으로 엄마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비록 어려서 명확하게 짚어낼 수 없다고 해도, 아이들도 나름대로 느낀다. 그 느낌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그 느낌을 자유자재로 이끌어내는 게 바로 유아기 독서지도의 본질이다. 클로드 부종이 끝내놓은 이야기를 아이들이 계속해서 써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겹겹이 쌓인 느낌은 나이테의 결을 따라 함께 두터워져 간다. 이런 느낌을 내면에 많이 간직한 아이들은 취학 후 사고력을 요하는 글을 읽을 즈음에 친구들과 다른 사고를 하게 된다. 그 단계에 무사히 다다른 아이는 쉽게 추월당할 염려가 없다. 그동안 책을 통해 흡수된 활자 영양소가 이미 지식을 넘어 내면의 지혜로 응축되기 시작했으므로.
책 읽어주는 엄마보다 책 읽는 엄마
그날 그 엄마와 딸은 여러 권의 그림책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폭식하듯 해치웠다. 그것도 모자라 한 무더기의 그림책을 빌려가지고 총총히 돌아갔다. 아이는 그날 읽어치운 책에서 얼마만큼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얼마나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무엇을’ ‘얼마나’ 많이 읽히느냐보다 한 권을 읽어도 ‘어떻게’ 읽느냐에 포인트를 두었다면, 아이는 그날 보다 풍성한 추수를 하지 않았을까.
유태인 엄마들도 울고 갈 만큼 자녀교육에 열정과 실력으로 무장한 한국 엄마들! 그럼에도 소수만이 독서지도에 성공하는 게 현실이다. 어느 나라 맹모들보다 독서지도에 사활을 거는 엄마들이 많은데도, 엄마의 개입이나 학교의 강요 없이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자발적 책 사랑의 지성인으로 자라나는 아이가 드물다. 친구와 같은 주제를 받아들고도 자기만의 창조적인 필력으로 색다른 글을 풀어내는 문재(文才)로 성장하는 아이는 더욱 드물다. 책과 달콤한 연애결혼에 이른 아이보다는 연령별 필독서 목록을 움켜쥔 엄마에 의한 정략결혼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아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아이 독서지도를 위해 밤낮 없이 특강을 쫓아다니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느라 정작 자신은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없는 개미 엄마들! 무슨 배짱인지 애들 닦달은 뒷전이고 본인이 읽고픈 책을 느긋이 즐기는 베짱이 엄마들! 분명 부지런 떨면서 공을 들인 건 전자인데도, 막상 독서지도의 효과는 후자 엄마들이 알토란처럼 누린다. 아이들은 엄마가 읽어주는 책보다 책 읽는 엄마를 먼저 읽으며 자라나기 때문이다. ‘교육은 물통을 채우는 게 아니라 불을 지펴주는 것’이라는 윌리엄 예이츠의 말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도서관을 나서면서 문득 묻고 싶었다. 책들아! 너희를 지나치게 귀중한 존재로 대접하다 못해 어깨 짓누르는 숙제처럼 부담스럽게 여기느니, 아무 때나 찾아와 얼굴 부비며 손때 묻히는 단짝 친구로 대하는 게 너희도 훨씬 행복하겠지?
며칠 후, 나는 그날의 갑갑한 질문을 일시에 해갈시켜준 인상적인 거리 풍경을 연달아 만나게 되었다. 약속 장소로 바삐 향하던 중이었다. 신호등 앞에서 유산균 음료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커다란 돌에 걸터앉아 문고판 책을 손에 든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손님이 유산균 음료를 찾으면 잠시 책을 접고 그 웃음을 그대로 머금은 채 음료를 팔았다.
그러고는 다시 책에 고개를 박았다. 길에 서 있어야 하는 생업의 고단함도, 풀풀 날리는 매연의 짜증도, 번 돈과 남은 음료를 번갈아 세는 초조함도 엿볼 수 없었다. 그녀는 삶의 한복판에서 최선을 다해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동시에 독서가로서 행복한 몰입의 시간을 살뜰하게 누리고 있었다. 그녀가 연출한 거리 도서관 풍경은 어떤 요란스러운 독서 캠페인보다 더 강렬하게 내 뇌리에 각인되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커피전문점 앞 벤치에 고교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폼이 책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낙엽이 뒹구는 늦가을 벤치에 혼자 앉아 책을 읽는 10대의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불현듯 ‘아까 그 유산균 아주머니의 딸인가?’ 하는 제멋대로의 상상을 품어보았다. 그때 누군가 여학생의 어깨를 탁 치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여학생은 읽던 책을 들어 보이며 너그럽게 말했다. “아직 이만큼 남았어. 이거 다 읽어도 안 오면 전화해보려고 했어.”
그날 이후 나는 출판 관계자들과 만날 때면 아름다운 거리 도서관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 책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다”고 푸념하던 그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반짝 솟는 걸 보면 나 또한 마음 낙낙해진다.
이 깊어가는 계절에 나도 공원 벤치에 앉아 오래 묵은 고전과 밀애를 즐겨볼 생각이다. 가을 나무들과 함께 내 영혼 또한 그윽하게 여물어가기를 기대하면서!
작가 임사라는
서울생, 고려대학교 졸업. 1990년 월간문학 소설 신인상과 1992년 김래성 문학상, 2006년 장편동화 「내 생각은 누가 해줘?」로 황금도깨비상 수상.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중앙일보에 어린이 독서지도 칼럼 ‘임사라의 KISS A BOOK’ 연재. 한국경제신문 올해의 책에 선정된 「셜록 홈스와 글쓰기 탐정단」을 비롯해,「내 아이를 책의 바다로 이끄는 법」, 「동갑내기 울 엄마」, 「유일한」 등의 작품이 있다.
편집 후기 얼마 전 주요 대학의 도서 대출 현황이 기사화됐다. 서울의 한 대학의 경우 「해리포터 시리즈」가 1, 2위를, 3위는 칙릿이라고 불리는 한 미국 소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영화화되기도 한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한 대학에서는 3위, 모 여대에서는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 또 다른 여대는 「성의 정치학」,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란히 1, 2위에 올랐다. 이 기사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해리포터류의 책을 다른 대학에서는 비치해놓지 않았을 거라는 것에서부터 인문학 서적이 1, 2위에 오른 대학의 경우 필수 교양 교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까지. 실제 대학생들이 읽는 책과 도서 대출 순위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데 당연히 동감한다. 하지만 어딘가 아쉬운 마음은 지울 수 없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인가. 재미있거나, 아니면 필요하거나. 임사라 작가가 전하듯 독서는 능동형이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서 습관을 익힌 아이들에게는 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아닌, 읽는 엄마가 있었다. 진부하지만, 그래도 가을이면 늘 떠오르는 독서의 계절이라는 수식어가 유난히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
■글 / 임사라 ■진행 / 장회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