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손님이라는 이름의 귀인(貴人)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들었던 구수한 옛날이야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되던 그 많던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라져가는 우리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신동흔 교수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매달 한 편씩,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결혼한 여성이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다 보면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힘든 일이 아마 손님을 치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자기 친구나 친정 식구라면 즐겁고 부담 없는 일이겠지만 시댁 식구나 남편의 동료 등이 자주 찾아온다면 무척 귀찮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퍼질러 앉아서 무한정 떠들어대기라도 할라치면 소리라도 질러서 내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남의 집에 찾아갈 때 이리저리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옛날 시골에서는 길 가던 나그네가 불쑥 찾아들어 자고 가기를 청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특히 마을에서 좀 살 만하다고 하는 큰집에는 수많은 객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것이 상례였다. 가장이 묵는 ‘사랑방’은 손님방을 겸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남자야 손님이 오면 술잔을 기울이면 된다지만 문제는 그 뒤치다꺼리다.
옛날 한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다. 그 집에는 손님이 늘 끊이질 않아 여인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매일 손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지친 안주인(혹은 며느리)은 집에 손님이 그만 찾아오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느 날 그 집에 웬 도사 스님이 시주를 청하러 왔다. 안주인은 곡식을 내어주면서 이렇게 물었다.
“스님, 우리 집에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힘들어 못 살겠습니다. 손님이 안 오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예, 방법이 있지요. 저 뒷산에 올라가면 이 집터를 내려다보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을 겁니다. 그 거북의 머리를 깨뜨리면 손님이 끊길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남한테 해가 되는 일도 아니었다. 안주인은 쇠망치를 들고 뒷산에 올라가 거북 바위의 머리를 깨뜨려버렸다.
그 일이 있은 뒤 신기하게도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줄기 시작하더니 몇 달이 지나자 뚝 끊겼다. 하지만 안주인이 일이 줄었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급속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얼마 안 가서 쫄딱 망하고 말았다.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돼온 이야기이다. 손님을 끊으려 하는 사람은 이야기에 따라 다른데, 대개 안주인이거나 며느리인 경우가 많다. 거북 바위 대신 용이나 자라의 목에 해당하는 혈맥을 끊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손님이 끊긴 뒤로 집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자료에서 공통적이다. 이야기의 핵심에 해당하는 요소다.
손님이 가끔씩도 아니고 날마다 들어서 수발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버거운 일이다. 집에 도움이 되는 귀한 손님이라면 몰라도 어중이떠중이 뜨내기에다가 꼴 보기 싫은 사람까지 찾아와서 심신을 수고롭게 하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이겠는가. 기껏 대접을 하고 났더니 대접이 소홀하다느니 어쩌느니 뒷공론까지 들려오면 문을 싹 닫아걸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손님이 드나들어 시끌벅적 부대끼는 것이 살아가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 집에 생기(生氣)가 넘친다는 말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은 그 자체로 침침한 흉가가 된다.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생기를 잃은 집이 잘될 리 없다. 그런즉, 손님이 끊기자 부잣집이 망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된다. 요컨대, 이 이야기는 집에 손님들이 드는 것은 큰 복이니 고맙게 여기고 귀인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나그네를 들여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 한 나그네가 들었는데 저녁밥을 내주자 먹지 않고 옆으로 밀쳐두었다. 이상하게 여긴 주인이 이유를 묻자 나그네가 말했다.
“오늘이 돌아가신 부모님 제삿날입니다. 떠도는 신세지만 밤에 밥이라도 한 그릇 올려드리려고요.”
그 말을 들은 주인은 나그네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며느리를 시켜서 따로 한 상을 보게 할 테니 이 밥을 그냥 드시구려.”
나그네가 고마워하면서 밥을 먹자 주인은 밖에 나가서 큰며느리를 불러서 사정을 설명하며 밥을 한 상 차려줄 수 없겠느냐고 하자 큰며느리가 말했다.
“아버님, 나그네 제사를 다 차리자면 허구한 날이 제삿날이 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 생각도 하셔야지요.”
주인이 다시 둘째 며느리를 불러서 말을 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비슷했다. 무안해진 주인이 끝으로 막내며느리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자 며느리가 말했다.
“아이고, 어쩌다가 객지에서 제사를 맞이하셨대요. 당연히 차려드려야지요! 그런데 양친 중 어느 분 제사라 하시던가요?”
나그네한테서 어머니 제삿날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은 며느리는 격식에 맞추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갖출 것을 다 갖춘 번듯한 제사상이 준비됐다. 나그네는 백배사례하며 어머니 제사를 제대로 모실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막내며느리가 아이를 잉태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시아버지한테 아이 이름에 창(昌)자를 넣어달라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며느리가 말했다.
“전에 나그네가 제사를 모셨던 날 밤에 제가 꿈을 꿨어요. 웬 선녀가 내려오시더니 아들 3형제를 정승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이름에 ‘창’자를 넣으라고 하지 뭐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 뒤에 태어난 두 아들까지 막내며느리의 세 아들이 나중에 커서 모두 나라에서 정승 벼슬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사람이 꽤 좋았을 저 주인은 객지에서 제삿날을 맞은 손님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밥상을 차리는 것은 며느리의 일이었다. 첫째와 둘째 며느리가 그 일을 거절했을 때 시아버지는 얼마나 무안하고 난처했을까. 그리고 막내며느리가 기꺼이 나서서 격식과 정성을 다해 제사상을 차릴 때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을까. “보소, 이게 내 며느리라오!”
저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아버지 말씀대로 그냥 밥이나 한 그릇 더해주는 것으로 ‘의무’를 때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늉일 뿐 진정한 베풂은 되지 못한다. 나서서 손님을 챙기려면 이렇게 자기 일처럼 정성을 다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것이 남을 제대로 돕는 방법이자 스스로를 온전히 돕는 방법이다. 보라, 정성을 다해 손님을 접대한 저 사람, 곧바로 하늘이 나서서 돕지 않는가!
필자는 지금 한적한 시골에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아내가 손님을 맞아서 편안하고 즐겁게 잘 대해주면 정말로 행복하기 한량없다. 나 자신한테 잘해주는 것보다 열 배는 더 고맙게 느껴진다. 이는 누구라도 다 그러할 것이다. 남편이 갑자기 손님을 데리고 왔을 때 짜증을 내는 대신 기꺼이 맞아서 잘 대접해주면 아내는 한순간에 ‘천사’가 되고 남편은 ‘능력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기운으로 승승장구해 집안에 만복이 깃들게 될 것이다. 옛이야기가 전해주는 세상살이의 묘법이다. P.S 이는 물론 아내한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아내의 친구나 처가 식구들이 집에 찾아올 때는 남편이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거꾸로 손님 앞에서 다투기라도 하면 그건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야기꾼 신동흔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나라의 민담과 신화, 설화 등 사라져가는 옛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민담전집1 한국 편」, 「살아 있는 우리 신화」,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등이 있으며, 그의 홈페이지(www.gubi.co.kr)를 통해서도 다양한 우리 옛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신동흔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