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

(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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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역 배우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하지만 과연 성인들도 버텨내기 힘든 환경에서 어린아이들이 잘 적응하며 진정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시선도 많다. 아역 스타 갈소원양의 외할머니 조은일 작가가 가까이서 바라본 현실에 대해 소신을 담은 쓴소리를 털어놓았다.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소원이 네가 배우로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가 다섯 살 즈음이었을 거다. 참 재미나고 즐겁게 연기한 적도 있지만 막상 영상 매체의 메커니즘을 접하니 우리 가족의 생각이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인지 답답할 때도 많았단다. 이건 사실 우리 가족이 영상이나 예술 분야에 나름 일가견이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모르면 갈등은 없었을 텐데. 물론 딱히 그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려 하거나 힘쓴 적은 없지만 저절로 그리 됐다고나 할까? 운명적이랄 수밖에 없겠지.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말하기로 하고, 어쨌든 전문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서 우리에게는 몇 가지 기준이 저절로 만들어졌지. 바로 소원이의 능력, 늦되는 너의 발달 상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가족으로서의 기준이라고 하면 되겠구나. 예를 들자면 나이에 비해 유독 어리고 늦돼서 혀도 아직 잘 돌아가지 않는 네게 주어진 대사가 무척 어렵고 난해한 경우에도, 앞뒤를 암만 봐도 꼭 필요한 대사도 아니건만 목숨 걸고 아이에게 그걸 주입해야만 하는 몰지각한 일도 많았지. 엄밀히 보자면 도무지 출연하고 싶은 경우(작품이라 하자)가 드물었단다. 이게 정말 현실적인 상황인지 가족(보호자로서)의 문제인지 길고 긴 갈등의 연속이다. 부조리하게 생각되는 어린이 대사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지금 봐도 지나치게 심오하거나 난해한 대사들 혹은 필요 이상으로 긴 대사들이 많지. 아이의 정서에 맞는, 정말 ‘아이다운’ 역할보다는 상업주의에 길들여진 어른 흉내 내기가 만연됐다고나 할까?

물론 어린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지. 너의 발달도 예측불허이긴 하다. 또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하게 어른 흉내를 잘 내는 아이들도 많아. 그래서 아이들은 저마다 그 나름 천차만별이기도 하고, 늦되는 네가 장족의 발전을 하기도 했지. 자고 일어나면 쑥쑥 크는 성장기이니까. 이 할미의 총체적 불만은 한 아이에 대한 개별적인 언어 능력조차 고려되지 않은 현실이라고 해두자. 대부분의 대사가 주로 아이가 되바라지게 반항하거나 따지고, 어려운 말을 써가며 악악대는 ‘애아줌마’ 같은 역할이잖니. 시청자들은 그걸 보면서 좋아하고, 그러면 또 시청률이 올라가고. 아역 배우들은 그걸 연습하는 동안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것만 같은데 말이야. 이걸 보며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우리 가족의 첫 번째 고민은 작품을 하는 동안 이 과정이 네 정서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는 것이었어.

그 결과, 비록 30초짜리 광고라도 거절해야만 하는 것이 많았단다. 안방 드라마는 인기가 높을수록 아역의 대사는 오금이 저리고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어. 놀랍고 되바라질수록 재미있다고 웃는 시청자들이 많고, 못 견딜 지경의 막장 드라마까지도 인기를 끄니까. 이 할미는 그저 먹여주는 대로만 받아먹는 시청자도 불만이고, 갈수록 심화되는 정서 파괴의 영상 매체들도 못마땅하구나. 가족물치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정서에 기여하는 작품이 있기나 한지.

반대로 썩 괜찮고 좋은 드라마는 실패할 확률이 많더라. 자극적인 막장의 막장만이 인기를 모으니 말이야. 안타까운 일이다. 뉴스를 보는데 천재지변이나 사람이 사망하는 속보만이 흥미롭다면 그 사회는 얼마나 심각한 것이겠니.

