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전민식의 세상 물정이라는 거, 하늘의 뜻이라는 거

프런트 에세이

소설가 전민식의 세상 물정이라는 거, 하늘의 뜻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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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들 계시죠? 요즘 들어 나이를 얼마 먹지 않았는데도 인생 뭐 별거 있냐라는 생각도 들고, 영화를 보다가 남들은 웃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어느 땐 생각에도 없던 감상이 떠올라 날밤을 새기도 하네요. 시간이 흐르며 이런 지질한 생각들이 확장되는 건, 늦게 결혼한 탓일 수도 있고 불혹을 넘긴 후에 자식을 얻은 덕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면 철도 들지 않았는데 그저 세월을 자꾸 먹은 탓이겠지요. 세상이 수상한 걸 수상하지 않은 척 느끼며 살아온 벌일지도 모릅니다.

[프런트 에세이]소설가 전민식의 세상 물정이라는 거, 하늘의 뜻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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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집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마지막 남은 쌀을 박박 긁어 압력밥솥에 담아놓은 후 넋 놓고 있자니 텔레비전이 저 혼자 떠들어대던 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수상한 세상을 욕하기 위해 광화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였다고요. 누군가는 먼저 간 사람을 애도하고 누군가는 남은 사람들이 반성해야 한다며 어깨를 들썩이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저 자리에 나가 초 하나 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곳까지 나갈 차비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늘 수상했는데 우리가 초 하나 보탠다고 수상한 세상이 밝아지겠느냐고 변명하며 주저앉았지요. 밀린 요금을 내지 않으면 내일 당장 전기를 끊겠다는 협박에도 의연했는데 초 하나 살 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조금은 우울해졌습니다. 텅 빈 곳간처럼 빈 여백만 있는 통장을 들여다볼 때도, 유독 빨간색의 글자가 많이 박힌 고지서를 읽고 있을 때도 우울하지 않았는데 그깟 초 하나 때문에 우울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쌀은 연극을 하는, 저만큼 철이 없던 친구의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돈 내라는 협박은 그 즈음 기적처럼 들어온 일감을 맡으며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어린이나 천재 혹은 죄 없는 인간만이 망각의 자질을 갖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린이도, 천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죄가 없지도 않은데 많은 것을 망각하며 살았다는 걸 그 즈음 깨닫고 있었습니다. 모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살지도 못한 모양입니다. ‘보통’이라는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제가 사는 방식을 두고 보통의 방식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고 있는데 그처럼 보통이 아닌 방식으로 살다 보니 기억에 남겨두어야 할 일보다 빨리 망각해버려야 할 일들이 더 많았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머릿속에 담아두기에는 너무 지질하고, 감당이 안 되고, 모자라고, 무책임하고, 간사한 기억들을 어떻게 잊지 않고 끌고 다닐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버리고 잊고 살았는데 사실 버려진 것도 잊힌 것도 하나 없더군요. 하지만 세상일들이 그렇게 망각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마 대학을 들어가던 그해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 오래된 망각 하나를 끌어올리는 실마리를 만났습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두 개의 가방을 짊어지고 어둔 거리에 선 적이 있습니다. 두 개의 가방 안에는 제 삶의 전부가 들어 있었지요. 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가을이었을 겁니다. 좀 쌀쌀했고 따뜻한 국물 같은 게 먹고 싶었던 날이었습니다. 제 가슴속에 둑 하나 쌓고 20년을 숨어 있다가 언젠가 불러주기를 기다렸던 듯 툭 튀어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은 한 신문 기사가 실마리 되어 망각에서 기억으로 상승했지요. 기사의 내용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노숙하면서 하버드대학엘 갔다는 한 흑인 여성의 기사였지요. 참으로 대단한 여성입니다. 저는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가당치도 않게 그 여성과 저를 비교하다니, 부끄러웠습니다. 인생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그 여성과 저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다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분명한 건 시간의 더께로 뒤덮여 영원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겁니다.

