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프런트 에세이

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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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시인은 이달 「레이디경향」 독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이야기로 지나간 겨울의 기억들을 꺼내보았다. 캠퍼스 가득 쌓인 눈이 깔아놓은 둘만의 흰 양탄자 위에 누워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의 음성을 듣던 어느 날,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취해 있던 코 끝 시린 행복.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뭉텅뭉텅 흘러 아내의 배 속 아이까지 세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고 지켜주면서 곧 함께 눈 맞춤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지난겨울의 설렘을 떠올려봤다. 이 이야기는 지난 2월 15일 세상에 내려온 서 시인의 예쁜 딸이 태어나기 전 그 시점으로 돌아가, 가만가만 쓴 모양이었다. (편집자 주)

[프런트 에세이]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프런트 에세이]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아가야, 너를 기다리는 겨울이야. 이번 눈은 명동의 트리처럼 많이 내려. 아빠의 작은 차는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했단다. 차가 조금 컸다면 동네 어귀에 있는 애꿎은 전봇대나 남의 집 착한 담벼락에 닿았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아빠는 차에서 튀어나와 타이어를 발로 차며 겨울이 내려보낸 하얗고 차가운 악마들에게 저주를 퍼부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아가야, 네 덕인 것 같구나. 엄마는 너를 지키고, 너는 아빠를 지켜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하게 돼. 눈은 지치지 않고 내려서, 방금 눈을 치운 자리를 다시금 차지하고 앉아서, 천천히 가라고, 오늘은 좀 쉬었다 가라고,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아.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가다가 잠시 쉬면, 다음에 더 잘 갈 수 있거든. 시간도 적당하게 맞출 수 있지. 무조건 빨리 갈 필요는 없어. 그곳이 어디든 마찬가지란다. 도착해서의 행복보다 가는 동안의 행복을 아빠는 좋아해. 그 길을 가는 데 최선을 다하려고 해.

엄마와 아빠가 연애를 할 때 말이야.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거든. 엄마는 공부를 곧잘 해서 학교 다니는 내내 기숙사에 살았는데, 아빠 때문에 기숙사 통금 시간을 종종 어기기도 했지, 아빠는 물론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기숙사 근처에는 갈 일도 없었을 거야. 거기 근처에는 괜찮은 술집이나 당구장이 귀했으니까. 그런 건 중요한 일은 아냐. 맞다, 눈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우린. 그곳은 생각보다 눈이 많이 오는 도시야. 남쪽인데도 그래. 아빠가 교복을 입고 학교 다닐 때 눈 핑계를 대고 아침 수업에 빠지고는 했었지. 1교시가 수학시간이면 그렇게 눈이 사랑스러웠는데. 하루는 엄마가 지내던 기숙사 앞에 눈이 무릎만치 쌓였어. 학교일을 봐주시는 아저씨는 치우고 또 치워도 줄지 않는 눈이 원망스러워서 집중력이 없는 수험생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거 참, 눈 한번 오지게 오는구먼, 하고 말았을 거야. 새벽이었어. 눈이 그득하니 쌓여서 그것들이 빛을 내는데, 캠퍼스는 구름의 호수 같았는데, 어떤 영화도 상영되지 않은 스크린 같았는데, 그때는 참 그랬는데 말이지.

