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것은, 뽁씽(Boxing)에 대해서다. 그러자면 비탈리 클리츠코(우크라이나 출신 권투선수로 WBC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다. 2005년 정계에 입문해 정치 활동을 펼치고 있고, 최근에는 친러 정책을 펴는 현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며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주목받고 있다-편집자 주)로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유권자 여러분, 오늘 집권 여당 의원들의 직접적인 지원과 관계 법령의 비호 아래 국회에서 이루어진 이 모든 더러운 조작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이중 어느 것도 저를 겁주거나 멈춰 세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겠습니다. 유력한 후보자로서 저를 견제하려는 이 다종 다기한 계획과 시도들을 잘라내기 위해, 저는 지금 선언합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습니다.”
이것은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의 국회의사당에서 제2야당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민주동맹(UDAR)’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대권 도전을 선언하던 비탈리 클리츠코의 말이다.
대권 도전 그 자체가 대단할 것은 없다. 우리나라만 해도 IQ가 430쯤 되거나 눈빛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도전하곤 하는 게 대권이니까. 더군다나 그렇게 애써서 얻은 대권 가지고 한다는 짓의 면면을 보고 있자면 참….
각설하고, 그렇다면 무엇이 대단하단 말이냐. 대단한 것은 바로 우크라이나다. 동쪽으로 러시아, 서쪽으로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에 인접해 있는 우크라이나는 바이킹족과 슬라브인들이 세운 첫 국가인 키예프 공국을 그 시초로 한다. 주변을 맷집 좋은 대국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데다 왕국이 아닌 공국(公國)으로 시작했으니, 짐작하듯이 나라 팔자가 예사롭지 않다. 13세기 칭기즈칸의 유럽 정벌로 처음 나라가 갈라져 나간 이후로, 폴란드가 뜨면 폴란드에게 먹히고 폴란드가 저물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분할당하는 수난을 거듭하게 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며 동우크라이나와 서우크라이나로 분리 독립을 이뤄내고 1920년에는 격변하는 정세를 틈 타 동과 서의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짧은 통일을 이뤄내지만, 이내 구심점을 잃고 고작 2년 만에 다시 폴란드와 옛 소련 연방의 영토로 분할 귀속된다.
홀로코스트(대학살)에 가려 우리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진 ‘홀로도모르(대기근)’의 비극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다. 홀로도모르란, 옛 소련 연방 흡수 이후 꾸준하게 결속돼 나가던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압살하기 위해 스탈린이 실시한 인위적인 기아정책 그리고 그로 인해 8백만 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국민이 아사에 이르게 된 사태를 일컫는 말이다. 대명천지의 길거리에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한 당시의 사진 자료들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결코 홀로코스트에 뒤처지는 참사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1932년에 추진된 이 그악스러운 압살 계획에 더해,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우크라이나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고, 1939년 당시 4천1백만 명에 이르던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1945년에는 2천7백만 명으로 대폭 감소한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한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지방 장악력 감소로 1991년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우크라이나는 그야말로 비탄의 현대사를 겪어내야만 했다.
동북아시아 현대사의 대표 ‘호구’였던 우리 입장에서 보더라도 애잔한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요약해놓고 보면 남 일 같지가 않고 ‘어찌 살았을까’ 싶어 가슴 한편이 에이지만, 다른 체제를 짓밟고 군림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체제를 지속해온 깡패 열강들에 비하자면 부끄러울 게 없는 것이 또한 우크라이나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는 오랜 시간 염원해왔던 독립을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냈다. 그런 만큼, 웅크렸던 가슴을 좀 펴고 독립국으로서의 기개를 펼쳐볼 만한 21세기-바야흐로 탈냉전의 시대가 도래했건만- 2014년 정초의 우크라이나 사정을 살펴보면 그게 또 여의치 않아 보인다는 게 문제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는 세밑 정초부터 날마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해 12월 11일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지금 내가 원고를 쓰고 있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6주째를 넘어가고 있다.
