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찍어, 삶을 보여주었다! 로버트 카파

죽음을 찍어, 삶을 보여주었다! 로버트 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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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아서다”라는 말을 남기며 투철한 기자정신의 대명사가 된 ‘카파이즘’의 주인공, 로버트 카파. 그는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를 누비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생사의 현장을 기록했다. 지난 8월 2일부터 열리고 있는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 기념사진전’을 즈음해 원재훈 시인이 카파의 치열하고 아름다웠던 삶을 돌아봤다.

1 전선을 향하는 군 수송열차 출발 전, 작별 인사하는 공화국 군인. 스페인 바르셀로나(1936년 8월). 2 강의 중인 마르크시스트 혁명가 트로츠키. 덴마크 코펜하겐(1932년 11월). 3 공습 경보가 울리자 불안한 눈빛으로 거리를 달리는 엄마와 딸. 스페인 빌바오(1937년 5월).

1 전선을 향하는 군 수송열차 출발 전, 작별 인사하는 공화국 군인. 스페인 바르셀로나(1936년 8월). 2 강의 중인 마르크시스트 혁명가 트로츠키. 덴마크 코펜하겐(1932년 11월). 3 공습 경보가 울리자 불안한 눈빛으로 거리를 달리는 엄마와 딸. 스페인 빌바오(1937년 5월).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다
포토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는 전쟁에서 태어났고, 전쟁에서 죽었다, 그에 관한 기록물을 보고 이미지를 떠올리면 아군과 적군의 사체가 널려 있는 황무지에서 고독하게 앉아 있는 사내, 철모를 쓰고 여기저기 찢어진 군복을 입고 목에는 라이카 카메라를 걸고, 입술로는 체스터필드 담배를 물고 있는 사내가 떠오른다. 공포에 젖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사내. 로버트 카파는 그런 이미지로 현상 인화된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카파가 ‘파파’라고 부르면서 따랐던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파, 그는 좋은 친구였으며 용감하고 훌륭한 사진가였다.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불운이다. 특히 카파에게는 더욱 그렇다. 생전에 그는 아주 활기찬 사람이었기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하루는 무척이나 길고 힘들었다.”

뜨개질 중인 구급차 운전병들. 이탈리아 시실리아(1943년).

뜨개질 중인 구급차 운전병들. 이탈리아 시실리아(1943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헤밍웨이가 이 인터뷰를 하기 3일 전, 1954년 5월 24일 오후 3시 10분경 카파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취재하다가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베트남 호치민군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적어도 전쟁에서만큼은 운이 억세게 좋았던 카파는 그 운을 모두 사진에 담고 자신이 찍었던 전쟁 사진처럼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카파는 1937년 스페인 내전 중에 「뉴욕 월드 텔레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스페인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기교가 필요 없다. 카메라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스페인 자체가 사진이고, 당신은 그저 찍기만 하면 된다.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종군기자로서 전장의 실상을 생생하게 찍어낸 사진기자의 잠언이긴 하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는 맨눈으로 보기에도 두려웠던 인간의 진실을 카메라를 통해 담았다. 카파는 예술 사진, 사진 미학을 추구하는 사진에서 한 발 벗어나 대상에 가장 가까이 가서 진실을 찍었다. 그는 언어가 필요 없는 사진기자가 되고 싶어 했다. ‘초점이 약간 안 맞고, 노출이 약간 부족하고, 구도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사진들뿐!’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 말은 카파 사진에 대한 예찬이었다. 그의 사진들은 대중을 움직이게 한 전쟁 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누가 찍건 간에 전쟁 보도사진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담아낸 피사체들이다. 총알은 천사도 악마도 기자도 민간인도 가리지 않는다. 카파의 제2차 세계대전 종군기인 유럽 전선에서의 기록을 보면 인물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대상을 향한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손과 몸, 영혼과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고 떨고 있었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찍었다. 움직이지 않는 렌즈와 눈동자로.

1 자신의 노트를 읽고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 아이다호 선밸리(1940년경). 2 카파가 죽기 몇 시간 전 사진. 어린아이의 시체를 뒤로하며 지나가는 군인들. 인도차이나 남딘 마을에서 타이빈으로 가는 도로(1954년 5월 25일).

1 자신의 노트를 읽고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 아이다호 선밸리(1940년경). 2 카파가 죽기 몇 시간 전 사진. 어린아이의 시체를 뒤로하며 지나가는 군인들. 인도차이나 남딘 마을에서 타이빈으로 가는 도로(1954년 5월 25일).

