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에세이]시인 박준의 취향의 탄생](http://img.khan.co.kr/lady/201311/20131101171758_1_front_ess1.jpg)
[프런트 에세이]시인 박준의 취향의 탄생
유년을 보낸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이야기도 조금 하고 싶다. 서울의 변두리 동네답게 군사보호지역에 개발제한구역, 거기에 북한산국립공원으로 묶여 있던 곳이었다. 다른 서울 동네에 비해 집값이 만만했던 터라 가난한 어머니와 가난한 아버지는 이곳에 자신들의 집을 구할 수 있었고,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나 20년을 내리 살았다.
앞서 말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탓에 번화가에 있던 학원이나 태권도장 같은 곳을 다니지 못한 내가 가장 즐겨 한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북한산의 봉우리들을 눈에 담아두는 일이었다. 방 안에서도 족두리봉과 비봉과 먼 향로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집이었다.
책상에 앉아 희고 너른 암벽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그것이 꼭 도화지 같기도 하고 칠판 같기도 해서 나는 눈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혼자 좋아하던 같은 반 여자아이의 이름을 쓰고 지울 수 있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나는 바위가 아니라 노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기와 편지 형식이었지만 나중에는 산문과 시로 변했다. 당연히 내 학업의 진로 또한 낯선 학문이 아닌 ‘글’과 관련된 것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학을 배우러 간 대학에는 다행히도 나 같은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매일매일 안주도 없이 서정주와 이성복과 기형도 같은 시인들의 이야기를 하며 찬 소주를 마셨다. 열정과 치기로 가득했으나 유난히 입이 어렸던 날들이었다. 예쁜 신입생 후배에게 “시란 말이지……”, “선배 때는 말이야……” 하고 낮은 목소리로 운을 떼며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각자의 ‘흑역사’들을 만든 것도 이 시기였다.
문제는 군대에 다녀온 후 친구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누구는 편입학원으로, 또 누구는 인턴사원으로, 또 누구는 토익학원으로 떠났다. 물론 나는 한 번도 그 친구들을 원망하거나 배신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아니, 오히려 부러워했다. 다만 모험을 싫어하는 성격상 나는 지금껏 해오던 시 쓰기를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의 계획을 세울 용기가 없었다. 다시 혼자였지만 홀로 무엇을 하는 일이 지극히 익숙한 일이라 그나마 위안이 됐다.
몇 해 지나 나는 평소 좋아하던 문예지를 통해 등단을 했다. 물론 등단을 했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골방에서 쓰고 읽던 시를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서른이 조금 넘은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20대의 시간들을 온전히 글쓰기에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인생의 모험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앞으로 ‘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 할 삶이 얼마나 힘겨울 것인지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
대개의 사람들은 ‘시인’을 만나면 처음에만 막연한 호기심을 보일 뿐, 그 호기심이 다하면 잊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시인인 나를 사랑해주는 애인은 간혹 있었지만, 시인인 사위를 곱게 봐줄 장모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인’을 마치 무슨 벼슬이나 지위에 오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시는 돈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에 따르면 91.5%의 문인이 한 달에 1백만원 미만의 돈을 번다고 한다. 물론 문인들은 이미 현실적인 욕망을 미적이고 문학적인 욕망으로 대체해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만약 시가 돈이 되는 사회였다면 세상물정에 밝고 영리한 사람들이 시를 쓴다고 몰려들었을 것이고, 또 자본의 당연한 이치처럼 돈이 되는 시인에게만 시와 독자가 따라다녀 결국에는 시라는 장르가 모든 상영관을 흥행작에 올인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획일화됐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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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에세이]시인 박준의 취향의 탄생
신기한 것은 낯설고 새로운 환경을 싫어하는 내가 직장을 옮길 때만큼은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정적으로 잘 다니던 직장을 문득 그만두고, 함께하던 일상적인 삶까지 한순간에 뒤엎어버리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난 후면 나는 어김없이 책과 노트북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더없이 정적이고 모험을 싫어하는 내 성격을 바꾼 것이 바로 이 여행이다. 물론 처음 나의 여정들은 내 성격을 꼭 닮아 있었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의 여행은 가평과 양평과 청평이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대성리나 강촌은 볼 것이 없어’ 하고 의기양양해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학한 후 오래된 중고차를 한 대 구하고 나서는 안면도를 그렇게 다녔다. 잘 알려진 꽃지해수욕장과 방포해수욕장은 물론이고 인적이 드문 두에기해수욕장까지…. 여행을 가면 꼭 자는 숙소에서만 자고, 먹어본 적 있는 식당에서만 음식을 먹고, 같은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낯선 곳에서 구태여 익숙함을 찾아내 그 감정을 즐기던 때였다.
