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명 작가의 3만 년 동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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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 작가의 3만 년 동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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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이라고 작은 화분의 꽃을 받았다. 자잘한 꽃송이들이 화려함을 뽐내는 새로운 품종으로, 무슨 꽃인지 얼른 알기 어려웠다.

“이게 무슨 꽃일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카네이션의 일종이었다. 카네이션, 우리 이름 패랭이꽃. 예전 모자의 일종인 패랭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그 꽃을 바라보며 잠깐 상념에 젖어들었다.

[프런트 에세이]윤후명 작가의 3만 년 동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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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가 먹이를 여기저기 갈무리해놓지만 그 장소를 잊어버리기 일쑤라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었다. 나 역시 물건들을 어디 놓아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잘 놔둔다는 게 문제란 말야, 문제.’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나무란다. ‘여기라면 나중에도 찾기 쉽겠지’ 하고 연상 작용이 자동으로 미쳐서 손길이 갈 만한 범위를 자신만만하게 정한다는 게 번번이 배반당한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 다람쥐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평소에 다람쥐에 무슨 특별한 관심도 없지 않은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며칠 전 여러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서 우연히 옆자리의 대화가 들려온 게 빌미였다.

“3만 년 전 다람쥐 굴에서 나온 씨앗?”
“그렇다는군.”

무슨 이야기인지 얼핏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3만 년 전’이라는 말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3만 년 전의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신기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온통 오늘 하루만 어떻게 잘 보내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넘쳐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야바위꾼들과 사기꾼들, 치기배들, 허풍쟁이들의 세상이다. 3만 년 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뭐든 어쨌든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만 년 전, 3만 년 전….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뭔지 그들에게 뒤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들춰보고 내용을 알아낸 나는 놀랐다. 과연, 내가 몰라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다. 꽃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꽃이라면 나는 남한테 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 러시아 연구진이 시베리아 콜리마 강 근처 지하 다람쥐 굴에서 발견한 패랭이꽃 씨앗으로 꽃을 피우는 데 성공했다.
* 이는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 결과 빙하기 말기인 3만1천8백년 전 식물로 밝혀졌다.
* 지금까지 사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이스라엘에서 발아시킨 2천 년 전 종려나무 씨앗이었으며, 중국에서도 1천3백 년 전 연꽃 씨앗으로 꽃을 피운 적이 있다.

‘음, 이 얘기였군.’ 내게는 만만치 않은 소식이었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꽃피운 과거의 식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몇 년 전에 펴낸 책 「꽃」의 개정판을 위해 여러 가지 보충거리들을 모으고 있었다. ‘김포야생화연구소’에서 내는 팸플릿을 비롯해 여러 꽃 모임의 초대장 같은 것들도 버리지 않고 챙기고 있었다. 중국에서 옛날 연꽃 씨앗을 발아시켜 꽃피웠다는 사실도 약 천 년 전이라고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2천 년 전 종려나무도 새롭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 패랭이꽃은 천 년 단위를 뛰어넘어 무려 3만 년이었다. 3만 년 전의 꽃이 다람쥐 굴에서….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람쥐 놈들이 도토리만 부지런히 모으는 줄 알았는데 그들의 먹이에는 패랭이꽃 씨앗도 들어 있었다. 그놈들이 패랭이꽃 씨방을 물고 달려가는 모습이 앙증맞게 눈에 그려졌다. 그 씨방이 3만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친김에 나는 다른 기사들도 더 검색해 들어갔다.

이 다람쥐 굴의 주인공은 얼룩다람쥐라는 것, 러시아 연구진이 코뿔소나 매머드의 화석을 조사하려고 땅속 20~40m의 빙하기 지층을 파다가 발견했다는 것, 다람쥐 굴속에는 무려 60만 개에 이르는 각종 열매가 있었다는 것 등등.

연구진은 씨앗들을 발아시키는 데 여러 번 실패하다가 줄기세포를 이용해 마침내 성공했으며, 이는 현재 시베리아 툰드라에서 자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3만 년 넘는 기간 동안 그대로 살아 있었던 것은 굴속에 저장된 뒤 바로 얼어붙은 채 녹지 않은 상태로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와 함께 영화 ‘주라기공원’에서처럼 매머드를 부활시키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매머드 말고 공룡이 나오지 않은 사실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얼마 전인가 우리나라의 황우석 박사가 매머드 복제에 나섰다고 한 기사를 읽은 기억도 되살아났다. 매머드보다 공룡을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주라기공원’일 터였다.

