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느 (공화파)병사의 죽음’. 카파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바로 그 사진이다(스페인 코르도바, 1936년 10월). 2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부대’. 카파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필름 두 통을 촬영했지만, 「라이프」의 암실 담당자가 인화 도중 실수를 해 11장의 사진만 겨우 남았다. 이 작품은 그중 한 장이다(프랑스 노르망디 1944년 6월). 3 ‘자욱한 먼지 속의 병사’. 화약 냄새가 밖으로 퍼져 나올 것 같은 이 사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스페인 아라곤 전선 세그레 강, 1938년 11월).
로버트 카파(1913~1954)는 헝가리에서 태어나 파리지앵으로 살다 베트남에서 생을 마감했고, 미국 시민으로 뉴욕에 묻혔다. 사진가로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린 ‘강의 중인 레온 트로츠키’를 촬영한 19세 때부터 늘 불안한 신분의 프리랜서 기자였다. 헝가리 국적의 난민이었던 그는 죽기 8년 전에야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4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안정된 가정’, ‘정착한 집’과는 거리가 먼 나날을 보냈고, 떠돌이 생활에 익숙한 그는 자연스럽게 보헤미안적인 삶을 사랑했다.

‘파블로 피카소와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 조카 하비에 빌라토’. 비치파라솔을 든 피카소(61)가 연인 질로(21)의 뒤를 졸졸 따르는 이 사진은 둘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사용됐다(프랑스 골프쥐앙 해변, 1948년 8월).
파시스트를 피해 도착한 베를린에서 카파는 사진 에이전시 데포트의 암실에서 조수로 일했다. 그러던 중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레온 트로츠키(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의 연설이 있었다. 데포트의 모든 사진기자들은 트로츠키의 강연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당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태라 보안이 철저했다. 카파는 강철 파이프를 옮기는 일꾼 사이로 몰래 숨어들어 강연장으로 들어갔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작은 라이카 카메라가 있었다.

‘카페 드 플로르’. 1881년 오픈 이래 지금까지 문학과 예술을 꽃피운 곳으로, 파리를 대표하는 명소다(프랑스 파리, 1952년 7월).
스페인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타로는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카파와 함께 종군기자로 스페인으로 향한다. 그들은 한 팀으로 일했다. 사진은 ‘카파와 타로가 찍은 사진’ 혹은 ‘로버트 카파’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1937년 7월, 마드리드 부근 부르네테에서 전투가 일어났고 타로는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병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폭탄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혼돈 속에서 탱크 하나가 고장이 났고, 타로는 아군의 탱크에 깔렸다. 다음날 아침, 파리에서 신문을 집어든 카파는 ‘게르다 타로 부르네테에서 죽다’라는 헤드라인을 보게 된다. 당시 카파는 전장에서 촬영한 필름을 넘기기 위해 파리에 와 있었다. 타로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 파리에서는 타로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카파에게는 눈부신 영광 못지않은 치명적인 아픔을 남겼다. 스페인 내전 발발 두 달째인 1936년 9월 초, 격전지 코르도바 전선에서 한 병사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극적인 장면이 카파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총에 맞은 한 젊은이가 숨을 거두는 순간을 담은, 전쟁의 참혹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카파의 사진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목탄이 달린 대나무 장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앙리 마티스’. 이스라엘 전장에서 돌아온 카파는 마티스의 별장을 찾았다. 여든의 마티스가 관절염으로 인해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어 긴 대나무 장대에 목탄을 꽂아 방스에 있는 로자리오(마티스 성당으로도 불림) 성당의 성 도미니크를 그리고 있다(프랑스 니스 인근, 1949년 8월).
