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청년 제원은 똑똑한 세희와 사랑에 빠졌다. 세희는 재원에게 단 하나의 연애 조건을 요구한다.
‘존중할 것!’
처음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조건이었다.
‘알 수 없으면 읽으면 되지!’
세희와 제원은 연애를 위한 독서를 함께 해 보기로 한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는 99년생 페미니스트 대학생 세희와 기독교학을 전공한 93년생 제원의 연애독서일기다. 세희와 제원이 함께 읽은 스물여섯 번째 책은 ‘떨림과 울림’(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이다. 이번엔 제원이 쓴다.
▶나라는 인간이 있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은 만남에서 시작된다. 별이 원자와 분자의 만남에서 태어난 것처럼 인간의 관계와 역사도 만남의 순간과 그 시간의 집적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대학 생활의 어느 날’이라 답할 것이다. 대학 입학 전 나는 사람과 관계맺는 것에 서툴렀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어려웠고, 가끔은 지나치게 논리적인 태도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그랬던 내가 바뀌게 된 것은 대학에서 선배들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소외된 계층과 약자들에 관한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던 소위 운동권 선배와의 만남은 나에게 인간을 이해하고 열린 마음을 갖게 했다.
처음 선배들을 만난 곳은 청소노동자의 처우 개선 문제를 놓고 청소노동자와 학생이 간담회를 갖는 자리였다. 모임 이후 그들과 함께 여러 시위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목격했다. 절박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 화난 사람….
시위 현장은 그들의 감정이 뒤섞이는 용광로 같았다. 사람들이 시위에 나서는 것은 무언가로부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 용광로에 섞여 보고 난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만약 나를 이끌어 주는 선배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사람의 상처에 공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던 나는 다른 이의 온기를 느끼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게 됐다. 무엇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과 인권과 자유가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것이 아님도 깨달았다. 현장에서 땀 흘리며 보낸 시간으로 인해, 자연히 학교 성적을 꼼꼼히 챙기지는 못했다. 때로 아쉬움도 있었지만, 사람과 맺는 소중한 만남이 성적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배웠다.
‘떨림과 울림’의 저자 김상욱 경희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는 우리가 감정을 뒤섞는 일을 떨림과 울림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울림이다. (중략)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라고….
인간의 만남은 감정과 생각을 뒤섞는 떨림과 울림의 교환이다. 서로 울림을 주고받는 것이 비단 인간일 뿐이겠는가.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이 울림을 주고받는다. 과학에서는 이를 ‘진동’이라고 말하는데, 놀랍게도 진동을 알면 우주에 대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진동으로 생성된 우주 그리고 여전히 그 울림을 교환하며 생명을 지속하는 우주는 멀고 광대하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가까운 세계이기도 하다.
▶떨림과 울림 그리고 인간
과학자의 시선과 지식으로 해독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떨림과 울림’은 물리학의 개념과 지식을 동반한 전문가의 식견을 바탕으로 인간의 실존과 세계의 문제를 연동시키면서 우주론적 사유를 펼치게 만드는 과학 교양서다.
김상욱 교수는 우주의 많은 것이 진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진동이 공간으로 전파된 상태를 파동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빛이다. 빛은 색마다 다른 고유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진동수가 다른 빛은 굴절하는 정도도 달라서, 프리즘에 빛을 쏘면 각기 다른 색으로 분산된다. 인간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눈에 있는 빨강·녹색·파랑 세 종류의 원추세포가 각 세포와 고유 진동수가 같은 빛에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리고, 인간이 세계를 볼 수 있는 것 모두가 진동에 의해서다.
진동의 중요성은 인간의 감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거대한 별에서부터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은 진동으로 인해 존재한다. 물체에 평형 상태에 머무르려는 속성이 있을 때 일어나는 진동을 단진동이라고 한다. 천체 운동의 대부분이 단진동이다.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움직임도 단진동이다.
물체의 운동부터 성질까지 많은 것들이 진동으로 인해 발생한다. 심지어 양자역학에서는 파동이 물질의 운동방식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보다 훨씬 작은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이론을 ‘초끈이론’이라고 한다. 초끈이론에서는 끈의 진동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물질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떨림과 울림’에 나오는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당신이 기타로 ‘도’를 치면 코끼리가 나오고, ‘미’를 치면 호랑이가 나오는 식이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엄연히 과학적 논리가 뒷받침된 것이다.
이처럼 세상 대부분은 진동으로 인해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순간 진동은 서로 다른 것끼리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구는 태양이 있어 공전궤도를 돌며 단진동을 하고, 생물은 빛과의 공명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떨림과 울림을 주고받음으로써 인간은 존재하게 된다. ‘나’를 ‘나’라고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있을 수 있고, 소중한 사람이 있기에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람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떨림과 울림’은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진동은 기계적이지만, 떨림은 인간적이다’와 같은 인간미 넘치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권위보다는 합리적인 의심과 자유로운 반박을 추구하는 과학의 정신이 사회의 민주성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과학책을 수학적 계산이나 이론을 소개하는 지엽적 이해로 받아들였던 내게 이 책은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매력적인 과학서다. 인간미 없는 과학의 차가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읽어 보기를 권한다. 책에 다량으로 함유된 저자의 인간적인 시선이 당신의 알레르기를 치료해 줄 것이다.
■세희의 한마디
사실 나는 이번 책을 읽으면서 머리가 지끈거렸어. 과학을 손에서 놓은 지 어언 5년은 돼 가니까, 진동이니 공전궤도이니 하는 것들이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하는 생각에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더라고. 그렇지만 조금 참고 읽다 보니 저자의 시각이 나에게도 참 좋은 울림으로 다가오더라. 진동과 떨림의 차이를 이렇게 문학적으로 서술하다니 말이야! 앞으로는 과학과도 조금은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