그리고 그 굴속에 60만 개나 되는 열매를 저장해두었다면 얼룩다람쥐는 한 마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많은 열매를 다람쥐들이 어디 두었는지 잊어버렸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갑작스러운 어떤 사태로 그 다람쥐들이 멸종했음이 틀림없었다. ‘갑작스러운 사태’란 다른 게 아니었다. 기후의 변화일 수밖에 없다. 그러자 요 몇 해 동안에 우리가 겪고 있는 이상 기후란 게 더욱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걸핏하면 ‘몇십 년 만에 처음’ 발생한 일들. 더위, 추위, 비, 눈, 바람, 파도 등 온갖 것들이 사방팔방에서 기습하고 있었다.

러시아 툰드라 지대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여러 해 전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우를 잡는 일행에 끼어 그 북쪽 몇백 킬로미터를 달려갔던 경험이 그것이었다. 그때 일은 다른 글에서도 쓴 적이 있기에 생략하지만, 그 겨울 아침 온도는 영하 28도였다는 것만은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날씨에 러시아 툰드라 지대를 달리고 있다는 자체가 일생일대의 경험이었다.

“그래, 여우를 잡기는 잡았수?”
나는 여우보다도 툰드라 지대의 땅 밑에 묻혀 있는 매머드에 대해 쓰고 싶었다. 공룡에 대해서도 쓰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겨울을 잘 견디는 체질이었다. 솔제니친의 「마트료나의 집」을 읽은 뒤로, 툰드라의 이탄(泥炭)으로 불을 지피고 사모바르 주전자의 물을 끓이며 겨울을 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영하 28도 ‘빙하기’ 러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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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머드는 우리나라에도 살던 동물임을 안 것은 오래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룡 역시 많이 살던 땅이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을 왠지 가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내가 문학을 하는 뜻은 무엇일까.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은 매우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리지 못하는 그 시공 속으로 내 삶을 확대하는 길은 무엇일까. 무조건 쓰는 도리밖에 없었다. 여기에 적어도 3만 년 정도를 담보로 삼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긴 겨울은 가고 봄이 되고 또 여름이 오고 있다. 툰드라 지대를 여기저기 융단처럼 물들이는 꽃들 무리가 있다. 아름답기 그지없다. 기후가 요동치면서 해마다 이상 현상이 나타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하다. 우리가 문명의 발전을 앞세워 벌여온 행태에 비하면 그래도 지구는 착한 모습이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아직 있고 땅에는 나무들이 아직 있다. 살아 있는 동안 갖가지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그런데 요 몇 해 동안만 해도 기상 이변은 계속 나타나고 있다. 지구 온난화라는 현상으로 북극의 얼음이 녹는데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이상 기후에 시달린다고? 어떤 경고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랜 지질학적인 교훈을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기에 ‘멸종’이라는 단어가 있다. 오히려 문학적으로 더 다가오는 이 단어 ‘멸종’은 그러나 전혀 문학적이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과학적이지도 않다.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만 년 전의 꽃이 내게 던지는 의미는 크다. 그것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다. 다람쥐가 숨겨놓았던 씨앗에서 다시 피어난 꽃, 패랭이꽃.

3만 년 전의 그 꽃은 현재의 꽃들과 비슷하다고 했다. 나는 컴퓨터 화면의 패랭이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흔한 패랭이꽃과는 달리 빛깔이 하얀 꽃이었다. 나는 산길을 가다가 바위틈에 피어 있는 빨간 패랭이꽃이 선명해서 걸음을 멈추곤 했던 기억만 가지고 있었다. 하기야 개량한 카네이션에도 하얀 빛깔이 있으므로 하얀 원조 패랭이꽃이 없으란 법은 없었다. 3만 년 전의 하얀 패랭이꽃. 그러자 문득 그림으로도 그려놓고 싶었다. 어떤 사물이든 내게 의미를 아로새기기 위해 오랫동안 글로 써서 남겨왔다면 새로 익힌 그림의 세계에도 남겨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내 영역, 내 의미망에 들어오게 된다. 인생이란 어떤 의미망을 만드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 다음 나는 한 편의 시를 옆에 곁들였다. 지난봄에 그림 개인전을 하면서 펴낸 화집에도 맨 앞장에 내놓은 시였다.

하나의 꽃

사랑을 알고 나서
꽃과 함께 피어난 너의 모습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다
꽃이 졌는데도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랑이
꽃 피고 지는 사이를 오가며
있음과 없음 사이를 오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음과 없음도 하나가 되어
꽃 하나 받드는 마음이 된다


당연하게도 이 시에 ‘3만 년 전’의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그 꽃을 피우기 전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은 한 번 피어남으로써, 비록 시들어 사라질지라도 우리 마음에 영원히 피어 있게 된다는 뜻이 내게 새삼스레 다가온다. 내 마음은 맑게 되살아난다.

