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청년 제원은 똑똑한 세희와 사랑에 빠졌다. 세희는 재원에게 단 하나의 연애 조건을 요구한다.
‘존중할 것!’
처음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조건이었다.
‘알 수 없으면 읽으면 되지!’
세희와 제원은 연애를 위한 독서를 함께 해 보기로 한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는 99년생 페미니스트 대학생 세희와 기독교학을 전공한 93년생 제원의 연애독서일기다. 세희와 제원이 함께 읽은 스물일곱 번째 책은 ‘고기로 태어나서’(한승태 지음/ 시대의 창)이다. 이번엔 세희가 쓴다.
▶ 세희와 제원의 대화
제원: 세희야, 혹시 오르톨랑이라는 프랑스 요리 알아?
세희 : 아니, 그게 뭔데?
제원 : 푸아그라랑 같이 프랑스 요리 중 최고 진미로 치는 음식이래. ‘프랑스의 영혼을 구현하는 요리’라고도 부른다더라. 그런데 만드는 방법이 엄청 잔인해서 더 유명해. 촉새를 산 채로 잡은 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상자에 가두는데, 새가 앞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먹기만 하게끔 눈을 뽑아버리기도 한다고 해. 심지어 살이 알맞게 올랐다 싶으면 사과 브랜디에 익사시킨 후에 통째로 구워서 먹는다고 하더라?
세희 : 그게 뭐야…. 그런 게 진미라고?
제원 : 응, 심지어 ‘신의 음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더라. 먹을 때도 머리를 제외한 부분을 통째로 씹어 먹는 거래.
세희: 와, 너무 끔찍한 방법이다. 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걸까?
제원: 글쎄…. 물론 이 방법이 유독 잔인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먹기 위해 기르는 다른 동물들은 적절한 환경에서 키워진다고 말할 수 있겠어? 세희가 비건을 지향하게 된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잖아.
세희: 그렇기는 하지.
▶ 비거니즘? 비거니즘!
비거니즘은 좁게는 ‘동물성 식품(고기, 우유, 달걀 따위)을 전혀 먹지 않는 적극적인 개념의 채식’을, 넓게는 동물에 대한 착취 전반을 거부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동물성 식품이 없는 삶을 익숙하게 느꼈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고기반찬 없이는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 육류를 좋아하던 사람이 나였다. 이런 내가 비거니즘의 필요성을 인지한 것은 스무 살, 전공을 제외한 모든 일이 즐겁던 시절, 학생회에 발을 들인 시점부터였다.
학생회는 학우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조직이기에, 교내에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소수자를 이해하기 위한 교양이 종종 있었다. 1년 동안 페미니즘, LGBTI,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들었다. 하지만 비거니즘의 개념, 학생회에서 비건을 차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내가 재학 중인 학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학우들 사이에 ‘비건’의 존재가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간식 행사를 준비할 때 비건식을 따로 준비했다) 등의 내용을 담은 비거니즘 교양이야말로 난생처음 접하는 ‘신세계’였다. 그리고 이 신세계는 빠르게 나를 매료시켰다.
물론 인식과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을 설득하는 일부터 난관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흔하다고 하기는 어렵더라도 편의점과 패스트푸드 판매점 등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비건 음식을 찾아볼 수 있지만, 내가 처음 비건에 관심을 가진 2018년만 하더라도 비건이라는 단어와 대중 사이에는 태평양보다 넓은 거리감이 있었고, 온갖 비아냥을 감수해야만 말이라도 꺼낼 수 있는 주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걱정과 반대는 사회에서 규정한 ‘정상’의 범주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어느 순간 부모님 역시 이해일지 포기일지 나의 식습관이나 신념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게 됐고, 나는 비건 지향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잔인한
우리는 왜 육류·어패류 등 동물성 식품을 소비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을까? 바로 얼마 전까지 살아있던 ‘싱싱한’ 동물성 식품에 일말의 죄책감 대신 식욕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 무언가가 결여돼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소비를 장려하는 유통·판매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는 살아 있는 상태의 양돈·양계보다는 이미 ‘가공된 상품’을 더 자주, 쉽게 접하기 때문이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인간이 먹기 위해 소비하는 닭·돼지·개가 어떤 환경에서 삶을 이어나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책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효율적 생산’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즐거운 식사를 위해 애써 외면하던 현실이 그만큼 잔인한 것을!
‘고기로 태어나서’는 작가 한승태가 실제로 양계장을 비롯한 ‘식용 동물’을 기르는 사육장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작가가 처음 양계장에서의 근무를 택한 것은 단지 ‘서울을 떠나고 싶다’라는 이유 때문이었다지만, 한 달 만에 그 잔인함에 도망치듯 양계장을 떠난 그가 직면을 선택해 다시금 식용 동물 사육장에 찾아가게 됐으니, 어쩌면 작가의 소명이자 운명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기로 태어나서가 다른 비거니즘 서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띠는 것은 작가 한승태가 직접 근무하며 수집한 실제의 이야기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제원이와 언젠가 프랑스 요리인 오르톨랑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멀쩡히 날 수 있는 새를 가두고, 눈을 뽑고, 익사시키는 등의 요리 방식은 너무나도 잔인하게 들렸지만, 우리가 먹고 있는 돼지·소·닭 역시 ‘괜찮은’ 환경에서 키워진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더랬다. 양계장의 한 케이지 안에 네 마리의 닭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자식을 낳기 위한 모돈은 사육장과 분만장의 이동만이 평생 할 수 있는 이동임을 아는 순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모두가 비거니즘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즐거움을 추구하며 편히 살 수 있음에도 잔인한 현실을 직면하는 일은 불필요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도 동의한다. 다만 한 차례의 직면만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다. 먹지 않는 것이 어렵다면 그들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부터, 아니 적어도 상품 이전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그 자체부터…. 인지는 언젠가 큰 의미를 만드는 씨앗이 될 것이니 말이다.
■제원의 한마디
바로 이 대목이었어.
“무감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동에서부터 차례대로 작업했는데 얼마나 많은 닭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수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손에 ‘투두둑’ 하고 닭의 명줄이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져도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릴 때만큼의 감정도 소모하지 않고 닭의 목을 비틀었다. 내 발 주위는 무도병에 걸린 것처럼 사지를 흔들어대는 닭으로 가득했다. 잠깐, 정말 찰나의 100분의 1 정도의 순간 동안 예전의 일기에 적어 놓은 그런 감정들, 미안함, 불편함, 찝찝함 같은 것들이 느껴질 것 같았지만 금세 짜증과 피로에 묻혔다. 이런 식이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은 그날 밤 내내 나는 이 문장이 그려낸 지옥 같은 풍경 속에 갇혀 있었어. 문득 ‘우리는 지옥을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고기로 태어나서’는 ‘쉬운 답’이 아니라 ‘어려운 질문’을 무수히 던지게 만드는 바로 그런 책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