좌우간 소원이 너는 또래에 비해 성장 속도가 늦은 편인 데다 특히 언어 능력, 그중에서도 발음이 우습기 짝이 없었지.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 독특한 귀여움을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네가 영원히 그 다섯 살에 머물진 않기 때문이지. 이때의 귀여움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닌데 그 어떤 눈썰미가 이를 포착할 것인가. 고독한 싸움 같던 시절, 같은 생각을 가진 감독 한 분, 임상수 감독님을 만났단다. 오직 너의 이미지만을 담아내셨고, 아이에 대한 배려는 최고였으며, 어떠한 설정도 억지도 없이 너의 모습 그대로를 촬영하신 분이지. 사실 이것이야말로 선진적인 스타일 아니겠니? 참으로 품격 있는 감독님이라고 생각했단다. 나중에 네가 자라 철들면 꼭 갚으려무나.

어쨌든 내 생각에는 아역이 꼭 필요하다면 누구든 특정 아동 이미지 중심으로 간다거나, 어린이 오디션을 진행할 때는 나이와 개별 능력을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뜻도 모를 대사를 늘어놓고, 인지도 안 되는 말을 하게 하는 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고 봐. 우리의 영상 제작 현장에서 아동 발달 능력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는 건 내게 놀라움이었단다. 여섯 살 아이를 뽑아놓고 열두 살짜리가 할 법한 대사를 외우게 하는 게 당연한 현실 말이야.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역 배우를 지망하는 아이들의 부모 대부분이 ‘그저 불러만 주세요’ 하는 식이니, 어떤 연구나 고민의 여지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어.

그래서 오죽하면 우리가 소원이 너의 기준을 만들었겠니. 네 한계를 고려해 우리가 만든 우스개 기준이 무엇이었냐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였어. 이 문장은 10개의 낱자로 이루어져 있지. 이 문장을 예로 정해두고 소원이가 한 번에 뱉는 대사가 이보다 길어지면 하지 말자는 농담을 했던 ‘유머 가족’이 우리였단다. 그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구나(웃음).

그러던 중 어떤 일이 벌어진 줄 아니? 생각만 해도 먼저 웃음이 나는데 말이야. 네가 출연하던 드라마 대사에서 하필이면 혀가 꼬이고 헛바람이 새는 영어식 지명인 ‘샌프란시스코’가 나왔단다. 마의 고비였지. “나의 고향은 샌프란시스코예요”라는 대사. 무려 열 세자다. 우리의 기준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초과했지(웃음). 게다가 그 고약한 발음과 긴 음절의 지명이라니. 뉴욕, 시카고, 댈러스…. 이 많은 도시 중에 하필이면 어른도 혀가 꼬이는 샌프란시스코냐고. ‘시옷’ 발음이 심하게 꼬이고 바람이 새나가던 너의 발음. 실은 타임캡슐에 넣고 싶은 귀여움이었는데. 그놈의 ‘샌프란시스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대사란다.