카파와 타로의 사진을 검토한 스페인의 문화학자 카를로스 세라노는 “두 사람의 사진은 누구의 작품인지 구분하기 힘든 것들도 많다. 1937년까지 타로의 사진은 서명 없이 카파의 이름으로 발표됐기 때문이다”라며 ‘타로 촬영설’에 여지를 남겼다. 또 최근에는 일본의 논픽션 작가 사와키 고타로가 「카파의 십자가」라는 책을 내놓으며 ‘타로 촬영설’에 힘을 실었다. 아울러 작가는 진실 여부를 떠나 ‘어느 (공화파)병사의 죽음’은 카파의 ‘출세작’인 동시에 평생을 따라다닌 ‘십자가’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카파는 ‘어느 (공화파)병사의 죽음’으로 위대한 전쟁 사진작가로 우뚝 선 후 전장에서 사라져간 타로의 삶을 이어받았으며, 진정한 전쟁 사진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전장을 찾아다녔다”라고 전한다.
비로소 벗어난 십자가
타로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충격으로 카파는 스페인 내전지를 떠나 지구의 반대편 중국으로 간다. 한커우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 현장을 촬영했지만 몇 달 후 스페인 격전지로 다시 돌아갔다. 파시스트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다. 카파의 사진은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담았고 「픽처 포스터」지는 그를 세계 최고의 종군기자라 칭송했다. 국제적인 명성은 얻었지만, 스페인 내전에서 촬영한 ‘어느 (공화파)병사의 죽음’은 카파에겐 부담스러운 사진이 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전쟁 사진을 촬영하고 나서야 그 ‘어느 (공화파)병사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라투르 다르장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혁명 기념일 불꽃축제를 관람하는 유명인사들’. 영화 ‘물랑루즈’의 제작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촬영 중이었던 카파는 존 휴스턴 감독과 남자배우 호세 페레, 여배우 자자 가보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프랑스 파리, 1952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이듬해 1940년 6월, 파리는 나치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엔 독일 전투기가 런던을 폭격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헝가리 출신 카파는 적국인으로 분류됐다. 어머니 줄리아와 동생 코넬과 함께 뉴욕에 있던 카파는 ‘뉴욕을 떠나지 말라’라는 명을 받는다. 종군기자 카파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히틀러가 헝가리를 점령하고 있는 한 나는 헝가리인이기를 거부한다”라며 스스로를 변호했던 카파는 1942년 4월 마침내 비자를 받아 런던으로 떠난다.
런던에는 연합군의 프랑스 침공을 기다리며 연합국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새벽 4시. 우리는 배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총알은 나를 둘러싸며 물에 박혔다. 병사들은 총알을 피해 처절하게 도망치고 있었고 나는 그 장면을 미친 듯이 찍어댔다. 모든 것이 부서졌다. 우리가 훈련받은 모든 것이 해변에선 소용없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카파의 카메라에는 연합군이 격렬한 저항을 뚫고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현장이 고스란히 담겼다. 1만여 명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서 목숨을 잃었다.
드라마틱한 운명
1945년, 전쟁은 끝났다. 카파는 그가 사랑을 시작한 파리에서, 연합군 병사 위문을 온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열애는 매우 유명했다. ‘미스터 버그만’이라는 자리는 카파에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을 보장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파에게 할리우드에서의 생활은 최악이었다. 버그만은 “카파를 만남으로써 ‘할리우드의 꽃’에서 비로소 할리우드 밖에도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인생에 위로와 기쁨을 남기며 헤어진다. 그는 다시 종군기자가 됐다. 낯선 호텔에서 밤새 책을 읽으며 일하는 것에, 외롭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 생활을 즐겼다.
1948년, 카파는 아랍에 대항한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이었던 탈레비 전투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의 허벅지에 총알이 박혔다. 그는 종군기자로 지내며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늘 총알이 비껴갔던 행운을 누렸던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종군기자 생활을 접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파리에서 자신이 설립한 국제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의 수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존 휴스턴 감독의 영화 ‘물랑루즈’의 제작 과정을 사진에 담는가 하면 파리와 런던의 일상을 담아 잡지에 실었다. 그렇게 한국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휴식 기간을 갖는다. 일본의 초청을 받아 전쟁터가 아닌 일상에서 오로지 촬영에만 열중하던 카파는 미국의 사진잡지 「라이프」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촬영해달라는….