하지만 이후 점점 새로운 여행의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새로운 취향이라는 것이 주로 음식과 미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섬진강에 봄이 오면 하동의 재첩국과 수박 향이 은은히 번지는 구례의 은어를 접했다. 여름에는 신안의 민어와 흑산도의 홍어, 가을에는 포항의 과메기와 서천의 박대를 즐겼다. 겨울의 영월 곤드레와 수안보 꿩고기, 서귀포의 방어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미각의 취향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많은 여행들을 할 동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미각 다음에 생기는 취향은 시각이었다. 봄을 맞은 통영의 동백섬과 여름이 머무는 고성의 화진포 그리고 가을 제주의 비자림과 용머리해안 겨울 철원의 고석정 등을 비롯한 전국의 많은 곳들을 어떤 계절 그리고 어떤 시간에 찾아야 눈앞에 선경(仙境)이 펼쳐지는지 나는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소 익혔다.
미각과 시각 다음에 생긴 여행의 취향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여행지에서 사람을 가려 만나고 사귄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따라 떠나는 여행지가 달리 정해진다는 말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좋은 술안주가 많은 동해는 친구들과 가기 좋은 곳이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산 집과 비교적 가까운 서해는 부모님과, 바람과 볕이 좋은 남해와 제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기 좋은 곳이다. 나는 특히 남해 중에서도 통영을 사랑했는데 통영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으레 시를 쓰기도 했다. 아래의 시도 그중 한 편이다.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 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졸시, ‘마음 한철’ 전문
통영을 사랑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마음으로 한철을 함께 보낸 애인도 통영을 사랑했다. 시인 백석과 박재삼과 청마 유치환도 통영을 사랑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많은 미인들이 통영을 사랑했을 것이다.
통영을 두고 백석은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 말했고, 박재삼은 통영의 작은 섬들과 돛단배를 각각 “화안한 꽃밭과 “흰 나비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통영에서 나고 자란 청마 유치환의 사랑 이야기 또한 우리를 즐겁게 한다.
1947년 마흔 살의 유치환은 통영여중 교사로 갓 부임한 한 여교사에게 반해 하루도 빠짐없이 통영우체국에 들러 러브레터를 보냈다. 1967년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그가 보낸 편지는 약 5천 통에 달했다. 재미있는 것은 유치환이 매일 들러 우편을 보낸 통영우체국 바로 건너편 이층집이 그 여교사가 사는 집이었다는 것이다.
통영 이야기에서 도다리 쑥국이 빠지면 아무래도 허전하다. 봄이 제철인 도다리 쑥국은 쌀뜨물에 된장과 소금만으로 간을 맞춘다. 쑥은 도다리가 완전히 익은 후에 넣어야 하는데 일찍 넣으면 향도 사라지고 식감이 질겨지기 때문이다. 맑은 탕이나 국보다는 붉은 찌개를 좋아하고 쑥을 그토록 싫어하는 내가 도다리 쑥국을 즐기는 것은 시원한 맛과 더불어 어떤 금기를 깨는 쾌감을 느낄 수 있어서이다. 유난히 비린 것을 먹지 못했던 당시 나의 애인도 이 도다리 쑥국만은 한 그릇을 다 비우며 멋쩍은 듯이 내게 웃어 보인 적이 있다.
다시 봄이 오면 나는 병(病)을 앓을 것이다. 하던 일을 제쳐두고 통영에 가려 하는 병. 따지고 보면 병도 내 삶의 취향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통영이 아니더라도 나는 한 번 여행을 간 곳이라면 다시 그곳을 찾는 취향을 갖고 있다. 아무리 실망했던 여행지라 해도 그렇다.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말을 떠올려도 좋겠고 여전히 소심한 마음이 만들어낸 걸음이라 해도 좋겠다.
내가 다시 찾은 그 ‘여행’지에서 내내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안도감이다. 이 안도감이란 왠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불안해했던 처음 ‘여행’ 때의 생각을 보란 듯이 부정하는 것에서 온다. 또 이제 두 번째이니 이번이 마지막이 돼도 크게 아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도 온다.
물론 ‘여행’이라는 말 대신 ‘사람’이나 ‘사랑’ 혹은 ‘연애’라는 말을 넣어도 뜻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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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에세이]시인 박준의 취향의 탄생
언제부턴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계절을 앓는다. 가벼운 몸살이나 컨디션 저하를 겪기도 하고, 며칠씩 이유 없이 가슴이 아려와 아무도 몰래 일상을 조금 벗어나기도 한다. 때론 스치듯 훑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지난 계절 치열하게 살아서 몸과 마음의 면역력을 잔뜩 끌어다 썼다면 더욱 끙끙 뜨겁게 앓아야 한다. 아프고 힘들긴 해도 사실 이 시기를 조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다. 아직은 어느 쪽도 아닌, 온 세상이 차츰 새롭게 옮아가는 시간 혹은 물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아서다.
