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내 스카프를 흔든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어른거렸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발길도 가뿐했다. 아이들은 환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서 부드럽게 부푸는 꿈 향기가 났다.
![[프런트 에세이]신현림 작가의 나는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다](http://img.khan.co.kr/lady/201403/20140312144616_1_201403_210.jpg)
[프런트 에세이]신현림 작가의 나는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어쩐지 허전한 감이 있다. 인생은 과자처럼 쉽게 부스러지고 금세 녹아버리며, 시간은 어김없이 서글픔을 남긴다. 최근에 나는 내 인생의 중간 점검일 산문집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을 냈다. 공들인 만큼 마음에 들어서 구름 위를 걷듯이 뭉실뭉실 가슴이 따스하다. 정말 기분이 좋다. 그래도 아주 ‘2그램’ 정도 남는 서글픔이 뭘까 생각했다. 내 책에 아래와 같이 썼다.
간간이 커피 향이 내 존재감을 일깨우듯, 문득 바람이나 음악이 내 텅 빈 가슴을 훑고 지나갈 때, 그때 느끼는 것들. 문제는 ‘가슴속에 사랑하는 이가 없다는’ 것.
그깟 남자 하나 때문에 치마가 펄럭이다니. 세상 남자가 빨래처럼 널렸는데, 아프다니.
나는 너를 응원할게. 너는 사랑을 할 거야. 키스를 퍼붓는 사람이 널 사로잡을 거야.
걱정 마렴. 우리는 깊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가야 해.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꾸준히 연습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평생 사랑에 허기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 돼줄 것인가를 하나둘 생각해본다. 사람이면 갖춰야 할….
정, 친절, 기쁨, 안정감, 너그럽게 용서하는 마음, 희망, 신뢰, 부드러움, 화 안 내는 마음….
이건 목소리부터 낮아져야 가능해.
바삐 살다가 내 가슴을 뒤져보니 사랑하는 이가 없더라. 딸랑 젖무덤만 말라가는 오렌지처럼 슬펐다. 그것 없어도 살 수 있다니, 문득 놀래서 길을 못 가고 서성였다. 하지만 사랑할 이가 나타나면 언제든 사랑하리란 희망을 꼭 간직한 채로 산다. 물론 군침이나 흘리는 이성으로서가 아니다. 그저 지그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
매일 길 가다 만나는 이웃에게 먼저 미소를 보내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문자를 나눌 때는 사랑의 이모티콘을 쏜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쏜다. 남자 쪽에서는 ‘나를 좋아하나?’ 하고 착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고, 나는 이성 감정이 아니기에 신경을 안 쓴다. 그저 사랑의 이모티콘을 던지면 세상이 좀 더 부드러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싫은 소리나 짜증보다 유머나 개그의 몸짓으로 한 번 더 웃을 거라 생각하며 보낸다. 더 이상 동영상 볼거리는 보내지 않는다. 이미 많이 보내봤고 받아봐서 시시해졌기 때문이다. 트위터, 카카오스토리도 더는 안 한다. 그것도 해봤기 때문이다. 다만 페이스북은 4년째 하고 있다. 꼭 시원하게 넓은 모니터를 앞에 둔 컴퓨터로만 한다. 휴대폰에까지 페이스북을 모실 여유가 없다. 어제는 페이스북 친구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참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사시는 느낌입니다. 닮고 싶어요, 그런 모습.’
‘아이쿠^^ 고맙습니다. 저만이 아닌 누구나 충실하게 살 거예요.’
사실 누구나 한 번뿐인 인생을 열심히 살 것이다. 누구나의 마음에 어린 영혼이 살아 있듯이. 그 어린 영혼이 있어 순수함과 사랑을 갈구하며 살리라. 나무도 꽃도 다 어린 영혼이 있어 더없이 순결하고 아름답다.
영혼은 복잡하고 바쁜 일상에선 느껴지긴 힘들다. 뭔가 한가롭고, 일부러 시간 내는 고독 속에서 발견되리라. 어떤 순정한 아이의 마음으로 나무와 꽃을 보고, 직접 만든 술을 마시며 발견한 생활의 경이로움 속에서.
쓰레기 시절이 나를 키웠다
다시 사랑하고 싶어서 최근 신간 제목을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로 지었더니,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말을 친구에게 들었다. 마음속의 바람을 꼭꼭 새기면서 제목을 지었으니 기쁜 일이 없으면 안 된다. 사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은 다시 살고 싶은 날이다.