그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피사체를 담아냈을까? 우선 카파는 렌즈를 통해 한 인간이 볼 수 있는 이상의 것을 보았다. 프레임이 정해져 있고, 디테일이 살아 있고. 집중력이 필요한 사진기를 통해서 그는 보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것들은 카파가 감당하기에는 무척이나 두려운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진실로 만드는 카파의 사진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 그는 평생 공포에 시달렸다. 그의 삶은 전쟁에 대한 인간의 공포에서 발현된다.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로 우리 시대를 낭만적으로 구분하자면, 그는 필름 시대의 사람이다. 사진 필름이 떨어지면 더 이상 촬영할 수가 없고, 현상과 인화를 해야만 한 장의 사진을 볼 수 있었던 시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사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오마하 해변을 침투하던 미군들의 사진에도 아슬아슬한 필름의 운명이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던 오마하 해변 침투 현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참혹한 전투 지역이다.

군인들의 팔다리가 둥둥 떠다니고, 전우들의 살점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오열하는 장교 바로 옆에서 촬영한 카파는 겨우 살아남아 미국의 「라이프」지에 필름을 우송했다. 35mm 필름 네 롤, 120mm 필름 대여섯 롤이 마감에 쫓기던 직원의 실수로 대부분의 필름이 못 쓰게 되고 10장의 사진만 남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카피와 함께 「라이프」지에 게재된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오마하 해변에 상륙 중인 미군 공격 제1파 부대 병사의 얼굴’이다. 뒤로 보이는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발명품인 철 구조물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이 사진을 찍는 카파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가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 사진으로 카파는 종군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하루를 평생처럼 산 사나이
카파는 전쟁과 사랑 그리고 중독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전쟁은 다소 낭만적이었습니다.”
카파가 스페인 내전을 이야기하면서 한 말이다. 전쟁을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했다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 세계대전, 이스라엘전쟁, 중일전쟁, 인도차이나전쟁(유일하게 한국전쟁은 빗겨갔지만), 그는 당대 모든 전쟁과 함께했다. 그가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에 대한 낭만성에 기인한다. 카파는 항상 밝은 표정과 매력적인 이야기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참혹한 전쟁의 시대에 카파는 낭만성과 유머로 자신의 삶을 무장했다.

카파는 태생부터가 시대와 불화했다. 미국 정부로부터 잠정적인 적국인으로 분류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이다. 1913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비극의 씨앗이다. 헝가리에서 앙드레 프리드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던 카파는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극적으로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통신사 데포트의 암실 보조원으로 일하다가 망명 중인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강연 사진을 찍어 사진가로 인정받는다. 이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베를린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서 게르다 타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로버트 카파라는 미국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카파의 첫 번째 여자가 게르다다. 그녀는 공산주의자로 남성 편력이 화려한 여자였다. 카파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거절당하고,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며 사진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르다는 아군이라 할 수 있는 공화국의 탱크에 치여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그녀의 죽음은 평생 카파의 고통이었다. 카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한 프랑스 여성이 삭발을 당한 채 쫓겨나고 있다. 프랑스 샤르트르(1944년 8월 18일).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한 프랑스 여성이 삭발을 당한 채 쫓겨나고 있다. 프랑스 샤르트르(1944년 8월 18일).

카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여성 편력을 알아야 한다. 헝가리에서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상류층 부인에게 갔다가 유혹당해 첫 성관계를 가진 이후, 카파의 삶은 어찌 보면 섹스중독자와 같은 모습으로도 비쳐진다. 게르다 타로, 일레인 저스틴(일명 핑키), 잉그리드 버그만, 윈스턴 처칠의 며느리인 파멜라 처칠을 비롯해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더불어 매순간 그는 옆에 있는 여자들을 만나 작업을 했고, 섹스에 탐닉했다. 심지어 헤밍웨이의 부인이었던 마사 겔혼과 새벽 4시에 호텔방에 같이 있었다고 한다. 카파가 거기에 왜 있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무튼 카파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사랑했다 국적, 인종, 결혼 여부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런 식이다. 이런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카파를 이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보이기 때문에 거론하는 것이다.

이성과 본능, 집과 호텔, 평화와 전쟁, 아내와 애인, 순정과 섹스 중에서 카파는 철저하게 후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본능과 호텔, 전쟁과 애인들 속에서 하루를 평생처럼 살아낸 것이다. 카파는 말했다.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한다. 어떤 입장에든 있지 않으면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흔들림과 떨림은 생의 동력을 상승시키는 기본 에너지다. 이 에너지가 강력하게 폭발하는 곳이 바로 전쟁터인데, 카파는 그 속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과 같은 유명한 작가들, 위대한 종군기자인 어니 파일을 비롯한 기자들, ‘매그넘’ 공동 창립자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카파와 함께, 아니 전쟁과 함께했다. 그 시대에 유럽과 미국에 살았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카파를 사랑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애증의 관계도 있다.

