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작가 변종모의 멀지 않은 곳에

프런트 에세이

여행 작가 변종모의 멀지 않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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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길을 나섰다. 그리고 오래도록 낯선 길을 걸었다. 가슴속 어디쯤이 허전해서이기도 했고 이유 없이 술렁거리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나선 길 위에서 두려움 없이 잘 걷다가도 가끔 내 안의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생각 없이 걷다가도 끝내 생각이 무거워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면서. 모든 것은 그렇게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고민하던 일도 삶도 사랑도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자주 그것을 찾으러 밖으로 걸었다. 걷다가 보면 다가오는 모든 풍경 속에서 좋은 인연이 돼 힘을 얻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불안함에 더 혼란스러워하기도 하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은 나와 멀리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많았으므로 나는 자주 길을 나섰다. 마치 행복이라는 것이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다른 곳에 매달린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나는 나를 사랑한 적 없으니
[프런트 에세이]여행 작가 변종모의 멀지 않은 곳에

[프런트 에세이]여행 작가 변종모의 멀지 않은 곳에

먼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성북동 비탈에 작은 반지하 방을 하나 얻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났지만 결국 돌아온 자리에는 잠시라도 머물 곳이 필요했으므로 다시 이 도시에서 여행을 하듯 잠시 정착할 곳을 찾았다. 딱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으로 지내기 위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주 떠났던 일들이 이제는 어디서라도 잘 살 수 있도록 면역이 됐다. 밤이면 발아래 찬란하게 보이는 서울의 불빛들이 아름답기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긴장감이 들기도 했다. 어디서나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면 조금 긴장되거나 소외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던 일을 관두고 오래도록 여행자로 살기 위해 나는 스스로 이 도시를 외면했으므로 그리고 끝내 다시 돌아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하며 살았으므로.

돌아온 자리에서 반겨주는 것은 떠날 때 내가 놓고 간 이 도시의 반복적인 패턴뿐이었다. 그래서 늘 어딘가가 허전했고 늘 무엇인가로부터 소외된 느낌이 들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나에게 떠나라 한 적이 없었고 그 누구도 나를 외면한 적이 없다. 내 스스로가 이곳에 지치고 병들어 마치 어떤 치유나 정화를 위해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떠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이 자주 나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이 나를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 없이 아픈 사람처럼 그렇게 내 주변의 생활과 사람들을 앓다가 문득 떠났고 결국 떠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문제였다. 곁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몰랐던 마음들.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나에게 향하지 않았는데 나의 마음만 커져서 스스로 상처받고 스스로 소외되던 이유로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으니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 만든 소외, 그것을 나는 상처로 생각하고 많은 시간 낯선 길 위에 섰다. 그러고서 돌아온 자리는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겨울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는 때 성북동 비탈의 반지하 방으로 이사 온 첫날. 현관 앞에 펼쳐진 조그만 화단에 앉아 오래도록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봤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외로웠고 도시의 찬란한 불빛들에 담배 연기가 사라져가는 시간들도 괴로웠다. 도무지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이곳은 저 찬란한 도시에서 밀려난 소외된 공간 같았다. 편리한 자동차와 그래도 살 만했던 작은 아파트와 내가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당당하게 정리해버리던 그 마음은 반지하 방처럼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보다 뼈저리다. 그리고 상상은 늘 현실과 많은 각도로 비껴가게 마련인 것을.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미래가 다시 현실로 다가올 것은 그다지 가깝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내가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우울한 첫날 밤.

어느 날 새벽, 비탈진 골목 사이로 폐지를 모으느라 열심히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를 만났다. 반쯤은 꺾인 할머니의 허리 뒤로 아직 편안하게 잠든 도시. 이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을 시간에 할머니는 힘겨운 수레와 그보다 가파른 경사 길에 맞서고 계셨다. ‘그래, 내가 뭐라고. 내가 저 할머니보다 나은 게 뭐라고 이곳을 소외된 도시의 언저리라 여기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모른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위해 버린 것인데, 타인에 의해 빼앗긴 게 아닌데 잠시의 불편함에 후회하고 있던 지난밤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잘 사는 법. 현재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법. 삶이란 누구의 시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자주 잊고 살았다. 이 정도의 불편함은 낯선 여행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불필요한 것은 지니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물건만이 아니라 마음이 더 먼저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말, 어디서나 언제나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이 가장 먼저다.

