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 식민지 일상에 맞선 ‘조선의 페미니스트, '가장 불온한 여성’ 낙인](https://img.khan.co.kr/lady/2020/10/26/l_2020102604000006500228251.jpg)
intro
청년 제원은 똑똑한 세희와 사랑에 빠졌다. 세희는 재원에게 단 하나의 연애 조건을 요구한다.
‘존중할 것!’
처음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조건이었다.
‘알 수 없으면 읽으면 되지!’
세희와 제원은 연애를 위한 독서를 함께 해보기로 한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는 99년생 페미니스트 대학생 세희와 기독교학을 전공한 93년생 제원의 연애독서일기다. 세희와 제원이 함께 읽은 열여덟 번째 책은 ‘조선의 페미니스트’(이임하 지음 / 철수와 영희)다. 이번엔 세희가 쓴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 식민지 일상에 맞선 ‘조선의 페미니스트, '가장 불온한 여성’ 낙인](https://img.khan.co.kr/lady/2020/10/26/l_2020102604000006500228252.jpg)
▶세희와 제원의 대화(라면 대첩)
세희: 제원아,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어! 긴급이야 긴급!
제원: 뭐야? 무슨 일인데?
세희: 라면 먹고 싶어서 현기증 나.
제원: 아, 깜짝 놀랐잖아!
세희: 뭐, 진짜 긴급이란 말이야. 라면 끓여 줘.
제원: 못 말려 진짜. 뭐 계란이랑 콩나물 잔뜩 넣고 끓여줄까? 시원하게.
세희: 허, 아직도 나를 이렇게 몰라? 아무것도 넣지 말고 끓여줘.
제원: 어휴, 그걸 무슨 맛으로 먹니? 세희는 라면은 다 좋아하잖아. 뭐가 들어가도 라면인데, 콩나물 넣는 것은 싫어?
세희: 라면이니까 싫지는 않아. 그래도 취향의 문제는 있지! 존중해 주시죠?

근우회 발회식 광경. 근우회는 1927년에 창립했다가 1931년에 해산된 여성 항일구국운동 및 여성지위향상운동 단체다.
▶ 뭐든지 본질이 중요해.
세상엔 맛있는 음식이 많다. 하지만 절대 바뀌지 않는 나의 최애 식품은 빨간 국물에 꼬불꼬불한 면, 적절한 건더기 수프가 들어간 라면이다. 식사로, 간식으로 그리고 해장으로도 완벽한 음식.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소 모두를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을 두고 ‘완전식품’이라고 한다지만, 어느 상황에나 든든하고 만족스럽게 배를 채워 주는 라면이야말로 ‘나만의 완전식품’이다.
제원이도 나도 라면을 사랑한다. 하지만 콩나물과 계란을 넣고 싶어하는 제원이와 완전식품의 순수함에 무언가를 첨가하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은 나 사이에서 벌어진 ‘라면 대첩’은 어언 1년째 반복되고 있다. 제원의 말대로 ‘다 같은 라면’이라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취향은 내 취향이 아닌 것을….

근우 전국임시대회 모습.
라면을 두고 제원이와 투닥거리다가 오늘은 느닷없이 라면을 통해 페미니즘을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라면’도 ‘파라면’도 모두 라면이듯이 페미니즘이라는 라면 역시 ‘성 소수자’ ‘노동자’ 혹은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재료가 각자 적절하게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투영함으로써 평범한 라면맛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 역시 본질은 유지한 채 더 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런 다양성의 추구를 ‘변질’로 취급하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라면에 파를 넣으면 ‘파라면’인 것이지, 이걸 두고 굳이 ‘파국물에 라면 사리를 넣은 라면 맛 파스타’ 따위로 부를 이유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굳이 이렇게 부른다면 그것은 조롱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것뿐이다. 존중이 없는 이런 태도는 무시해 버려도 좋다. 어떤 맛의 라면이 더 필요한지가 아니라, 이제 세상이 좋아졌으니 라면 따윈 먹지 말라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그것 역시 무시해도 좋다. 나는 내 자유롭고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 라면을 먹을 것이다.

근우 창간호 표지
▶불온하고 불완전한 게 어때서?
나는 소중한 페미니즘 논의를 지키기 위해 한국 페미니즘의 시작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바로 ‘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한반도에서 ‘여성 인권 향상’ 운동으로부터 전개된 한국 페미니즘의 시작점을 찾아가고 있다.
‘조선의 페미니스트’는 일제강점기라는 격랑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여성들이 자립을 꿈꾸고 여성 인권의 향상을 위해 투쟁하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투쟁기다. 기생이었던 정칠성, 도쿄 여의전을 나온 엘리트 유영준 등 사회적·경제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일제 치하에서 민족 해방과 여성 인권의 향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들이 당시 신문 등에 투고한 글과 연설문 등을 통해 보여준다. 특히 저자인 역사학자 이임하 교수는 당시의 페미니즘에 대해 ‘단순히 외국의 개념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페미니스트들의 주체적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고 성장한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 ‘조선여성동우회’ 회원이었던 여성 독립운동가 고명자의 모습.
책을 읽으며 가장 눈에 띈 것은 당대 페미니스트들이 본인과 다른 선택을 한 여성들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는 다양한 시간이 겹쳐진 시기이기도 했다. 신식 복장과 헤어스타일의 소위 ‘신여성’이라고 불리던 부류와 조선시대 의상과 전통적인 쪽찐 머리를 바꾸지 않은 여성들이 같은 시·공간에 공존했다.
남들과 다른 모습의 신여성들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됐다. 어떤 식으로든 주류에서 벗어난 소수자를 두고 굳이 차별을 해야만 되겠다는 굳건하고 무지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화가 없다. 당시에는 신여성이 소수자였다. 그들은 선망의 대상임과 동시에 차별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여성은 사랑 없이 돈만 보고 결혼하는 족속’이라는 식의 논의가 신문 칼럼에도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돈을 아예 보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단지 미련함일 뿐이며, 신여성이 돈만 보고 사랑 없이 결혼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훗날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지낸 정치인이자 당시 독립운동가였던 여성 유영준은 이런 반박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또한 ‘남성은 지키지 않는 정조관을 여성에게만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유영준은 비록 본인이 신여성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여성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옹호했다.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땅의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당대로부터 ‘가장 불온한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정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머리는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유교적 문화가 답습되던 20세기 초반의 시·공간에서 이런 발언은 사회적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책을 읽으며,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스트의 숙명은 ‘가장 불온한 방식으로 시대의 고정관념에 맞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진홍이 체포됐을 때의 모습.
여전히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불온’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존엄성 앞에서 감히 순응을 강요하는 체제의 논리가 훨씬 불온하지 않은가! 그러니 스스로를 불온함이라 여기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페미니즘은 인간을 중심으로 옳음과 정의를 제시하는 우리의 과업일 뿐이니까 말이다. ‘조선의 페미니스트’는 바로 이런 점을 환기해 준 멋진 책이다.
■제원의 한마디
토마토가 유럽에 처음 소개됐을 때는 독이 있는 식물로 알려져 식용을 하지 않았다고 해. 토마토의 훌륭함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지. 다양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 다름을 기어코 틀림이라고 선언하고 싶은 우리의 충동은 다름을 이해하고, 설명할 만한 언어가 아직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 아닐까. 페미니스트는 언어를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 늘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연금술사의 방과 같은 이 시끄러움이 늘 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