그날 갈 곳이 없었습니다. 가끔 학교 강의실이나 동아리방에서 잠을 청했는데 자잘한 사고가 터진다며 대학에서 동아리방과 강의실을 폐쇄했던 겁니다. 막막했지요. 여러 차례 신세를 졌던 후배들에게 더 신세를 질 면목도 없었지요. 그래서 가방을 들고 신촌과 홍익대학교 부근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각색의 사람들과 번득이는 건물을 구경하며 걸었습니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아마 부산까지 걸어 내려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비가 내렸고 저는 어느 공사장 앞에 섰습니다. 공사 중인 건물은 외벽이 모두 올라간 상태였습니다. 인도와 건물 사이에 가림막이 쳐져 있었는데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간이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더군요. 그래도 건물과 건물 사이에 틈이 보였습니다. 가방을 먼저 밀어 넣고 그 틈으로 몸도 밀어 넣었지요. 그런 후 건물 꼭대기인 5층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곳엔 보온재로 쓰이는 하얀색의 스티로폼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제겐 훌륭한 침대였지요. 그걸 바닥에 깔고 가방을 베개 삼았습니다. 인근 건물의 네온사인과 조명이 제 방이 된 건물 안까지 흘러왔습니다. 저는 비에 젖은 그 빛을 조명 삼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잭 런던의 책이었습니다. 행복했고 누구도 무엇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두꺼운 침대가 있고 빛이 있고 책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저를 두고 보통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저를 두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말하겠지요. 그날 새벽까지 한 외항 선원이 소설가가 되어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공사장에 일찍 출근한 한 인부가 저를 깨우더군요. 처음에는 야단을 치더니 이만저만해서 공사장에서 잠을 잤다고 말하자 국밥까지 한 그릇 사주더군요. 마침 공사장의 작업반장도 나왔는데 그는 제게 학교 가지 않는 날이나 방학 때 와서 일을 하라고 주선해주기까지 했습니다. 아주 운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그곳의 신세를 졌지만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택한 삶을 위로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위로받을 삶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통의 방식으로 살아갈 줄 모르는 저를 지금의 아내가 받아주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살던 인간이 세상 물정을 알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게 쌓이는 게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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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도 카페에서 먹는 커피 값에 놀라고 티셔츠 한 장에 몇 십만원 하는데 불티나게 팔린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렇다고 아주 세상 물정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1주일에 몇 번씩 배달되는 전단지에서 어느 가게의 달걀이 싼지, 어느 가게에서 우유를 세일하는지 등을 꼼꼼하게 기억해뒀다가 장을 보러 가니까요. 물론 아내가 있지만 아내는 그런 부분에서는 좀 젬병인 편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그런 유의 일을 처리하는데, 이 정도면 세상 물정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런 건 사실 세상 물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그저 물가였던 겁니다. 세상 물정이란, 남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우리는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 만나 인사하고, 불편하지만 밥 같이 먹고, 즐겁지 않지만 웃고, 마시고 싶지 않지만 술 마시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수다 떠는 그런 일들.

그래서 저와 아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끔 누군가는, 그 나이 먹어서 쯧쯧, 하고 혀를 차기도 합니다. 이제 하늘의 뜻을 알 만한 나이도 되지 않았냐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하늘의 뜻은 둘째치고 저는 세상 물정조차 모르는 인간이었지요. 모르면 배우면 되지만 사실 하늘의 뜻 같은 거 모르고 살아도 되지 않나요? 그보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늘의 뜻을 알고 살겠습니까. 가만 생각해보면 세상의 물정만 알면 하늘의 뜻도 알게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닌가요? 하늘의 뜻은 세상 물정보다 더 복잡할까요? 제가 보기엔 세상 물정이 더 복잡해 보입니다만.

그런데 세상 물정 알고 사는 분들이 제게 하늘의 뜻 좀 가르쳐주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아주 우연히 그리고 예고도 없이 터지는 부조리한 일들이 하늘의 뜻일까요? 그런 거라면 사실 하늘의 뜻 같은 거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유의 일은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들이 더 많으니까요.

어느 날 또 한 차례 세상 물정을, 아니면 하늘의 뜻일 것도 같은 일이 터졌습니다. 제가 결혼하던 그해 여름, 해외에 나가 있던 동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동생이 해외에 나간 줄도 몰랐을뿐더러 사고가 날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사고로 죽었다는 겁니다. 인간이란 게 본래 죽음에 하루하루 걸어가는 부조리한 존재라지만 이럴 땐 더더욱 극명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건강했고 성실했고 큰 욕심 없이 살던 동생이었는데 그런 변을 당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하필이면 제게로 향한 모종의 협박이 최고조로 달해 있을 때였습니다. 많은 세금이 밀려 생활해 나갈 수 있는 모든 편의사항이 중단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주머니에서는 마른 먼지만 가득할 때였습니다. 겨우겨우 동전 몇 개 찾아서 가족에게 공중전화로 비보를 알렸습니다. 그렇게 느닷없이 삶의 부조리를 깨닫게 해주는 게 세상의 물정이고 하늘의 뜻이었을까요? 인생이 다 그렇고 그런 거라고 말하는데 그래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그런 걸 깨닫기 위해 지천명의 나이까지 살아온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게 세상 사는 물정이고 하늘의 뜻이라면 깨닫기를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인간다운 게 아닐까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 글에 그런 부조리에 대한 반감과 함께 소멸은 영원한 단절이라는 그런 세상의 물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글 속에서 저는 소멸은 소멸이 아니라고 썼습니다. 설령 1,500℃의 열로 하나의 형체가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고 해도 그 물질이 차지하고 있던 질량은 그대로 다른 어떤 세상에 혹은 공간에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물정 속에 그대로 환원될 수도 있을 거라고 썼습니다. 고체가 액체로 변하고 액체가 기체로 변하지만 그 원형질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변환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세상의 부조리에게 뒤통수 맞은 이들이 억울하지 않을 거라고 세상의 물정에 항변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세상의 물정도 하늘의 뜻도 모릅니다. 아마 저와 아내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건 수상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훌륭한 무기인지도 모릅니다. 가슴속은 좀 복잡해지겠지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물정에서 멀어질수록, 하늘의 뜻 같은 것에서 비껴 설수록 인간이 더 인간다워진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의 물정, 몰라도 사는 데 그다지 큰 부침이 없고, 하늘의 뜻 같은 거 몰라도 하루를 보내는 데 섭섭할 거 없더군요. 저는 오늘도 한 줄 쓰고 물 마시고, 한 줄 읽고 담배 한 대 피우고, 한 줄 수정하고 술 한 잔 마십니다. 하늘의 뜻 같은 거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삽니다. 세상 물정 속에 깊이 묻혀버린 진실 같은 것들이 병들기 전에 빛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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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이 기획의 담당기자로서, 가끔 독자들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의 말들을, 어떤 이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한 사람의 세계를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읽고 듣고 엿볼 수 있어서다. 매달 작가들의 글을 받고서는 단어 하나를 붙들고 가만히 만져보기도 하고, 문장 하나에 젖어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내용에 빠져서 나름 이런저런 장면을 그려보기도 하고, 내 경험이나 감정을 녹여서 기억을 떠올리거나 수많은 공상을 시작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런 오롯한 시간을 갖는 즐거움을 나 혼자 누려도 되나 싶어서 괜히 미안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 화들짝 제정신으로 돌아와 마음을 졸이며 원고를 쓰곤 하지만. 그리고 가끔 나중에 책을 읽게 될 독자들과 떠오른 생각들을 두고 도란도란 나눠봐도 좋겠단 생각을 하기도 한다.