어느 날 후배가 “이곳이 형이 좋아하는 인도의 다르질링과 비슷한 곳이로군요?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발아래가 온통 구름에 갇혀 있던 그 아름답던 동네 다르질링의 풍경과 어느 정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좋은 곳에서 좋은 생각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끝내 세상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나를 조금 더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프런트 에세이]여행 작가 변종모의 멀지 않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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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행복 그것이 전부다
나는 지금 이곳 성북동 비탈의 동네에서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밤새 봄비가 내리고 바람도 심하게 불더니 이내 잠잠한 하늘이 파랗게 열렸다. 발아래 푸른 봄이 군대처럼 몰려오고 있다. 더 늦기 전에 현관 앞 화단에 상추도 심고 고추도 몇 개 심어야 할 것이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 시내를 한눈에 다 내려다보며 온전히 그 계절을 다 지켜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새삼스러운 즐거움이 되고 있다. 한때 나도 저 도시의 일부처럼 늘 비슷한 시간대에 출근을 하고,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며, 내가 살던 공간도 한 번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살던 때가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달력만 넘기며 숫자처럼 정확히 살아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렇게 초록의 신선함으로 몰려오는 봄을 바라보고 그것을 부추기는 바람을 온전히 기억하며 살게 되는 요즘 하루하루 모든 시간이 내 것 같다. 타인의 시간에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시간을 내가 헤아리며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생활이 남의 것이 아니라 그냥 내 것이라는 생각 속에는 적잖게 부담도 있고 새삼스러운 자유로움도 느낀다. 그 부담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일 것이며 그 자유로움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자유다. 늘 생각했던 자유이며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어렵사리 가지게 된 이유에서다.

회사를 다니며 열심히 돈을 모으고 살 때는 통장의 숫자가 점점 커져도 그것을 한 번도 내 손으로 만져본 적이 없었고 그것을 유용하게 쓸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날들이었다. 분명 소비를 위해 축적을 하는데 축적하는 데만 급급해서 소비할 시간이 없다니 말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한 듯싶었다.

예전보다 수입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예전보다 불행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다. 물론 처음 회사를 관두고 나에게 간단한 원고 청탁이라는 것이 들어오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부모님은 나를 부지런한 사람으로 낳아주셨고 최소한의 내 밥그릇을 챙길 만한 노력은 끊임없이 하고 살았으므로. 회사를 그만두면서 가장 크게 결심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한 달에 10일 이상은 절대로 일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이상 일이 생겨도 나머지 내 시간을 보장받는 조건이 아니라면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유명하지도 않은 프리랜서에게 한 달에 10일 이상 일이 생기는 일은 거의 없다. 한 달에 하루도 일이 없을 때가 더 많았으므로. 하지만 딱, 이정도가 좋다. 넘쳐나서 버리지도 않고 모자라서 남에게 빌려오지도 않는 상태. 넉넉하지 않으므로 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내게 오는 모든 것에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요즘처럼 소중하게 여겨질 때가 없다. 회사를 떠난 지 7년 동안 나는 네 권의 이야기를 썼고 다행히 그 이유로 나는 나를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됐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풍족하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값어치 없게 흘려보냈는지에 대해서. 모든 것이 사소하고 모든 것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 나는 모든 것이 과분했다. 생활도 생각도 마음도 모든 것이 흔하고 모든 것에 애정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파묻어놓고 모든 것을 가벼이 여기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한 번뿐인 삶이며 이 모든 것은 나의 삶인데도 말이다. 내 삶을 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보다 오만하고 아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불편한 경사의 높이에 살아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위태롭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점점 늙어가고 있지만 저렇게 씩씩하게 몰려드는 푸른 초록의 날들을 만끽하며 살므로. 아무래도 그것에 힘입어 나의 젊음이 조금 주춤하지 않겠나? 요즘이 제일 좋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냥 별일 없이 소소하게 지나고 있는 요즘이 가장 밝은 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 행복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고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규모로 여겨지므로 그저 매일매일 행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불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간다. 더 이상 낯선 곳을 헤매지 않아도, 떠나지 않아도 아무래도 좋을 마음으로 곁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 현재가 가장 즐거울 수 있도록 나는 내 마음을 보살피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다.

큰길가의 꽃집에서 채소 모종을 사왔다. 상추도 심고 오이도 심고 수박도 서너 개 심었다. 저 아래 서울 시내를 환하게 내려다보며 자라게 될 채소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당분간은 나도 채소들처럼 조금 싱싱해지는 기분으로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남미의 어느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쯤 내가 심어놓은 채소들을 바라보는데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계절이 본격적으로 열을 올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 무럭무럭 자라 올라 풍성하게 채워질 저 화단에 괜한 희망을 걸어보는 오후. 가능하다면 나는 저 채소들을 뽑아서 지인들과 그날의 노래들을 들으며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농담도 좋고, 타인들의 진지한 삶에 관해서도 좋고, 무엇이든 좋을 오후의 대화들을 생각한다. 그날은 이 채소들 덕분으로 그렇게 또 하루를 즐겁게 보내게 될 것이다.