가까운 동네에 산부인과가 있어서 다행이지. 오늘 아침까지도 눈이 쉬지 않고 왔단다. 차창이 완전히 얼어버렸어. 커피포트에 물을 데워 앞 유리에 조심스레 부어야 했어. 얼음이 알몸을 보여주며 녹아 없어지더구나. 눈 알갱이는 참 예쁘게도 생겼지. 대학에 다닐 적의 엄마처럼 차가운데 예쁘고, 날카로운데 아름답지. 아직 남은 얼음의 흔적들이 시야를 방해했지만 병원까지 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어. 병원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오십 걸음에서 백 걸음 정도 걸어야 병원에 들어갈 수 있어. 오늘처럼 추운 날은 엄마를 병원에 먼저 내려주고 아빠는 차를 세우고 그 길을 총총 걸어간단다. 총기 그득한 바람이 똑똑한 야수처럼 몸의 빈곳을 찾아 들어왔어. 엄마는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겠지. 아빠는 3칸씩 4칸씩 계단을 건너뛴다. 아가야, 갓난이들이 부모에게 안겨 있어. 아이들이 아장아장 걷고 있어. 빽빽 울고 있어. 이곳에 오면 어쩐지 소리 없는 웃음이 나와서 꼭 바보가 되는 것 같아. 바보라는 말은 얼마나 좋으니. 바보야, 바보.

엄마가 지내던 기숙사 옆 건물은 아마도 공대였을 거야. 실험실이었을까, 자동차공학과 건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창문 몇 개에서 빛이 새어 나왔어. 세계 어느 대학이든 공대는 그 구역에서 가장 삭막하다는 전설이 있단다. 진위 여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지만 그곳의 공대는 확실히 그랬어. 빛마저 삭막했지. 우리는 둘 다 추운 걸 무척 싫어해서 두터운 내복을 소중히 챙겨 입는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처량하고 운치 없는 공대 잔디밭에 깔린 흰 양탄자에 누워봤어. 물론 그것들은 눈이었지. 눈이 쌓이니 공대도 그럴싸하니 괜찮더구나. 그래서 우린 그곳을, 오랜만에 공대 앞에 생긴 하얀 도화지를 한번 더럽혀보기로 한 거야. 엄마, 아빠는 「삼국지」의 관우가 적장을 베는 정도의 시간을 눈 속에 누워 있었어. 아빠는 목도리 속 목덜미가 점점 축축해져와 얼른 일어났는데, 엄마는 여태 눈밭에 누워서는 하늘을 보면서 무슨 말인가를 했어. 아마도 아가야, 너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였거나 학점 이야기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임용시험 이야기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예뻐서, 엄마의 작달막한 음성 같은 건 건성으로 흘려버리고 그 광경을 눈에 영원히 담아놓을 수 있도록 머릿속에 조각을 새겼지. 엄마가 눈 위에 누워 있는 그 모습을. 그때 빛을 발하던 공대 창문 하나가 벌컥 열렸어. 너희 뭐냐! 아마도 대학에 와서 연애 한 번 못해본 공대생이거나 지도교수에게 혼나고 화가 잔뜩 난 대학원생이 아니었을까. 쳇, 질투하기는. 곧이어 엄마가 일어나며 말했어. 추워, 이게 뭐야. 캔 커피라도 사와.

[프런트 에세이]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프런트 에세이]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엄마는 초음파실에 얌전히 누웠단다. 오늘은 정밀 초음파를 보기로 한 날이고. 아가야, 너의 팔과 다리가, 콧대와 목둘레가 세상이 생각하는 평균적인 범위 안에 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며칠이 오늘까지 이어졌단다. 두렵지는 않았어. 아가야, 배 속에서 너는 장난스러운 아이가 돼 발을 동동 구르고, 엉덩이를 이리저리 들썩이고, 입술을 오물조물 움직였어. 우리는 그걸 믿기로 했다. 엄마는 좋은 걸 먹고, 듣고, 생각하려 노력했지. 태어나면 알게 되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란다. 가을에 의사선생님은 양수검사라는 걸 권하더구나. 엄마는 하지 않기로 했어. 네가 무엇으로 태어나든 우리는 너를 사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믿었거든. 대체 네가 무엇으로 태어나겠니? 엄마와 아빠의 딸로 태어나겠지. 자명한 사실은 그것 하나뿐이었어. 다른 것은 모두 미지의 바구니에 담겨 있지. 부활절, 달걀바구니에 손을 넣고 삶은 달걀의 온기를 느끼는 어린이처럼 엄마와 아빠는 손을 꼭 붙잡고 있어. 아가야, 보고 싶구나. 바보처럼 보고 싶구나.