이렇게 너는 현장에서 대사를 겨우 말하는 최연소 아역 배우였단다. 서너 살 아이의 옹알이는 빼고 말이지. 우리는 누누이 제작자나 스태프들에게 너의 늦됨을 설명하곤 했지. 역할을 맡고 못하면 안 되니까. 어쨌든 너는 어리고 앞으로도 인성이 완성되기까지는 어른인 가족들의 고민이 계속되겠지. 순수하게, 어린이답게, 아역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그려내는 작품을 만나기까지. 억지로 어른을 만들고 그저 따라 웃는 세상 말고.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생각은 어른들의 몫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넌 참으로 타고난 배우였단다. 열 번 스무 번을 반복해도 짜증이나 투정을 부리지 않는 놀라움, 오밤중에 깊이 잠든 너를 깨우면 수면 중에도 연기를 하고자 했지. ‘가장 위대한 것은 자연스러움’이라는 게 나의 생각인데 진정성은 없고 유행과 타성에 젖어 흘러가는 작품들 속에서도 소원이 특유의 순수가 발휘되는 걸 보며 이 어린 존재의 가치를 잘 알고 살려내는 좋은 작품은 없을지, 늘 욕심을 부리게 된다. 심심치 않게 이른바 ‘대박’을 기록하는 작품을 놓고도 신중한 거절이 계속되는 것도 그런 이유야. 물론 우리의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 작품이란 진행되는 동안 크게 달라지기도 하니까. 그래, 작품은 만들어지면서 무수한 변수를 거듭하는 것도 사실이라 이 또한 출연진에게 정확한 판단을 유보시키는 불편한 현실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니다’라고 판단되는 경우가 더 많아서 본의 아니게 마치 소원이는 잘 ‘튕기는’ 존재로 오인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요즘 아역 배우들이 작품에 출연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안 하는’ 경우가 더 많은 이상한 가족으로 말이야. 그 점, 우리도 잘 안다. 이 지면을 통해 우리의 고집을 변명해보고 싶구나.

사실 소원이가 배우가 되기 이전에는 나의 꿈도 ‘영화 한 편 만들기’였어.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것은 다 해도 영화 작업만큼은 못하겠다는 것으로 변했단다. 그 대신 ‘아역 배우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란 책을 내야 될 것 같다. 영상 매체 작업 현장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으니 말이다. 종합예술인 영화의 꿈은 완전히 접고 ‘아역 배우 바로 알기 열두 가지’의 내용 구상이라도 할까 보다(웃음).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사진 속 다정해 보이는 남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있었던 재미난 일이 생각나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착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원이도 두 살 터울의 남동생 선우와는 맞닥뜨리기만 하면 싸우는 앙숙, 둘은 그야말로 ‘천적 관계’ 남매다. ‘동생이니까 좀 참고 봐주렴’하고 타이르고 돌아서기 무섭게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또 다투기 시작하지. 둘 다 말이나 제대로 하면 또 몰라. 듣고 있자니 엉망진창이다. 이 할미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도 없는데, 통역도 없이 잘도 싸우다가 갑자기 소원이 네가 소리를 ‘빽’하고 지르지 뭐야. 그 엄청난 데시벨에 우리 모두 까무러칠 뻔 했잖니. 그런데 더 까무러칠 뻔 했던 건 그 내용이었어. 말도 서투른 네가 동생한테 한다는 말이 글쎄, “나 여배우야!”라는 거야. 하도 웃겨서…. 나도 큰소리로 물었단다. “소원아, 여배우가 뭔데?”했더니, “나도 몰라!”란다. 독자 분들이 그때의 너의 말투와 억양을 들어봐야 하는데(웃음). 뜻도 모르면서 대체 어디서 그런 걸 주워들은 건지. 이 착하고 예쁜 것이 남몰래 어떤 트라우마가 생긴 건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생기면서도 웃음이 터져나오는구나.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7) 진정한 아역 배우의 쓰임에 대한 유감

PROFILE 조은일 작가는…
세 아이를 키우며 겪었던 다채로운 이야기를 엮은 에세이 「빵점엄마 백점일기」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 때로는 편안한 친구 같고 때로는 든든한 동반자 같은 두 딸과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면서도 늘 밝고 유머러스한 아들의 엄마로 살아오면서 지혜와 성숙을 배웠고, 국내 최초로 홍대 앞에서 북카페를 운영할 정도로 빛나는 감각과 자유로운 감성을 지녔다.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아역 스타 갈소원양의 외할머니로, 자녀들에게 그랬듯 소원양 또한 자유롭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보살펴왔다. 「빵점엄마 백점일기 1, 2, 3」 외에도 「가끔은 원시인처럼 살자」, 「항동에 냉이꽃이 필까」, 「작고 단단한 행복」 등의 책을 펴냈다.

■기획 / 이연우 기자 ■글&사진 제공 / 조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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