![[프런트 에세이]신현림 작가의 나는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다](http://img.khan.co.kr/lady/201403/20140312144616_2_201403_212.jpg)
[프런트 에세이]신현림 작가의 나는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다
그때의 찬바람이 내 기억 속에서 밀려들면 나는 더욱 살고 싶어서 탐구력이 미친 듯이 타오른다. ‘불금’에 옆집 애가 연애질을 하러 갈 때 나는 이때다 싶어 일한다. 매일 책을 읽지 않거나 작업을 못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제일 헛헛할 때가 살림하고 분리수거에 내 기운을 몽땅 바칠 때다. 애인도 없는데 살림이나 하며 폐지 줍는 ‘아지매’처럼 구겨진 종이 피며 분리할 때는 억장이 무너지기도 한다.
몹시 바람 불고 추웠던 나의 20대 후반도 지금의 3백만 대학 실업자 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은 꿈꿀 수도 없었다. 그 심오한 ‘쓰레기’의 추억. 입시 실패도 많이 했고, 지독한 불면증까지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지독한 불면증과 쓰레기 시절에 꽃을 피우는 나만의 노하우와 지혜를 익혀갔다. 실업자였던 나는 집에서 온갖 잔소리를 들으며 살림을 도왔다. 그러면서 스스로 밥벌레란 슬픔을 이기기 위해 틈틈이 뚱뚱한 책들을 한 권씩 독파해나갔다. 그때 뼈아프게 깨달은 지혜가 있다. 인생의 많은 어려움은 자기 내면으로 향할 때 견디는 힘이 세진다는 것. 경제적 어려움도 자기 내면으로 향해야 강인하게 이겨나갈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어려움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누구라도 쓰레기 시절을 겪고 있다면 쓰레기가 재생에너지가 되도록 애써주길 바란다. 부드럽고 향긋한 나만의 세상을 열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니까. 죽고 싶으면 반드시 장기나 시신 기증 약속을 하길 바란다. 되도록 죽을힘을 다해 죽지 않도록 해보자. 악착같이 탐구하고 오기로 살아보기로 하자.
가끔은 섹스 생각을 하는 커피여자
언젠가 30대 싱글 네 명에게 가장 큰 고민을 물었더니, “결혼을 당장 하지 않더라도 내 남자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가 누굴까, 어디서 뭘 할까, 우린 언제 만날까, 궁금하고 답답해요”란다.
그녀들이나 돌아온 싱글인 나나 다 부실해서 혼자가 힘들다. 혼자서는 냄비 뚜껑도 헤라클레스의 방패보다 무거운 법이다. 세상은 혼자 살기도 힘들고, 사랑 없이 못 사는 사랑의 병자로 가득한 병원이다. 아무리 늙어갈지라도 솔로들은 님을 만날 거란 꿈이 있어 살아간다.
언젠가 커피소년이 부르는 노래 ‘장가갈 수 있을까’를 들었을 때 몹시 반가웠다. 언제 내 가슴에 들어와서 기록하고 갔나 하고 놀랬다. 캬, 이런 노래도 있네. 커피여자인 나는 다시 시집갈 수 있을까, 재혼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가장 공감 가는 대목은 이러다 혼자 사는 건 아닐까, 하는 부분이었다. 그 말은 누군가에게 사로잡힐 수 있을까, 누군가를 당겨볼 수 있을까 하는 거겠지. 그래서 섹스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하겠지. 이미 나보다 훨씬 젊은 친구들, 허다한 친구들은 섹스의 자유함과 이별의 뜨거움을 흔하게 맛보며 사는 걸로 안다. 아니라고 발뺌은 말라. 잘못 알아도 할 수 없다. 사는 건 그렇고 그런 거라며 혀를 차며 고개를 숙이면 된다.
언젠가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한 어린아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
“섹스가 뭐예요?”
“엉?”
당황해 머뭇거리다가 한 번도 못해봐서 모르는데, 하고 말할까 하다 이렇게 말했다.
“응, 애들은 부모나 어른들이 돌보지만 어른들은 스스로 이겨내야 할 일이 많아서 슬프고 추울 때가 많단다. 그럴 때마다 어딘가 숨을 곳이 필요해. 그 숨을 곳에서 소꿉놀이하며 논단다. 그런데 남자, 여자가 진짜 많이 좋아하면 그게 더없이 좋은가 봐. ‘섹스’란 이름이 섹시해서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지.”