몇 번의 특이한 기상 현상이 나타나고 공기의 커다란 일렁임과 그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것들의 뒤척임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이미 간절(間節)에 들어선 것이다. 한 계절이 지났다는 것은, 다시 말해 무사히 한 철을 살아냈다는 뜻. 철을 겪으며 부지런히 이야기를 만들었고, 높이 뛰어올라보려고 애쓰기도 했고, 미끄러져 떨어진 적도 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지만 먼 훗날 돌아보면 중차대한 의미를 지닐 무언가가 시작됐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오고 갔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철을 겪는 만큼 우리는 철이 들 것이고, 그렇게 매 계절 무늬를 새기다 보면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란 위안이다.
구구절절 설명이 길지만 어쨌든, 요즘이 바로 새로운 계절이 완성돼가고 있는 바로 그 시기라는 거다. 정신없이 지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붉은 기운 가득한 하늘이 저 멀리 도망가 있어 조금은 놀랐다. 곧 스산한 바람이 마음을 두드리겠지. 이미 늦은 듯하지만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간절의 홍역을 조금이라도 덜 치르기 위해서.
때론 간혹 징후가 심상치 않음이 예견될 때가 있다. 지난 계절, 누군가 커다란 못을 박았던 자리가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파상풍이 의심된다거나 하나씩 고이 모아두었던 보물들이 따뜻한 햇살에 녹아버릴지 모른다는 따위의 불안감이 들 때, 이번엔 툭툭 손 털고 보통의 날들로 복귀하기까지 꽤 오래, 그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싶어지면 나름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한동안은 그 특효약 중 하나가 떠나는 것이었다. 럭셔리한 휴가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떠나는 것. 지금이 아니면, 그곳이 아니면, 그 사람이 아니면, 그러한 상황에서 즐기고 느낄 수 있을 것. 그렇게 종종 떠난 곳에서 다음 계절을 살아낼 동력을 얻어 돌아오곤 했다. 아무래도 낯선 공간, 새로운 풍경이 주는 자극이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삶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켜봤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조금은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 해소됐기 때문일지도. 여하튼 그런저런 이유로 이따금 떠나기도 했는데, 다만 나는 한 번 가본 곳은 웬만해선 다시 가지 않으려는 편이었다. 특히 함께했던 누군가가 있었다면 반드시 그랬다. 사실 풍경이 그 사람의 장면으로 남을까 봐 그리고 계속해서 그 장면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어쩌나 조바심 내며 지내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한 한 번만으로 그곳을 기억에 박제하고 또 가능한 한 혼자 다니면서 스스로 마음껏 편집이 가능하도록 저장해뒀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그저 붙들고만 있는 잔영들이 어지간하다.
박준 시인이 보내온 글을 읽다가 잊어버렸던, 잊었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을 꺼내보았다. 너른 바다를 안고 있는 곳, 통영에는 동백이 피어 있었다. 이제껏 봤던 동백나무 중 가장 큰 아름드리 나무였다. 동백꽃을 좋아하는 건, 그 처연한 느낌 때문이다. 꽃이라고 하면서 나릿나릿 흩날리지도 않고, 소담하게 드러내지도 않는, 어찌나 꾹꾹 안으로 다져 눌렀는지 뭉클하게 번져버린 감정이 빨갛게 맺혀버린 듯한. 하지만 질 때조차 질척거리지 않고 온전한 꽃떨기째로 툭 떨구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동백꽃.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피어난 진짜 동백꽃은 평소 자주 볼 기회가 없기에 온화한 통영에서 만난 동백은 더욱 반가웠고 한편으로는 괜히 서글펐다. 꽃이 피어 있던 충렬사 건너편 정자 근처에는 연모하는 여자를 생각하며 시를 썼던 백석의 시비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인생과 절대로 무관한 당신들도 있었다. 그즈음 겨울이 그토록 추웠던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은 통영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백석의 시를 읽었다는 거다. 그중에서도 ‘힌 바람벽이 있어’를 여러 번 읊조리면서 어찌됐든 ‘다 괜찮다’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하다 보니 당장이라도 통영으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바다도 보고, 회는 물론이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찾아냈던 마음에 쏙 드는 멍게비빔밥도 먹고 싶다. 영화 ‘하하하’를 따라 곳곳을 거닐어도 봐야지. 사실 예전에 몇몇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좀 더 나이가 들면 나와 삶의 방향을 같이하는 좋은 사람을 찾아서 남쪽 작은 도시에서 살고 싶단 생각을 많이 해왔다. 그 후보로 두 군데를 압축해뒀는데, 원래 그중 한 곳이 통영이었다. 애써 지우고 있었지만. 더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무척이나 추웠던 겨울의 기억을 덧입혀볼까 한다. 이번 목표는 별거 없다. 도다리 쑥국 한 그릇 먹어보는 거다.
시인 박준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8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고, 2012년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펴냈다. 이 첫 시집으로 ‘오래 묵고 삭힌 심상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현실적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진행 / 이연우 기자 ■글 / 박준 사진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