눈을 녹이듯, 간호사 이모는 엄마 배 위에 젤을 바르고 의사선생님은 그 위에 기계를 댄다. 기계를 움직이자 시커먼 우주가 화면에 나오고 하얀 은하수 사이로 아가야, 네가 보여. 네가 여기 있었어. 아빠는 바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해. 여기에 네가 있구나. 입술과 코가, 귀와 입이 있구나. 심장이 뛰고 있구나. 엄마를 괴롭히는 발이 있구나. 발가락도 있구나. 앙증맞은 엉덩이도 여기 있네. 있구나, 네가 있어. 나는 네가 있다는 사실 그대로가 좋아서, 그걸 가슴 깊이 새겨두기 위해 또다시 조각칼을 꺼낸다. 얌전하고 끈질긴 석공이 돼 아가야, 너를 본단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속에 아가야, 네 모습을 담고 싶으니까. 의사선생님이 뭐라고 말을 하는데, 사실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아. 아빠가 바보라 그런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엄마는 몹시도 기뻐했단다. 평균에서는 벗어났지만 어쨌든 정상 범위에 있다고 하니 무척 상냥하고 기쁜 말이었지. 목덜미가 두터운 건 아빠를 닮았나봐. 허벅지가 짧은 건 엄마를 닮았서이겠지. 그렇다고 우리 딸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날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 이상하다. 얼마 전까지는 네가 무엇으로 태어나든 모든 사랑을 다 줄 것이라 엄마와 아빠는 당연한 다짐을 했는데, 그래 아가야, 어른들은 원래 이렇게 약해. 약해서 거짓말을 자주 하지. 초음파실에서 나와서 물색없이 우리는 복도에서 포옹도 했어. 엄마의 우주 같이 커다란 배와 아빠의 살이 쪄 커다래진 배가 닿아서 엉뚱하고 어색한 포옹이 됐지만. 아직 녹지 않은 눈을 조심스레 밟고 주차장으로 갔단다. 역시 우리는 손을 꽉 붙잡고 있었어. 엄마가 눈길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배 안에 너를 담은 우주가 있거든. 엄마는 허리가 아팠어. 아가야, 네가 엄마 배 앞 쪽으로 등을 대고, 엄마 등 뒤 쪽으로 팔다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괜찮아. 유니크하다고 생각해. 역시 내 아가. 그 사이 아빠의 작은 차 위에 눈이 보드랍게 쌓여버렸지만 훌훌 털고 갈 수 있어. 콧노래를 부르면서.

엄마와 아빠는 식어가는 캔 커피를 하나씩 들고 기숙사 앞에 잠깐 서 있었지. 헤어지기 싫었나봐. 어서 들어가라는 듯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아빠는 맨손으로 엄마 몸에 붙은 눈을 털었어. 엄마의 머리카락과 어깨에, 도톰한 스웨터 카디건이 감싼 체온으로 인해 반쯤 녹은, 그러나 녹기를 끝내 저항하고 있는 눈이 바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야. 이토록 춥고 동시에 이토록 아름다운 날이 있다니. 나는 믿기지가 않아 눈을 한 줌 먹어보았지. 이가 시렸어. 기숙사로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오래 보고, 매너 있게 끝까지 남아 손을 흔들었어. 전화가 왔어.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 다시 전화를 하는 네 엄마였지. 그런 시절도 있었단다. 나는 손이 시려서 얼른 끊었어. 방금까지 같이 있었잖아? 아, 추워, 추워 죽겠네, 뭐가 이렇게 추워, 이제까지 나오지 않던 대자연에 대한 불평불만이 입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어. 엄마와 떨어지니까 자연스레 짜증이 나더구나. 동시에 잠시 멈췄던 눈이 다시 펑펑 내리더구나.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지상에 차례차례 내려앉는 눈이 말을 건네는 것 같아. 오늘도 잘했다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길, 녹을 줄 알면서도 세상에 내려오는 눈처럼.