1954년 5월 25일 3시경 프랑스 부대와 함께 이동하던 카파는 호송 차량에서 내려 군인들과 함께 걸으며 사진을 찍던 도중 지뢰를 밟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타로의 최후처럼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 지갑에는 첫사랑 게르다 타로의 사진이 있었다. 카파의 장례식은 하노이에서 군사 장례식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집으로 보내졌다. 미 군부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기를 바랐으나 카파의 어머니는 “아들은 평화주의자였다”라며 반대했다. 카파는 뉴욕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평생을 유민으로 떠돌던 카파는 전 세계인들이 파시스트와 대항해 싸우도록 전쟁터를 기록하고 보도했다.
로버트 카파가 남기고 간 사진을 보면 그가 총탄이 날아오는 속에서도, 병사들의 비명이 난무하는 속에서도 꿋꿋하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사진작가의 정신을 가리켜 ‘카파주의(Capaism)’라고 한다. 어쩌면 술과 도박과 여자를 사랑한, 영화처럼 살다 간 그의 삶이 다소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목숨 걸고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며 그 속을 헤집고 나오는 새 삶을 찬양했다.
‘한 발짝 더… 카파처럼 다가서라’
‘전쟁을 싫어한 전쟁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100주년 사진전

어느 보헤미안의 전설 같은 삶 ‘로버트 카파의 일생’
이번 사진전은 유병선 사진작가협회장을 비롯해 강운구, 박주석, 조세현 등 유명 사진작가는 물론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송수정 사진전기획자 등 문화예술계 관련 전문가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든 아마추어 작가들 등 학생과 시민들의 열기 또한 뜨겁다.
중·고교 교사들은 단체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사진전이라기보다 한 컷 한 컷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이 인상 깊다. 세계사 속의 거대한 사건이 기록돼 있어 진실의 힘이 내뿜는 여운이 오래 남는다”라며 보다 많은 학생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남겼다. 스타들의 줄 이은 관람은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가수 조영남은 ‘카파는 사진계의 피카소’라며 “한 점, 한 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예술 작품이다”라고 감동을 전했다. 한국의 어머니로 사랑받는 탤런트 고두심은 영화 보러 가는 길에 잠깐 짬이 나서 전시회를 찾았다가 2시간 가까이 사진전을 관람했다. 그녀는 “오리지널 프린트가 주는 감동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신선한 전시였다”라며 사진작가로 유명한 탤런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 ‘전시 관람을 했는지’ 물으며 “카파 사진전 관람을 권유하고 싶다”라고 했다. 오리지널 프린트가 주는 아우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가수 이상은은 “지금 시대에도 카파와 같은 사진을 찍는 젊은 사진작가들이 많다”라며 “사진 작품의 예술성을 새로이 조명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라는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사진작가로도 이름이 높은 탤런트 조민기는 “로버트 카파의 작품은 물론 그의 작가 정신을 좋아했다”라며 이번 전시의 홍보대사를 흔쾌히 맡아 활동하고 있다.
전시장 내에서는 2003년에 미 공영방송 PBC에서 제작한 로버트 카파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상영되고 있다. 카파의 동생 코넬 카파와 카파의 연인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인 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직접 카파와 버그만의 사랑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1시간 30분의 러닝타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관람객들이 흥미를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며, 평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는 ‘아메리카노 타임’으로 관람객 모두에게 아메리카노 커피를 제공한다.
-전시 기간 8월 2일~10월 28일 (휴관일 없음)?관람 시간 오전 10시 30분~오후 9시
-전시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지하 1층)
-입장 요금 어른 1만2천원, 청소년 8천원, 어린이 7천원
-문의 0505-300-5117(www.robertcapa.co.kr)
-주최·주관 경향신문사·디투씨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주한미국대사관, 주한스페인대사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한국사진기자협회, 한국사진저작권관리협회, 한국전쟁기념재단
-협찬 대한항공, 밀레, 한국도자기, 후지필름
■글 / 김영남(경향신문 출판기획위원) ■사진 / 로버트 카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