이슈는 이렇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과 경협을 논의 중이었다. 협정이 체결되면 유럽연합과 우크라이나 사이의 관세 95%가 없어지고 국가 간의 왕래도 한결 자유로워져 향후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초석도 놓을 수 있는 알짜배기 협상이었다. 같은 처지의 옛 소련 연방 국가들인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가 이미 우크라이나에 앞서 유로존에 가입했거나 가입 예정에 있던 터라 자국 여론도 협상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협상의 우위를 어떻게 점할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던 차였다. 유럽연합에 하나둘씩 ‘빵셔틀’을 빼앗기는 데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가 ‘가스를 잠그기’ 전까지는.
앞서 살펴본 여하한 현대사의 곡절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현재까지도 석유,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를 러시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실정이다. 체제의 독립은 이루었으나 체제 운영의 독립까지는 이루어내지 못한 셈이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경제협약을 체결할 기미가 보이자, 러시아는 지난 8월 우크라이나 제품 수입을 전면 중단하고 나아가 우크라이나로 나가던 천연가스 공급마저 중단할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하반기에만 약 2조6천5백억원가량의 손실을 입게 되고, 압박을 견디지 못한 우크라이나 정부는 11월 21일 유럽연합과의 협정 진행을 전격 중단하기에 이른다. 시위가 당겨지는 순간이었다.
시위가 장기화되고 시위 군중을 폭력 진압하는 정부의 공권력에 대해 국제사회의 여론이 비판적으로 흐르는 데 부담을 느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천연가스의 가격을 3분의 1로 내리고 1백50억 달러 상당의 우크라이나 정부 채권을 구입하겠다는 유화책을 들고 나오며 대오가 조금 주춤하는 모양새라고는 하지만, ‘홀로도모르’부터 축적돼온 우크라이나 민중의 분노는 지금도 수도 키예프 중앙 광장의 레닌 동상을 끌어내리고 망치질로 분쇄시키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전 WBC, WBA, WBO 헤비급 세계 챔피언인 ‘철권박사(Dr. Iron Fist: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클리츠코의 별명이다-편집자 주)’ 클리츠코는 바로 이 대대적인 민중 궐기의 선봉에 서 있다. 푸틴의 유화책이 흘러나온 뒤 다른 야권 진영이 관망세로 돌아서는 와중에도 클리츠코와 그가 이끄는 정당은 외려 국민 총파업의 깃발을 내세우며 투쟁의 피치를 높여가고 있다.
불과 2년 전인 2012년 9월 8일, 자신보다 열세 살 어린 독일의 마누엘 차르에게 4라운드 2분 4초 만에 TKO승을 거두고 WBC 9차 방어전에 성공한 후, 완전한 정치가로서의 변신을 선언하며 타이틀을 반납한 이 거구의 챔피언이 천재일우의 정치 투쟁을 발판 삼아 정말 조국의 지도자로 설 수 있을지는 물론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또 러시아와의 완전한 결별과 유럽 시장으로의 전면적인 진입을 외치는 그의 정책 노선이, 혹여 이미 세계 곳곳에서 병리적 후과를 드러내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선 역시 정치인 클리츠코가 이겨내야 할 숱한 도전 중 하나일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챔피언을 향한 나의 정념은 자연스럽게 아직 신제품의 윤기가 다 빠지지 않은 빽글러브를 낀 채 속절없이 섀도복싱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내려앉는다. 나는 왜 권투를 하는가. 샌드백도 마음대로 못 때리면서.
그 사연은 이렇다. 지금은 여하한 사정으로 영화를 그만두고 울산에서 번듯한 사업을 하고 있는 나의 10년지기 L은, 한 시절 함께 영화를 꿈꾸었던 시네키드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산적 같은 외모에 걸맞지 않은 형광 초록의 머리를 하고 나타나 지금은 단종된 그린 소주를 병째 들고 마시던 첫인상이 무척이나 압도적이어서 이후 통칭 ‘그린’으로 불렸던 L이 영화보다 사랑하는 단 하나의 예술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권투였다.