특히 헤밍웨이가 그렇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웅덩이에 떨어진 헤밍웨이를 사진기를 들고 바라보고 있는 카파. 헤밍웨이는 ‘아니 저 녀석이 위대한 작가가 총알에 맞아 죽기를 기다리다 그걸 찍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했다. 카파가 누구인가. 공수부대원들과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고, 거의 전멸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미군 제1파 부대와 함께한 카파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오해를 하지 않을까 싶다. 둘은 다시 화해를 했지만 마음의 앙금은 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카파는 자신의 책에서 이 일은 헤밍웨이의 오해라고 자세히 적고 있다.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는 거다.

사실 카파는 전쟁을 통해 이름을 날렸지만, 전쟁을 매우 두려워한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려움이 그를 온전히 살게 했다. 그는 말했다.
“다시 전장에 가야 한다면 나는 총으로 자살을 해버릴 거야, 난 너무 많을 걸 봤어.”

이런 말을 하고 또 전쟁터에 갔다. 이른바 카파식의 행동이다. 그는 ‘술 금지, 노름 금지, 폭격기 금지, 여자 금지’를 다짐한다. 이 중에서 카파는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했다. 카파식이다. 카파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항상 노름으로 탕진했다. 전쟁과 술과 여자와 노름은 카파의 피였다. 이 피는 전쟁이 만들었다. 그 피가 다른 피를 보았다.

카메라를 든 당대의 인문학자
우리는 이제 카파의 사진을 본다. 전쟁을 하고 있는 인간의 엘레지이다. ‘카파의 사진에서는 화약 냄새가 난다’라는 평가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가 과연 찍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우리들 내면에 있는 폭력, 증오, 파시즘이 아니었을까? 그는 카메라를 들고 이탈리아, 독일, 일본과 싸웠다. 그는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와 싸웠다. 그는 모든 인간을 괴롭히는 파시즘과 싸웠다. 그의 사진기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폭력과 증오를 찍었다. 거기에서 흔들리고 부딪치고 피 흘리는 인간의 본성을 찍었다. 카파는 자신의 사진 철학을 단 한 줄로 이야기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파를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약 당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너무 멀리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직도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상의 폭력과 전쟁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준다. 인생에 좀 더 가까이 가자, 가서 찍던 쓰던 더 가까이 가자. 거기에 진실이 있다. ‘카파’가 있다. 카파는 카메라를 든 당대의 인문학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내면 공간에는 자신만의 갤러리가 있다. 기억은 동영상으로 돌아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스틸 사진처럼 멈춘다. 필자의 갤러리에는 장미꽃과 소녀, 김소월 시집을 읽고 있는 중학생, 부산행 야간열차를 타고 보았던 들판의 불빛 하나, 딸과 아내,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여자와 남자들, 이런 이미지들이 전시돼 있다. 더 생각하면 갤러리는 더 풍성한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이것이 제1전시관이다.

제2전시관으로 넘어가면 ‘구두’를 비롯한 고흐의 그림들, 베토벤의 흉상,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들과 이슬람의 사원들, 섬, 안중근 의사의 독방과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독방, 교도소, 내소사나 부석사의 장면들이 있는데, 그중에 로버트 카파의 사진이 유별나다.

그것은 흑백사진인데 무척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고 있는데 멈추어 있고, 멈추어 있는데 계속 흔들리면서 주위의 공기를 떨리게 만든다. 그 떨림이 소리가 돼 필자를 부르고 있다. 기억과 소리가 만나면 음악이 된다. 카파의 사진들은 적막한 필자의 갤러리에 소리를 부여한다. 제3전시관은 아직 비어 있다. 사후에 장식될 사진들이 전시될 공간이다. 우리는 누구나 1, 2, 3전시관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카파의 사진을 걸고 에릭 호퍼의 이 문장을 적어두자. ‘악마를 잘 다루려면 맞붙어 싸울 것이 아니라 이용해야 한다.’

죽음을 찍어, 삶을 보여주었다! 로버트 카파

죽음을 찍어, 삶을 보여주었다! 로버트 카파

시민들로 북적이는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 기념사진전
전쟁을 싫어했던 전쟁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 1백60점이 지난 8월 2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카파 탄생 100주년,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는 뉴욕 ICP(국제사진센터) 소장 오리지널 프린트로 한국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인도차이나전쟁의 생생한 사진뿐만 아니라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그가 교유한 세계적인 거장의 유머러스한 사진과 그를 사랑한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도 만날 수 있다.

전시 기간 8월 2일~10월 28일 (휴관일 없음)
전시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지하 1층)
관람 시간 오전 10시 30분~오후 9시
입장 요금 어른 1만2천원, 청소년 8천원, 어린이 7천원
문의 0505-300-5117 (www.robertcapa.co.kr)

주최·주관 경향신문사·디투씨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주한미국대사관, 주한스페인대사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한국사진기자협회, 한국사진저작권관리협회, 한국전쟁기념재단
협찬 대한항공, 밀레, 한국도자기, 후지필름

■글 / 원재훈 시인 ■사진 / 로버트 카파, 김문석(경향신문 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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