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에세이]소설가 박솔뫼의 뜨개질하는 시간들](http://img.khan.co.kr/lady/201309/20130909151539_1_fr_es1.jpg)
[프런트 에세이]소설가 박솔뫼의 뜨개질하는 시간들
뜨개질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작년 9월로 곧 1년이 다 돼간다. 이전에도 목도리를 떠보려고 두 번 시도했지만 다 중간에 관두었다. 완성을 하지 못했다. 실수가 있을 때마다 자꾸 풀어서 다 뜨기도 전에 지쳐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줄곧 몰입해 뜨개질을 하다 새벽 2시에야 잠이 들고 그러고 나서도 뜨개질을 빨리 하고 싶어 6시에 일어나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작년부터는 다행히 오래 걸리기는 해도 하나씩 완성은 하고 있는데, 그렇게 뜨개질을 해나가며 몇 가지 알아차리게 된 것들이 있다. 우선은 뜨개질은 중독성이라고 해야 할까 몰입도라고 하는 쪽이 나을까, 간단히 말해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전에 우연히 영화 만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분은 내가 뜨개질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웃음기 없는 얼굴로 뜨개질에는 왠지 광기가 느껴진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시며 ‘레이스 뜨는 여자’를 예로 들었다. 나는 그때는 ‘뭐 그 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에이, 아니에요. 그 전에 실이 다 떨어져 멈출 수밖에 없어요. 미치기도 힘들걸요?”라고 웃으며 말했는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대로 씻지도 않고 테이블 위 털실을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잠시 ‘아, 역시 맞는 말이었어’ 하는 생각에 아주 잠깐 서늘한 기분이 됐다. 아마 실이 다 떨어져도 실을 연결하는 동작 역시 유기적으로 마치 방금 전처럼 뜨개질을 하듯이 이어져 새로운 실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작년 9월 뜨개질을 배우며 처음 뜨기 시작했던 목도리는 택시에 두고 내려 완성을 하지 못했다. 그 목도리는 회색의 두꺼운 실로 뜨고 있던 것이었는데 일정하지도 않고 삐뚤빼뚤한데다가 중간에 코도 두 개나 늘어나 있었지만, 나는 그 목도리를 꼭 완성하고 싶었고 부족하더라도 다 떴더라면 분명히 기뻐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뜨던 목도리를 택시에 놓고 내린 것을 깨닫고 스스로의 부주의함에 화가 나 울고 또 울기도 했었다. 그때 탔던 택시 기사 아저씨는 강원랜드에 간 이야기를 타고 가는 내내 재밌게 해주셨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목도리와 그 외에 함께 들어 있던 것들은 이제 잊어버려야지, 하고 간신히 마음을 다독였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래서인가, 그 직후 다시 실을 사서 떴던 목도리는 꽤 빨리 완성했다. 열심히 뜨던 것을 잃어버려서 아쉽고 억울한 마음에 시간이 날 때마다 손에서 놓지 않았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목도리만 떴다. 그때 범죄 관련 드라마나 영화 등을 주로 틀어놓고 목도리를 떴는데 사건이 진행되는 것과 뜨개질이 나아가는 것이 비슷한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범죄물이나 스릴러, 미스터리물과 뜨개질은 서로 어울린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볼 때 손을 움직여 뭔가를 하고 있으면 무서움이나 긴장감을 좀 참을 수 있었고 뭔가를 몰입해서 보고 있으면 뜨개질을 할 때 실수가 잦을 것 같지만, 의외로 아무것도 안 보고 할 때보다 실수가 적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나 긴장하며 보고 있어서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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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에세이]소설가 박솔뫼의 뜨개질하는 시간들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뜨개질이 잘되는 상황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고, 시도한 것만으로는 네 번째였고 완성한 것으로는 최초가 된 목도리를 뜨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뜨개질을 오래하거나 정말 잘하는 사람들은 아예 뜨개질을 하기 좋은 조건 같은 것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뜨개질이 능숙한 사람이라면 버스나 지하철, 카페나 식당 혹은 길가의 벤치 어디에서라도 별 무리 없이 뜰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시도해본 적은 있지만 자꾸 실수가 생겨 요즘은 거의 집에서 뜨지만, 가끔 지하철 안에서 손도 안 보고 기계적으로 뜨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면 ‘음, 저 사람은 지하철에서도 어디서도 아무렇지 않게 뜨는구나’ 하는 마음에 살짝살짝 훔쳐보고는 하는데, 우연인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사람들이 뜨는 것은 늘 정교한 무늬의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뜨개질이 잘되는 상황이나 조건 같은 것은 있을지 몰라도 크게 구애받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언젠가 저런 것을 뜰 수 있겠지, 하고 바라며 다시 살짝살짝 훔쳐보았다.
최근에 읽은 소설인 엔조 도의 「어릿광대의 나비」에는 뜨개질을 포함한 각종 수예에 능한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그 지역의 수예를 배우고 수예에 관한 책을 쓰고 그와 동시에 그 나라 말로 된 혹은 그 지역의 소수만 쓰는 언어로 소설을 쓴다.
수예를 배우며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 손을 움직이며 언어를 체득해 그 과정에서 소설과 수예 관련 책을 각각 쓰는 것이다.