초기에 휘청거리던 사업을 몇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한 끝에 간신히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서 몸이 근질근질해진 L은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 울산엔 언제 내려올 거냐고 떼를 썼다. 영화 중에서도 선혈이 낭자한 고어 취향의 영화를 만들던 놈이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나 쳐다보고 있자니 오죽하겠는가 싶어 업무차 자주 오가던 부산 일정이 있을 때마다 가급적이면 울산에 들러 L과 소주 한 잔을 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것이 어느새 일정한 패턴이 됐고, 그때마다 L은 나에게 권투 영웅들의 일대기를 마치 제 이야기인 것처럼 들려주곤 했다. 실제로도 L은 꽤 쓸 만한 실력의 아마추어 헤비급 복서로서 회사 인근 복싱 도장의 노후한 링을 새 것으로 교체해주는 조건으로 평생 무료 회원 자격을 얻기까지 했으니, 이쯤 되면 단순한 애호를 넘어 가히 애욕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문제의 그날도 시작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때가 됐는데 어째 장편을 찍지 않고 있느냐고 채근하는 L에게, 마침 시나리오가 잘 안 풀리던 터라 “때가 되면 알아서 잘 찍을 테니 걱정 말라”라고 쏘아붙인 것이 빌미가 돼 옥신각신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내 천성에 사람 약 올리는 기질이 있어서 한번 논쟁 양상이 되면 장난이라도 웬만하면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나의 비아냥 공세에 은근히 부아가 오른 L이 그럼 다 관두고 스파링이나 한판 하자고 한 것을 내가 그만 덥석 받아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주워 담았으면 체면 한 번 구기고 말았을 일이 커져서, 한달음에 구체적인 스파링 날짜까지 정해지고 말았다. L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틈만 나면 자신의 훈련 동영상을 보내며 전의를 끌어올리고 있다.
어떻게든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기준을 설득시켜야만 하는 장편 시나리오에 대한 걱정과 L이 보내온 동영상 속의 무시무시한 라이트 훅에 대한 공포로 섀도복싱의 스텝이 꼬여갈 무렵, 도장 에이스의 펀치를 미트로 받아내던 관장의 고함 소리가 다시 한번 어떤 ‘시적 상태’에 올라선다.
“뽁씽은 결국 체력이얌마. 빤찌가 암만 쎄도 헛치는 게 많으면 지치는 게 인간이라고. 휘두르면 다 빤찌야? 아니얌마. 가서 꽂혀야 빤찐 거얌마.”
그렇다. ‘뽁씽’도 영화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체력이다. 자꾸 헛치면 지친다. 휘두른다고 다 ‘빤찌’가 아니다. 가서 꽂히는 것만이 진짜 ‘빤찌’인 것이다.
편집 후기
살다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각종 감정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끌려 다니기만 할 때가 있다. ‘내일과 다음 생 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라는 티베트 속담처럼 그 알 수 없음으로 인해 인생은 더욱 의미를 갖는다지만, 그만큼 막막하고 두렵고 떨리고 허무하고 때로는 서럽고 원망스러운 시간들 또한 꽤나 자주 존재한다. 세상은 야속하게도 자꾸만 나를 무릎 꿇게 만들고, 애정을 쏟았던 사람도 일들도 번번이 진심을 외면하고, 아니 그보다도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모순 덩어리’에 ‘엉망진창’인 나 자신과도 매일같이 그악스럽게 드잡이질을 벌여야만 되는 그런 날들.