글을 읽을 때 주로 어떤 기억이나 다른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옮아가는 편인데, 이달 전민식 작가의 글을 보면서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뭔가 달달한 것이 고파서 얼마 전 다시 찾아본 영화 ‘노팅힐’. ‘대놓고’ 로맨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큰 감명을 받지 못한 영화였는데, 그래도 마음에 새겨놓고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디저트로 딱 하나 남은 브라우니를 두고 친구들이 서로 누가 더 불행한가를 견주는 장면이다. 이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브라우니를 먹기로 하자. 그리고 이어진 ‘불행 배틀’. 한 명 한 명 어쩌면 그렇게 삶은 가혹한 것인지. 사업은 안 풀리고, 직장에선 무능에 허덕이고, 외롭고,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고, 언젠가는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게 될 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고…. 무엇보다 살아가면서 시간 속에서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제대로 혹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서글프지만 명확한 현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나마 서로 농담을 건네고 스스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불행을 각각 전시하지만 결국 불행의 우열은 확실히 가리지 못한다. 제3자가 봐도 그랬다. 왜냐하면 불행이란, 무엇이 더 크고 깊은지를 결정하기엔 자신과 분리된 기준점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완벽히 객관화할 수 없고, 또 타인의 상처를 100%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명백한 사실은, 삶은 변덕스럽고 어쩔 수 없이 괴롭다는 것. 그렇기에 각자 다른 방식과 크기로 ‘전쟁 같은 삶’을 떠받치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얼마 동안 괜히 좀 비관적이었다. 캄캄하고 막막하고, 가슴속에서는 계속 까닭 모를 억울함과 서러움이 울렁거리고 걱정이 됐다. 세상도, 나도 나빠지는 것만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좌절하고 상처받고 힘들어야만 성장하는 거라는 이야기도 지겹고, 어딘가에는 쉬운 길이나 확실한 답이 있을 거란 의구심도 들었다. 전민식 작가처럼 “세상 물정 알고 사는 분들이 제게 하늘의 뜻 좀 가르쳐주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묻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해봤다. 물론 일생일대의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껏 어떤 순간마다, 아니 자주 그래왔고 아마도 앞으로도 숱하게 맞서야 할 삶의 리듬이지 않을까. 우리는, 또 삶은, 지나치게 변덕스러우니 말이다. 오늘의 혼란스러움은 꽃망울이 피어나(야만 하)는 4월 중순까지도 매서운 바람이 불고 비인지 눈인지 모를 것들이 흩날렸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바람은, 황사를 머금고 있든 폭풍우를 품고 있든 어쨌든 지나가니까. 늘 살랑대는 봄바람만 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으니까. 견디며, 아니 그냥 서서, 그렇게 산다.

전민식 작가는…
1965년에 태어났다. 세상 물정 모른 채 방황하며 살다 불혹을 넘겼고 느지막이 소설의 세상에 입문했다. 수없이 많은 부침의 시간을 거친 후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세상 물정 모른 채 소설만 쓰며 살면서 추계예술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2012), 「불의 기억」(2013)이 있다.

■진행 / 이연우 기자 ■글 / 전민식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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