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청년 제원은 똑똑한 세희와 사랑에 빠졌다. 세희는 제원에게 단하나의 연애 조건을 요구한다.
‘존중할 것!’
처음에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조건이었다.
‘알 수 없으면 읽으면 되지!’
세희와 제원은 연애를 위한 독서를 함께 해 보기로 한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는 스물한 살 페미니스트 대학생 세희와 기독교학을 전공한 스물일곱 살 제원의 연애독서일기다. 세희와 제원이 함께 읽은 열다섯 번째 책은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지음 / 나무연필)다. 이번엔 세희가 쓴다.
▶세희와 제원의 대화: 연애의 유통기한?
제원: 얼마 동안 연애하면 장수 연애로 불릴까? 3년? 5년? 10년?
세희: 10년! 그쯤 되면 화석 연애 아닌가. 갑자기 엉뚱 질문은?
제원: 우리가 만난 지 2년이 됐는데 다툰 적도 별로 없고, 짜증 낸 적도 거의 없더라고. 아직 그럴 때가 아닌지, 아니면 내 인품이 워낙 훌륭해서인지 궁금했거든 ㅎㅎ
세희: 역시 ‘기승전 자기 자랑’ 우제원! 난 연애는 기간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연애도 양보다 질이 우선이야.
제원: 맞아. 시간이 가면 연애가 익숙해지는 순간이 오지. 서로 잘 안다고 착각하면서 상대를 함부로 예단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잖아.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소한 오해와 실수가 결국 눈덩이로 변하거든.
세희: 큭큭~ 똑같은 생각! 화목한 연애를 위한 요술봉은 상대를 향한 열린 마음이잖아.
제원: 세희야, 오늘도 난 너를 어제보다 더 애정애정 할게.
세희: 그만 좀 닥쳐 줄래. 닭살씨.
▶없는 정답은 찾지 말자
나 박세희는 올해 스물두 살이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제원이와 2년째 연애 중이다. 가끔은 우리 커플이 다투지 않고 연애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둘 다 고양이를 좋아하고, 즐기는 영화 장르도 비슷하고,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성격도 유사하고, 무엇보다 치킨 취향이 똑같은 것도 한몫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관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렇게 서로를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일 듯하다.
자주 싸우는 커플들의 공통분모는 ‘상대를 향한 식상함’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사소한 지적에도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게”를 말버릇처럼 달고 다니고, “알았다니까. 피곤하다. 그만하자”라는 말이 나오면 위험수위를 지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커플은 얼마 후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씁쓸하게 말하곤 한다. 익숙함이 식상함으로, 변화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섭으로, 상대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사랑이 식은 것으로 낙인찍는 순간 연애의 종착역은 멀지 않다.
연인들의 싸움거리 중 하나는 만남의 횟수에 대한 의견 차이다. 나와 제원도 이 문제로 한 차례 고비를 겪었는데, 발단은 다른 연인들과의 비교였다. 일주일에 몇 번, 한 달에 몇 번 같은 기준점이 없음에도 ‘통상적으로 이 정도 만나면 정상이지’ 같은 관념을 탑재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가벼운 투닥거림으로 우리만의 지점을 찾았다.
▶신자유주의 안에서 혐오와 차별은 끝나지 않을 것
페미니즘도 연애와 닮았다. 연애를 잘하고 싶다면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듯이 페미니즘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려면 인간, 특히 여성이 그 사회와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지금껏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여성과 올바른 관계 맺기에 실패했다. 아니 바르게 관계 맺으려는 의도가 애당초 없었다고 보는 편이 낫다. 이제껏 사회적 약자이자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들에게 매일의 삶은 전쟁과 다름없었다. 여전히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넘쳐나고 오히려 갈수록 노골화되고 가중되는 이 참혹한 현실에 대해 페미니스트로서 지금의 사회를 바꿀 것인지, 시원하게 차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꿀 것인지를 대답할 때라 생각한다.
항해사가 나침반 없이 갈 길을 정할 수 없듯이 페미니스트로서 고민하기 위해서 지성은 필수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우리의 전두엽을 가격해 잠자고 있던 페미니즘 뉴런들을 새롭게 가격한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 깊이와 난이도를 지녔지만, 읽을수록 시대적 이슈와 대중문화를 매개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현미경처럼 펼쳐 놓는다는 점에서 공감의 폭이 넓다.
저자 손희정은 무엇보다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문제를 진단하는 데 혐오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신자유주의를 지목한다. 1990년대 사회주의·공산권 세력의 몰락 후 신자유주의는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IMF를 겪으며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의 길로 들어섰는데, 이때 주목할 것은 노동·문화의 전반 영역에서 일어난 ‘유동화’라는 것이다. 노동의 유연화라는 명분으로 실시된 비정규직의 증가는 사람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이 무렵 개인들은 본인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몰아냈으며, 동시에 공동체의 해체로 상실된 소속감을 위해 혐오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혐오를 제외하더라도 신자유주의는 페미니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통찰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역겨운 지점은 상품화된 페미니즘을 파는 데 혈안이라는 점이다. 최근 미디어에서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메시지들이 많이 다뤄지고 있는데, 이는 페미니즘이 상업적인 가치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졌다. 그러니까 페미니즘이 공적인 영역에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자본주의적 속내로 파악하면 어디까지나 상품성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허용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전반적으로 통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혐오의 근본인 신자유주의에 변화가 없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아무리 날을 세우고 싸워본들 약자에 대한 혐오는 멈추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이제는 미디어에서도 심심치 않게 페미니즘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불과 몇 년 전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분명 이는 큰 변화임이 확실하지만, 진정한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가짜 논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사회의 약자에 대한 혐오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각 문제에 시야가 매몰돼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에 체제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의 필요성이 이제는 너무 확실해진 듯하다. 이때 신자유주의 체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자고 할지, 아니면 개선하자고 할지는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