삶이란 문득, 이 정도의 사소함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프런트 에세이]여행 작가 변종모의 멀지 않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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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한동안 매일 밤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다. 누군가 훼방을 놓고 있는 건지 언제나 깨고 나면 어렴풋하게 느낌만 남아 있을 뿐이었는데, 그럼에도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꿈속에서 내가 굉장히 오랫동안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다. 장소도 시간도 상황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어느 거리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나를 보다니, 이건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 안타깝게 죽고 나서 하늘에서 세상에 남겨진 육신을 바라보는 장면 같잖아’라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으나(이조차도 명확치 않으나 했다고 믿음) 현명하게도(과연) 이내 ‘이것은 꿈’임을 깨닫고 과연 이건 무슨 상황인지, 뭘 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게 됐다. 꿈이라는 것까지 인식했으나 억지로 깨려고도 하지 않는 그 알 수 없는 진공의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나의 뒷모습을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훑었다. 꿈속의 나는 동그랗게 말린 등과 축 처진 어깨, 피곤한 탓인지 전반적으로 부어 있는 다리로 어디를 향해 가는지 계속해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기억나는 다른 건 아무것도 없지만 단 하나, 마치 북극점에서 불어오는 듯한 거칠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며칠간 계속해서 나의 뒷모습을 마주하는 동안 만약 사람의 뒷모습에도 얼굴과 같은 표정이 있다면 어떨지를 생각해봤다.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이런저런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앞모습과는 달리 연기를 할 수 없는 뒷모습은 현재의 내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그 거대한 솔직함에 압도당할 것 같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떠나기로 결심했다. 무력한 일상을 재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여행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위협하는 감정들과 사건들, 불쑥 끼어들어 나름의 삶을 간섭하는 사람들, 자꾸만 걸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조건과 환경에서 벗어나 익숙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새로운 곳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의지를 되새기고 싶었다. 무의식적으로 꿈속에 투영된 막막함을 거꾸러뜨리고 천 길 해저의 곳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보려 했다. “나는 요즘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한없이 불안하고 심장이 쿵쿵 뛰어요”라는 말에 “내가 꼭 당신 나이였을 때 나는 길 위에서 생일을 맞았어요. 내 인생 최고의 낭비이자 최고의 순간이었죠”라고 답하던 누군가의 (무책임한) 응원도 실천에 큰 몫을 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혼자만 간직하고 싶으니 생략하기로 한다. 대신 그곳에서 읽었던 글의 한 부분을 옮겨놓는다.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들었던 책에서 마치 거짓말처럼 내가 하고 싶었던 혹은 진작부터 깨달았어야만 할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살면서 문득 스스로도 믿기 힘들 만큼의 중요한 깨달음이 고요하게 머리 위를 지날 때가 있는데 마침 그때가 그랬다.

‘공항을 찾아가는 까닭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공항 대합실에 서서 출발하는 항공편들의 목적지를 볼 때마다 그토록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망각, 망실 혹은 망명을 향한 무의식적인 매혹. 하지만 그런 매혹에 사로잡힌 인간이 가장 먼저 지녀야만 하는 것이 바로 여권이라니.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 공항의 우화는 이렇게 완성된다.’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 중에서

사실 멀리 떠나면 나를 둘러싼 풍경은 달라질지언정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나의 감정은 한순간 시차가 변하듯 달라지진 않는다. 아무리 멀리 도망쳐봐야 세상은 다 똑같은 거니까. 타임슬립을 한다고 해서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고, 낯설어진다고 해서 막막함을 더욱 잘 견딜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며, 새로운 공간에서 눈을 뜬다고 해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얻게 되지도 않는다. 삶은 ‘어쨌든’ 여기에, 이곳에, 내 안에 있다. 결국 존재가 아닌 태도, 그것이 우리를 덜 헤매게 하고 덜 아프게 할 것이다.

변종모 작가가 보내온, 마치 봄날 같은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발끝을 내려다봤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금방 궁금해졌다. 지금의 내 뒷모습은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마음은 잘 남겨두고 온 걸까. ‘어디서나 언제나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이 가장 먼저다’라는 변 작가의 이야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본다. 마음속에 번지는 기분 좋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변종모 작가는…
한때 광고대행사 아트 디렉터였다가 오랫동안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 떠나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모두가 여행자인 셈이다. 많은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길 위에서 만난 대부분의 것들을 기록하고 찍고 그리며 오래도록 길 위를 걸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6개월. 그렇게 지구를 몇 번이나 돌았다.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눴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가 있다.

■진행 / 이연우 기자 ■글&사진 /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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