평소 꽤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건물 꼭대기에 그런 게 있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던, 꼬질꼬질한 느낌의 체육관을 발견한 날도 그러한 시기였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되겠다는 확신은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알 수 없는, 마냥 지치기만 한 상태. 터져나갈 것만 같은 감정 범벅에서 어떻게든 탈출해볼 요량으로 역시 갑작스러운 실연으로 분노와 우울의 습격에 시달리고 있던 친구와 의기투합해 체육관을 찾았다. 정통 복싱을 가르친다는 Y체육관. 어려서 그랬는지, 워낙 그때 시기가 그래서였는지, 아님 ‘뭐든 정석을 배워야지’라는 기본 신념 때문이었는지, 촌스럽고 허름한 그 도장이 마음에 들었다. 아래층 계단에서부터 땀 냄새로 가득한 그곳에서는 우리가 체육관을 그만둘 때까지 한 번도 크게 웃는 법이 없었던 무뚝뚝한 관장님과 비실대다가도 권투글러브를 끼는 순간 뭔지 모를 비장함이 넘쳐흐르는 (고작) 예닐곱 명의 회원이 거의 하루 종일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시종일관 ‘대체 너넨 뭐냐?’ 하는 표정의 그들과 함께 우리 둘은 나름 착실히 권투를 배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권투 배우러 왔지 줄넘기 하러 왔냐고요. 왜 만날 줄넘기만 시켜요? 빨리 뭐든 때리게 해주세요!”라고 관장님께 철없는 항의나 하며 설렁설렁 줄넘기를 하고, 성화에 못 이긴 관장님이 파격적인 진도로 편성해주신 덕에 스텝을 배우고, 눈빛만큼은 마치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는 선수같은 자신을 견디는 민망함을 참아가며 섀도복싱을 하고, 그렇게 무거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돌덩이처럼 단단한 샌드백을 겨우겨우 때려보다가, 마침내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사각의 링 위에 서기까지. 그 시간동안 대단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체력이 향상되고 생활에 활력도 생겼다. 외모와는 달리 마음 약한 관장님이 남자들에게와는 달리 우리가 “힘들어 죽겠어요” 한마디하면 “그럼 쉬든가”라며 ‘쿨’하게 돌아서셨기 때문에 비록 권투 기술은 크게 연마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아쉽지는 않다. 대신 한 단계 한 단계 진행되는 동안, 머리와 가슴속에 과부하 상태로 막혀 있던 것들을 토해낼 수 있었으니까. 어떤 것은 저절로 잊히기도 했고, 어떤 것은 자연스럽게 풀리기도 했으며, 또 어떤 것은 효과적인 해결 방법을 알아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들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떠오르기도, 세상이 나를 그리고 내가 세상을 인정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그 뒤로 사각 링을 떠올릴 때마다 아주 조금 용기와 오기 같은 것이 생긴다고나 할까. 비록 사는 것이 괴롭고 고달프지만, 맞는 것이 두렵고 아프지만, 그래서 더더욱 주먹을 내뻗고 자신을 잘 방어해야 한다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응원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싸워야만 하는 사람은 나이고, 어느 누구도 그 역할을 대신해줄 수 없고 다가와 도와줄 수도 없다는 것. 일단 종이 울린 이상 쓰러져 눕기 전까지는 그만둘 수도 없는 시합. 결국 우리 앞의 하루하루는 그런 경기의 연속일 것이다.
실제로 권투 경기는 종종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인생이란 링 위에 던져져 치열하게 삶과 맞서 싸우는 우리. 상대를 꺾기 위해서는 맞는 것을 감당해야만 하고, 쉬지 않고 움직이며 스스로의 주먹 하나만으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승리 뒤에도 계속해서 더 강한 상대를 만나고 맞붙고 싸우고 그리고 또 지켜내야만 한다. 세계적인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도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내면 깊숙이에 있는 소망, 꿈,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설령 챔피언의 영광 뒤 필연적으로 내리막이 따라온다 하더라도 굴곡진 생에서 헛치지 않고 끝까지 ‘빤찌’를 날리기 위해 쉬지 않고 발을 놀린다. 이것이 그 체육관에서 내가 온몸으로 얻어낸 배움이었다.
PROFILE 신이수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전문사 과정) 졸업 후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단편영화 ‘나를 떠나지 말아요(2006)’, ‘라라에게(2009)’, ‘너에게 간다(2012)’ 등을 연출했고, 지난해 최시형 감독의 영화 ‘경복’에서는 배우로 출연하는 등 다양한 재능을 선보이고 있다. 어느 이방인 여인의 사랑의 여정을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쓸쓸한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영화 ‘너에게 간다’로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 경쟁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2013년 12월 열린 39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최아름 감독과 함께한 단편영화 ‘이름들’로 최우수작품상을 받으며 인물들의 감정을 묘사해내는 섬세함이 탁월하다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진행 / 이연우 기자 ■글 / 신이수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