말을 배우는 과정이 수예의 진보와 함께 이루어지는 이상, 내 어휘는 수예 용어와 요리 용어를 중심으로 한다. 거기서부터 부족한 게 더해져서 내 말은 짜이고 익는다. -(본문 P54 중에서)
실제로 그것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걸까,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지만 대체로는 그건 어떤 것일까, 알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뭔가 마음을 붙잡는 것이 있었는데, 언어라는 것이 종이 위에서 책이나 연필로 배우거나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손을 움직이며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 옆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배우는 와중에 체득된다는 것. 또 언어가 체득되는 시간 사이에 다양한 무늬가 천 위에서, 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그려보는 일은 마음을 떨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요즘은 방울이 달린 모자를 연이어 뜨고 있는데 엔조 도의 소설을 읽은 후로는 가끔 실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필요한 말만을 하며, 즉 필요한 말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누군가에게 뜨개질일지 말일지, 혹은 둘 다 실패할지 모르겠지만 전달하는 모습을 그려보고는 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고요한 시간은 못 될 것이고 가끔 고요하고 대체로 웃기면서 또 웃으면서 조금 긴장감이 있는 이상한 시간일 것이다. 그런 시간을 한 번만이라도 갖게 된다면 실 사이에 오가는 것이 바람뿐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말한 것처럼 최근에는 방울이 달린 모자를 뜨고 있는데 오늘 올여름 들어 두 개째의 완성했다. 아직 실을 정리하는 것이 남았지만 어쨌거나 다 떴다. 모자를 뜨는 것은 목도리보다는 금방 끝나고 왠지 모자라는 물건 자체가 조금 귀여운 물건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인지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뜰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인지 다른 것보다 모자를 많이 떴는데 방금 헤아려보니 나는 오늘 뜨개질을 시작한 이래 여섯 개째의 모자를 완성했다. 털실의 굵기나 색은 다르지만 모두 방울이 달린 털모자였다. 언젠가는 방울이 안 달리고 좀 더 길거나 짧은 혹은 좀 더 넓거나 좁은, 그게 아니면 끈이 달리거나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만들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제 무엇을 뜰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다음에 뜰 것은 정해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또 모자이다. 여름에 세 개의 모자를 완성하겠다고 결정해서인지 이 다음이 모자라는 것에는 고민이 없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뜰까, 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며칠 전 뜨개질 상점에서 보았던 색색의 다양한 굵기의 실들, 그 옆에 같이 파는 이런저런 뜨개질 관련 책들, 그런 것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생각해보다 보니 왠지 나른해지면서 혼자서 피식피식 웃게 됐다. 그냥 가만히 앉아 어떤 것을 뜰까,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거운 것이었다. 문득 지난달 함께 뜨개질 상점에 갔다가 실을 보며 웃고 있는 나를 보고 친구가 놀렸던 것이 생각났다.
분명 뜨개질은 대개의 경우 혼자서 하는 일이고 자신만의 필요한 최소의 공간에서 가만히 몰입해서 하는 것이라 거기에 어떤 식의 즐거움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뜨개질할 실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꽤 오래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다 보면 새로운 ‘뜨개질을 하기 좋은 조건’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고 또 어느 순간에는 어떤 장소나 상황에 크게 구애받지 않게 되는 경지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 번쯤은 맞이해보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가끔 실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필요한 말만을 하며 -즉 필요한 말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누군가에게 뜨개질일지 말일지, 혹은 둘 다 실패할지 모르겠지만 전달하는 것일 것이다. 그 사람은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잊히지 않는 목소리나 손으로 기억하게 되겠지. 뭐 그런 생각들을 한다. 바로 뜨개질을 하면서 말이다.
편집 후기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고요한 시간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재미없는 것일 수도, 시시한 것일 수도 혹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시간들 말이다. 대개 그런 시간은 우연히 ‘발견되며’, 그렇게 머리 위로 충만한 고요와 함께 이런저런 무언가 중요한 것들이 오고가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겪고 난 뒤로는 그 기묘한 즐거움을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손을 움직이며 모자를 뜨는 것일 수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종이 위에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일 수도, 또 어떤 이에게는 나무를 다듬고 깎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게는 한때, 그 비슷한 것으로 ‘칼질하는 시간’이 있었다. 저녁 늦게 들어간 집에서 제대로 불도 켜지 않은 채 냉장고며 베란다 용도로 쓰는 창고 등을 뒤져 이것저것 칼질할 재료들을 꺼내와 도마 위에 주르륵 늘어놓고 싹둑거리는. 굶주림에 시달려 있던 상태도 아니고, 당장 멋진 요리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통통 탄성 좋게 튀어 오르던 칼의 부딪힘 소리가 듣기 좋았고 퐁퐁 수증기를 내며 끓는 냄비에 그 재료들을 쏟아 부을 때 나던 경쾌한 울림이 후련했달까. 간혹 날씨라도 도와주어 잔뜩 찌푸린 도시에 빗방울이 닿는 소리가 함께 엉겼다 풀어지기라도 하면 더욱 가슴속 밑바닥에 동심원이 생기는 기분이 들며 뭔가 아득해졌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물론 그 시간의 뒤편에는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열병과 같은 기대와 허기가 동력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살아가는 데는 사랑하는 사람도, 소중한 무엇도, 어떠한 일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그 고유한 시간들이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 견디고 채우고 끌어안는 시간들 말이다. 기록적인 폭염이다. 날씨가 고온다습해서인지 감정 또한 아주 덥고 축축하다. 마치 아침부터 밤까지 쉴 틈 없이 가동하고 있는 습식 사우나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다. 만사가 귀찮고 힘들지만, 오랜만에 햇볕에 바짝 말려두었던 도마를 꺼내봤다. 시간은 흘렀고, 틈은 메워지지 않는다. 말들도, 사람도, 약속도, 모두 떠났다. 하지만 이 시간, 이걸로 충분하다.
박솔뫼 작가는…
올해 황순원문학상에 이름을 올린 후보자 중 최연소인, 요즘 가장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학을 전공했다. 2009년 ‘자음과 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장편 「을」, 「백행을 쓰고 싶다」가 있다.
■진행 / 이연우 기자 ■글 / 박솔뫼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