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화백자 모란나비문 접시. 이상문 소장품.
‘코발트’라는 푸른 물감의 원료는 이슬람권에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산 넘고 물 건너’ 온 만큼 비싸고 귀한 것은 당연했고 매우 아껴 써야 했다. 그러니 숙달된 화공만이 코발트를 만질 수 있었으니 지금까지 전해오는 청화백자 도안이 하나같이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것은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중국의 청화백자처럼 발색이나 모양이 화려하지 않은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꽉꽉 채우는 면이 아닌 가느다란 선 위주로 도안을 넣어야 했고 자연스레 여백을 최대한 살리는 절제된 도안이 나와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나중에는 ‘여백의 미’라고 칭하며 주변국의 것과는 다른 우리 도자기 문화의 정체성이 됐다. 부족했던 코발트, 결과론적으로 보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코발트로 그렸다고 해서 모두 영롱한 블루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도자기를 빚고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마 속 공정이다. 자칫 가마의 온도가 너무 높으면 물감이 흩어져 문양이 선명하게 나오지 못하고, 반대로 온도가 너무 낮아도 제 빛깔이 나오지 못한다. 청화백자가 이래저래 까다로운 도자기가 된 것은 모두 코발트 때문이다.
이상문의 고미술품 올바로 보기 역사 속 청화백자
조선시대의 청화백자가 번성의 극치에 이른 것은 19세기가 막 돼서부터다. 18세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21대 영조 때는 전례도 없는 어명으로 “자기의 그림은 옛날에는 철사를 썼는데 지금은 회청(수입 코발트)을 쓰고 있는 것은 사치스러운 풍습이다”라며 도자기에 코발트를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다음 왕인 정조도 “기교한 제도는 일절 엄금한다”라며 검소를 장려했다. 금사리(관요 백자를 만들던 지역)에서 일어나려던 백자의 부흥이 좌절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조선 왕실이 그토록 코발트의 사용을 억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국으로부터 코발트 수입이 원활해 가격도 내릴 참이었는데…. 당시 이웃 나라를 둘러보면 청나라는 건륭대제의 황금기였고 일본은 문화의 꽃을 피웠던 에도시대였다. 아마도 주변국의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백자를 만들던 조선의 초기를, 초심을 잃지 말자는 영민한 임금들의 뜻이 아니었을까. 비록 지금의 고미술품 애호가들은 18세기 도자기 중 화려하고 멋스러운 것들은 구경하기 힘들지만, 덕분에 백성이던 우리 조상님들은 안녕한 시대를 살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원상희(Aye Studio) ■도움말 / 이상문(고미술품 감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