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 ‘인간 평등'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https://img.khan.co.kr/lady/2020/11/11/l_2020111104000003100110251.jpg)
intro
청년 제원은 똑똑한 세희와 사랑에 빠졌다. 세희는 재원에게 단 하나의 연애 조건을 요구한다.
‘존중할 것!’
처음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조건이었다.
‘알 수 없으면 읽으면 되지!’
세희와 제원은 연애를 위한 독서를 함께 해보기로 한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는 99년생 페미니스트 대학생 세희와 기독교학을 전공한 93년생 제원의 연애독서일기다. 세희와 제원이 함께 읽은 열아홉 번째 책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지음 / 허블)이다. 이번엔 제원이 쓴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 ‘인간 평등'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https://img.khan.co.kr/lady/2020/11/11/l_2020111104000003100110252.jpg)
▶세희와 제원의 대화
제원:음, 오늘은 통 식욕이 없네.
세희:먹보 우제원씨가 웬일이래?
제원:종일 제 잘난 척하는 녀석의 말을 들어줬더니, 밥맛이 다 떨어지네.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그저 자기만 최고라니… 에휴~
세희:남들은 자기보다 무조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진정한 모지리들이 꽤 많지. 그런데 그런 사람하고 뭐하러 온종일 붙어 다니냐? 그런 인간들과 오래 접촉하면 정신건강에 안 좋아. 그 증상은 전염성이 있거든!
제원:짜증나고 역겨워서 혼났어. 그런데 소득도 있었어. ‘끊임없이 자기 객관화를 하지 않으면, 삶의 균형이 순식간에 깨진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세희야, 만약 너도 나 때문에 밥맛 없으면 알지?
세희:하하. 걱정을 마셔. 그러기만 하면 이단옆차기로 아주 박살을 내주겠어!
▶둘리야 미안해
둘리야!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려고 해. 너는 어린 시절 변신 로봇 다음가는 나의 우상이었지. 그런데 내가 성인이 되면서 마냥 귀엽고, 좋았던 네가 영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미숙하고 철없게 보이고,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싸늘해졌어. 문득 네가 꼴 보기 싫어 방치했지. 넌 내게 이유를 묻지 않겠지만, 난 왠지 부끄럽네. 동심을 잃은 건 내 문제였는데 말이야.
둘리야, 인간이 신으로부터 시간만큼이나 공평하게 부여받은 게 뭔 줄 아니? 그건 바로 결핍이야. 결핍이 없는 사람도 없고, 또 누군가보다 ‘더’ 결핍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결핍만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려 안달이지. 아니 찾기보다는 억지로 만들어 내면서, 타인의 결핍 위에 서려고 해. 그건 자기 과시를 덧칠하면, 자신들의 결핍이 가려진다고 착각하는 바보들이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이런 사회적 결핍이 만든 차별과 망상을 시원하게 걷어차는 소설이야. 노인, 어린아이,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가 유난히 결핍된 존재라고 믿는 인물들을 주인공인 흥미진진한 이야기지.
▶식욕감퇴 유발자
자신의 장점을 과도하게 뽐내는 태도를 우리는 ‘잘난 척’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진짜로 잘난 게 아니라 그런 척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과연 이 말만큼이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훈을 자연스럽게 담고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잘난 게 있으면 못난 것도 있으니 남들보다 더 잘난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건방 떨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하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누군가보다 잘나거나 못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라 불리는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와 같은 취약계층으로 낙인찍는 사람들은 실상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도 나도 모두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바른 공동체는 서로 다른 결핍을 채우고 나누면서 공존해야 한다. 결핍의 양을 저울질하는 것만큼 우매한 일은 없다. 돈과 권력의 소유로 무게를 저울질하는 나쁜 놈들이 아니면 말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포항공대에서 생화학을 공부한 김초엽 소설가의 SF소설이다. 스펙트럼, 공생 가설 등 상상력이 톡톡 튀는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우주비행사가 된 중년 여성, 순례에 나선 어린이 등 사회가 미숙하고 약하다고 인식하는 존재들의 삶의 이야기다.
단편 ‘스펙트럼’의 주인공 희진은 우주 생명체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외계행성에 불시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루이라 불리는 ‘무리인’과 함께 지내게 된다. 그와 함께 지내며 희진은 기묘한 일을 겪는다. 그건 루이가 죽더라도, 그 뒤를 이어 새로운 루이가 온다는 것.
여기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이 책은 사회가 결핍됐다고 여기는 존재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진지함과 감동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책의 주인공들과 당신은 분명 같은 인간이다”라고 말이다. 김초엽의 문학적 상상력 속에선 외계인조차 다르거나 결핍되거나 구분돼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김초엽 문학은 바로 이런 점이 독특하면서도 현대적이다.
결핍된 존재들로부터 이야기를 그려내는 책의 시선은 페미니즘의 서사와 닮았다. 페미니즘은 인간 평등을 실현하는 운동이자 학문이다. 인류 역사상 평등을 쟁취하는 과정이 쉬웠던 적이 있던가.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등을 말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누리기 위한 자격을 증명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는 걸 가정하고 하는 소리니 이 또한 잘난 척이다. 페미니즘은 이런 식욕감퇴 유발자들을 향해 ‘인간 평등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라 외치는 일갈이다.
▶세희의 한마디
페미니즘은 성별, 인종, 계급 등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나뉘어 있어. 내가 아는 것만 해도 12개가 넘지. 모두 같은 페미니즘의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건 그 내용과 모습은 달라도 모두가 평등한 인간임을 인정하기 때문이야. 우리의 페미니즘은 인간 평등을 훼손하려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정신으로 대동단결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