아가야, 너를 기다리는 겨울이야. 겨울이 끝날 무렵 너는 오겠지. 정해진 시간에 따라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최선을 다해 저벅저벅 오겠지. 아가야, 나의 아가야.

겨울을 거의 다 보낸 2월의 어느 날, 아가가 세상에 왔습니다. 태어나서 아이가 맨 처음 한 일은 인큐베이터에 실려 구급차를 타는 것이었죠. 저는 아이를 따라 난생처음 사이렌 소리 요란한 구급차에 탔습니다. 멋지게 드라이브를 하는 것으로 삶을 함께 시작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아이는 염색체 수가 하나 더 많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왔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고 태어났다는 듯이, 방긋방긋 잘 웃는 아이가 지금 곁에서 곤히 잠에 들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할 계절이 지구와 달처럼 한 바퀴를 마저 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겨울이 오면 바퀴가 원을 하나 그릴 것입니다. 저는 어쩐지 이제 겨울이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눈이 오면, 셋이서 밟을 것이 생기니까요. 녹을 줄 알고 내리는 눈처럼, 최선을 다해 행복하자고 약속해봅니다. 다가올 계절처럼 명백하고 순백한 일입니다.

[프런트 에세이]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프런트 에세이]시인 서효인의 너를 기다리는 겨울

편집후기
지난봄이었던가, 신문을 보다가 조금 울었다. 2주에 한 번씩 연재하는 시인의 칼럼을 읽던 중이었다. 한 달 전 딸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야구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야구팬답게 아이가 크면 방긋방긋 웃는 아이를 안고서 야구장에 갈 거라는 계획을 전하고 있었다. 물론 좋아하는 팀의 유니폼을 같이 맞춰 입고서. 만약 그곳에서 자신들을 만나게 되면, 조그마한 아이의 볼을 쓰다듬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시인의 딸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 여름, 아빠의 목말을 타고 잠실야구장에서 그라운드를 가득 메운 함성에 온몸이 부풀어 오르다가 웬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 볼을 꼬집고 가는 어리둥절한 날들을 맞게 되겠지. 생각해보니 괜히 마음에 둥둥 북소리가 나는 듯해서 눈만 일부러 힘주어 깜빡거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염색체 수가 하나 더 많게 태어난 아이에게 시인은 “너의 에이스가 되어줄게”라는 약속을 했다. 아이는 이제 아빠의 손을 잡고 일어서고, 걷고, 뛰고 그리고 세상 속에서 즐겁게 게임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져대니까. 게다가 남보다 조금 아프게 태어났으니 다소 더디고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도, 세상도, 아이와 함께할 것이라고.

담담한 그 단어가, 갈고리처럼 가슴을 턱 내리찍었다. 그 말을 꺼내놓을 수 있기까지,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많은 감정의 터널들을 통과해야 했을까.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나에게는 그 하나하나를 함부로 도려내 짐작해볼 만큼의 용기가 없다. 제대로 이해할 자신조차 없다. 다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아이를 품고 낳기까지 40주가량의 시간 동안 함께 마음의 파동을 나누면서 키워왔을 생명. 그 생명에게 느끼는 벅찬 감정만큼은 언제나 진심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사람과 사람은 함께할 수 있음을 믿는다.

서효인 시인은…
198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2006년 계간 「시인세계」로 등단했고, 2010년 첫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을 펴냈다. 2011년 두 번째 시집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으로 ‘낯선 것이 낯익은 것에 닿고, 가장 낯익은 것이 가장 낯설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게 했다’라는 평과 함께 제 3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현재 동인 ‘작란(作亂)’에서 활동 중이다. 또 문학인 야구팀 ‘구인회’의 포수로도 활약하며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라는 에세이도 펴냈다.

■진행 / 이연우 기자 ■글 / 서효인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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