3만 년 전에도 우리의 조상이 어떤 형태로든 이 세상에 살아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보았으리라. 저 패랭이꽃을. 그리고 다람쥐, 얼룩다람쥐가 물고 가는 패랭이꽃의 씨앗을.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부여했으리라. 한 번 맺어진 사랑은 꽃이 지고 난 뒤에도 영원히 모습을 지우지 않고 살아남을 것임을.

과연 그런 것이었다. 과학자들이 비로소 꽃피운 저 꽃은 그토록 깊은 의미를 내게 던진다. 3만 년 전에 또 하나의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패랭이꽃 속에 사랑을 꽃피워 오늘 다시 나라는 사람이 되며 내 사랑을 완성한다. 의미망 속에서 살아나는 사랑의 부활이다.

다람쥐의 의인화를 통해 3만 년 전이 오늘이 되며 내 사랑을 되새겨보는 이 하룻날. 나는 책상 위의 카네이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편집 후기
[프런트 에세이]윤후명 작가의 3만 년 동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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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올해는 제대로 된 꽃구경을 못했다. 바람에 꽃잎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다 무심히 흘러 가는 것이 봄날의 속성이라 하지만, ‘봄’이란 글자가 무색하게도 내내 코끝이 차갑던 이번 해에는 유난히 꽃을 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울음을 꾹꾹 다져넣은 듯 강렬한 동백부터 샛노란 산수유, 아기 얼굴 같은 진달래, 아련한 목련, 마음을 아득하게 만드는 벚꽃, 아찔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철쭉까지. 저마다 다른 얼굴로 도란도란 말을 거는 봄날의 꽃들. 하지만 요즘은 그 각각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이 많이 사라졌다. 마치 몸살을 앓듯, 세상이 며칠 변덕스러운 날씨를 앓고 나더니 꽃들은 순서도 무시하고 마냥 피었다가 쫓기듯 사라졌다. 한나절 봄볕에 멍울멍울 피었던 꽃들은 소리 소문 없이 얼굴을 감췄고, 아우성치듯 반짝 빛을 밝히다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매일 입버릇처럼 바쁘다며 투덜대던 사람들을 질책하듯, 그렇게 말이다.

봄날 꽃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순간과 영원에 대한 어떤 생각 무더기에 도달하게 된다. 머물 수 없는 시간, 사람, 사랑, 그리고 남겨진 순간들.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라던 어느 노랫말처럼 손에 잡히지 않기에, 지속되지 않기에 더욱 아련하고 소중한 것들이다.

우리는 매일 지금의 시간들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 순간들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내 눈앞에 존재할 거라 믿곤 한다. 어떻게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둘러싼 풍경들은 변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이곳에서의 의미를 찾고 부여하며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애쓰니 말이다. 때로는 당장 누릴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욕망하고 꿈꾸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과 불멸의 시간을 담보한 약속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봄마다 찾아오는 꽃들은 말한다. ‘영원하지 못해 영원한 것’에 대해서. 비록 시들어버린다고 해도 꽃들이 피고 지고, 겉은 꽁꽁 얼어붙었어도 억겁의 원형을 품은 채 시간을 견뎌내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또다시 봄이 찾아온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고. 꽃이 지고, 봄이 가고, 설사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나서야 꽃을 피우게 된다 해도, 결코 ‘끝’은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영원처럼 찰나를 살아간다면 그 찰나의 점들이 모여 다음을 만들거라 꿈꾸게 되는 이유다.

윤후명 작가는…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소설이 당선되며 이후 시인과 소설가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의 문학은 줄곧 삶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바쳐져왔다. 언어의 탁마를 통한 그의 문학적 결실은 시집 「명궁」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소설집 「둔황의 사랑」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 「여우 사냥」 「가장 멀리 있는 나」 「새의 말을 듣다」 「꽃의 말을 듣다」, 장편소설 「별까지 우리가」 「약속 없는 세대」 「무지개를 오르는 발걸음」 「협궤열차」, 산문집 「꽃」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장편동화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환상과 현실을 교차시킨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성취를 토대로 한국문학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현재 ‘문학비단길’ 고문과 ‘문화예술인협회 임진강’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또 국민대 문예창작대학원 겸임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글 / 윤후명 ■진행 / 이연우 기자 ■사진&제공 / 경향신문 포토뱅크, 윤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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