이렇게 읊조리고 말았다. 말해놓고 나서 더 좋은 답이 떠올랐다. 그저 너희들이 크면 자연히 알게 된단다, 이럴 걸. 이내 후회가 돼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한 날. 나 같은 생활의 노예는 정상일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섹스를 위한 알몸이 될 여력 없는 삶이 정상은 아니나, 인왕산 정상은 늘 바라보며 산다. 진달래 꽃피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지중해에서 길어 올린 봄날 하늘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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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에세이]신현림 작가의 나는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다
사실 내게 섹스란 말보다 키스란 말이 더 자극적이다. 지금 이 찬란한 봄 햇빛, 봄바람이 내 얼굴에 키스를 얼마나 해대는지 아주 어지럽다. 이럴 때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 중에서 ‘봄날 하늘 물고기’를 우아한 표정을 짓고 읊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감동을 누리고 싶다. 오늘도 나는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면서.
겨자색 꽃망울 터뜨리는 산수유를 보니 목이 멥니다.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감동이죠.
죽을 때 진정 하고 싶은 일로서 행복했노라,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면 좋겠어요.
쉬었다 가시라고 꽃그늘 아래 침대를 놔두었어요.
혹시나 다시 못 만날 날을 생각하며
희미하게라도 웃음을 남겨주세요.
침대에 푸른 잎사귀와 꽃이 피고
열매가 자라면 당신을 바라본 기쁨만큼
우리의 정도 깊어지겠죠.
봄날에 잡힌 물고기는
저 먼 겨울 하늘까지 헤엄치고
길과 길마다
벚꽃 잎 춤추며 날아갑니다.
편집 후기
나도, 참 많이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다.
세상 누구든 비슷할 거라 생각하며 애써 잊어보려 하지만, 잘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운 시절들이 있다. 혼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배배 꼬이는, 가만히 누워서 꺼내보다가 나도 모르게 벌떡 허공에 하이킥을 날리게 만드는, 감추고만 싶은 기억들. 인생을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그런 ‘흑역사’들 따윈 나의 페이지에 흔적조차 없게 만들 자신이 있건만, 어쨌거나 도돌이표는 존재할 수 없기에 최대한 이 안에서 지지든 볶든 삶든 처리해야만 하는 것. 결국 대부분의 그런 순간들은 애써 외면하면서 기억 저편에 처박아뒀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혹은 당시와 비교했을 때 모든 조건이 달라진 뒤 슬며시 꺼내서 탈탈 먼지를 털어내본다. ‘지금쯤 되돌아봐도 괜찮겠어?’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아무리 힘들고 아팠던 시간이라 하더라도, 또 창피하고 부족한 나였다 하더라도, 그 자리로 되돌아가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특히 그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자박자박 걸었든, 흥에 겨워서 칠렐레팔렐레 뛰었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기었든, 어쨌든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렁에 빠졌을 때는.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누구나의 인생에는 중간중간 당연히 빈틈이 있게 마련이고 그중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간직한 검은 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움푹’ 파인 삶의 틈에 더 자주, 더 깊게 빠질 수도 있다. 아직은 내 길을 온전히 만들지 못했고, 계속해서 길을 만들어나가는 중이니 곳곳에서 막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빈틈을 발견하고 피해갈 수 있는 눈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수록 밝아질 테니, 아직은 어지러운 지도 위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스스로를 부끄러워도 하고 ‘쓰레기’라 자책하기도 하면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무게가 내게 와서 짓누르는 것만 같을 때, 하루하루가 우산 없이 혼자 버텨내야 하는 폭우 속 나날들 같을 때, 이토록 절절한 진심을 읽지 못하는 그대가 한없이 야속하기만 할 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 그런 무자비한 순간에도 사랑해야만 한다. 나 스스로를. 기형도도 그렇지 못함을 후회하지 않았던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고(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경험이 쌓여도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여전히 상처는 아프고 감정은 무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지금, 또 한 번 잊지 못할 시간을 겪어내고 있는 내가 깨달은 진실이다.
profile 신현림 작가는…
시인이자 사진작가. 신선하고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독특하고 매혹적인 시를 쓰고 사진을 찍는,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 작가다. 펴낸 책으로는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와 에세이 「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 「서른, 나에게로 돌아간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동시집 「초코파이 자전거」등이 있다. 최근 「시가 너처럼 좋아졌어」와 산문집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을 출간했다. 사진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 중인데, 세 번째 사진전 ‘사과밭 사진전’으로 2012년 울산국제환경사진페스티벌에서 한국 대표 작가 4인 중 1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진행 / 이연우 기자 ■글 / 신현림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