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상사뱀,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들었던 구수한 옛날이야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되던 그 많던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라져가는 우리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신동흔 교수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매달 한 편씩,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슬픈 일이 무엇일까?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 뜻을 이룰 수 없을 때의 가슴 저림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죽어서도 한을 품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말이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전하는 옛날이야기들이 있다. 일컬어 ‘상사병’에 대한 이야기들. 상사의 마음을 병처럼 품고 있다가 죽은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될까. 그들은 그냥 말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마음은 무엇인가가 돼 남는다. 무엇이 되는가 하면, 꽃이 되기도 하고 바위가 되기도 하며 또 뱀이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경우마다 사랑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이다.
한 여인을 간절히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었다(젊은 스님이 여신도를 사랑했다고도 하고, 남동생이 누나를 사랑했다고도 한다). 병이 된 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로 죽은 남자는 한 그루 꽃나무가 됐다. 그 절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여자도 환생해 같은 꽃이 됐다. 같은 꽃나무에서 여자는 꽃이 되고 남자는 잎이 됐으니 이제 내내 함께할 수 있게 됐구나 했지만, 그건 헛된 바람이었다. 남자가 잎으로 피어나 아무리 기다려도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잎이 다 지고 나서야 꽃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둘은 한 그루 꽃나무가 되고서도 끝내 서로 마주볼 수 없었다. 잎이 다 지고 나서 꽃이 피는, 그 슬프고 예쁜 꽃을 사람들은 상사화(相思花)라 부른다.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꽃으로 변해 환생한 사연이다. 그 꽃은 바로 이름도 아련한 상사화. 죽어서도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니,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그 사랑으로 피어난 상사화가 무척이나 곱고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루지 못한 사랑이지만 한 떨기 예쁘고 아련한 꽃으로 피어났으니 저 사랑 허튼 것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꽃을 보면서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에 공명해주는 터이니 어느 정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상사화에 비하면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은 더 쓰라리고 먹먹한 데가 있다. 상사바위 전설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이야기된다. 남몰래 사랑하던 남녀가 그 바위에서 밀회를 했다고도 하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야기는 누군가를 짝사랑하던 사람이 그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로 죽어서 바위가 됐다고 하는 것이다. 해서는 안 될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죽어서 바위가 된 사람. 그가 왜 바위가 됐는가 하면 사랑을 가슴속에 돌덩이처럼 꾹꾹 눌러서 간직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산 채로 이미 바위가 됐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생각하면 가슴 먹먹한 일이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여인이 돌이 됐다고 하는 ‘망부석(望夫石)’ 전설도 같은 계통의 이야기다.
옛이야기에서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가장 많이 되는 것은 꽃도 아니고 바위도 아니고 뱀이다. ‘상사뱀’에 관한 전설은 전국적으로 무척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가 죽어서 뱀이 되는가 하면 마음속에 뱀처럼 꿈틀거리는 욕망을 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을 어떻게든 한 번 품어보고 싶은, ‘내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욕망이 징그러운 뱀으로 화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흔히 그 뱀이 사랑하던 사람의 몸을 감고 떨어지지 않았다고도 하며, 눈물을 받아먹으면서 괴롭혀 결국 상대방이 말라 죽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상사뱀이 된 사람이나 상사뱀한테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나 참 안 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토킹’이 연상돼 소름이 끼치는 면도 있다.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사뱀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도 있다. 이야기는 그들 대부분이 상사뱀을 감당하지 못해 안 좋은 결말을 맞았다 하니, 애정이라는 이름의 욕망이나 집착에 대처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비극적 결말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다. 그와 다른 길을 갔던 사람이 있었으니, 누구인가 하면 바로 구국의 명장 이순신이다. 이야기 속의 이순신은 자기 때문에 상사뱀이 된 여인에게 어떻게 했을까.
이순신이 젊은 시절 공부를 할 때였다. 어느 날 낯선 시골 사람이 그를 찾아오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나한테 과년한 딸이 하나 있는데 그대가 길을 지나는 걸 훔쳐보고 상사병에 걸렸지 뭐요.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고 있는데 그대를 한 번 만나보는 게 소원이라 합니다. 내일 우리 집에 와서 우리 딸을 만나줄 수 있겠소?”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자기 때문에 죽어간다니 황당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소원이라는데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정 그렇다면 제가 내일 잠깐 건너가도록 하지요.”
이순신이 이렇게 말하자 그 사람은 고맙다고 거듭 사례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이순신이 약속한 대로 그 집을 찾아가려 하는데, 밤사이에 내린 큰비 때문에 물이 불어나서 아무리 해도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결국 이순신은 하루를 지체한 뒤 그 다음날이 돼서야 처녀의 집에 이를 수 있었다. 서둘러 그 집에 다다랐더니만 처녀의 아버지가 상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늦었소이다. 어제 내내 기다리다가 그만….”
그러면서 방 안을 가리키는데 문득 살펴보니 여자가 죽어서 큰 뱀이 돼 있는 것이었다.
“다 자기 운명인 걸 어쩌겠소. 그냥 집으로 건너가보구려.”
그러자 이순신은,
“그래도 저 때문에 저렇게 됐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더니 문을 열고서 뱀이 있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가 앉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방으로 들어가자 뱀은 그한테로 다가와 몸을 칭칭 감았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이순신은 뱀이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몸을 맡겨두었다. 한밤 내내 이순신의 몸을 감고 있던 뱀은 다음날 아침이 되자 스르르 몸을 풀더니 물속으로 깃들어 용이 됐다. 그 용은 뒷날 이순신이 장군이 돼 왜군과 싸움을 할 때 그를 따라다니며 도와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위인전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최고의 신화적 존재가 된 민족의 영웅이다. 하지만 지금 내 안에 가장 강력하게 깃들어 있는 이순신의 형상은 바로 이 이야기 속의 저 청년이다. 뱀이 도사리고 있는 방으로 성큼 들어가는 저 사람.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그만일 범람한 욕망을 따뜻이 품어 안으며 ‘인참’을 전해주는 저 사람. 그러자 저 뱀은 용이 되는 것이었다. 집착의 욕망은 고귀한 사랑이 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설화에서 만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세상의 사랑 가운데 서로 마음이 술술 통해 아무 걸림돌 없이 잘 풀려서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이 얼마나 될까. 엇갈리고 부대끼는 가운데 갈등과 고통을 낳는 사랑이 아마도 더 많을 것이다. 그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은 ‘밀치기’보다는 ‘감싸기’라는 것. 그것이 우리 옛이야기가 전하는 사랑의 철학이다.
이야기꾼 신동흔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나라의 민담과 신화, 설화 등 사라져가는 옛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민담전집1 한국 편」, 「살아 있는 우리 신화」,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등이 있으며, 그의 홈페이지(www.gubi.co.kr)를 통해서도 다양한 우리 옛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신동흔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