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90년대에는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수입됐다. 언론들의 왜색 논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다양한 재미와 메시지는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왓챠 캡처
80년대 일요일 아침을 여는 애니메이션으로 ‘은하철도 999’가 있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에 햇빛이 쏟아지네 …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가 흘러나오면 아이들은 저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마쓰모토 레이지의 만화 ‘은하철도 999(갤럭시 익스프레스999)’는 일본에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소년 킹’이란 만화잡지에 연재되었고, 1978년 애니메이션이 되어 1981년까지 방영되었다. 한국에 방영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으로, MBC에서 일요일 아침 7시 50분부터 전파를 탔다.
서기 2221년 철이(일본명: 호시노 데쓰로)는 엄마와 함께 눈보라 속을 걷고 있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엄마와 아들 철이는 몹시 추워 보인다. 엄마와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메갈로폴리스를 향한다. 그러나 메갈로폴리스에 간다고 해서 누구나 기계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인간이 천 년 수명의 기계인간이 되려면 비용을 큰 지불해야 한다. 철이 아빠는 메갈로폴리스에서 그 돈을 벌다가 과로로 사망했다. 눈길을 걷던 엄마가 갑자기 철이를 멈춰 세운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서두르자.” 발걸음을 서두르는 두 모자를 뒤쫓는 이들이 바로 기계인간이다. 온몸을 기계로 개조한 부호 인간백작이 인간사냥에 나온 것이다. 인간사냥으로 인해 철이 엄마는 죽음을 맞이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박제가 될 운명에 처한다.
‘은하철도 999’ 1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떡하니 벌리고 볼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메텔의 아름다움과 작고 통통하고 잘생김과는 거리가 먼 철이의 조합이 남달랐고, 무엇보다도 인간사냥으로 엄마를 잃는다는 설정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나에게는 어마무시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메텔의 도움으로 추위를 피해 목숨을 건진 철이는 메텔이 준 은하철도 999 티켓으로 모든 인간을 무료로 기계화시켜준다는 안드로메다 성운의 어느 별을 향하게 된다. 메텔도 함께 말이다.
이들이 첫 방문한 별은 화성. 지구 식민지로 100년에 걸쳐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기계화되어 있다. 화성에서 철이는 몸의 일부만 기계화된 한 쌍의 연인을 만난다. 지구에 돌아갈 돈도, 은하철도 999를 타고 안드로메다 성운에 갈 돈도 없던 이들은 철이의 은하철도 999 티켓을 도둑질하려다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철이는 기계백작처럼 전신을 기계로 바꾸는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며 일부만 기계인간이 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도 처음 접하게 된다.
철이는 수많은 별을 여행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계인간이 되기를 꿈꾸지만, 점차 기계인간이 된다는 일에 회의도 느끼게 된다. 마지막회에서 안드로메다 성운의 어느 별에 도착한 철이는 애써 이 별까지 와서 무료로 기계인간이 된 사람들의 방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어차피 불로불사의 기계인간이 되었으니 일할 필요도 없다며, 술을 마시고 흥청망청 살아가는 이들에게서는 열심히 살아간다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철이는 기계인간과 보통인간 사이에서 망설이게 된다.

메텔은 우수에 찬 외모와 미스터리한 정체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다. ‘은하철도 999’ 블루레이 발매 이미지.
한편 철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돕던 메텔은, 자신이 젊은 청년들을 이 별로 유인해 데려와 기계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자백한다. 그 인간들의 에너지로 이 별이 돌아간다는 사실까지도. 메텔이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는 것은 바로 자신이 데려와 기계인간이 되어버린 청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즉 그녀의 옷은 상복인 것이다.
113부작에 이르는 이 애니메이션은 고도 성장으로 도쿄가 새롭게 개발된 이후에 방영되었다. 수많은 별들의 모습에서 개발 이전의 도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그려내 ‘향수 짙은’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인간개조’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낸 애니메이션이다. 열심히 살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감정까지 잊은 기계인간으로 살아 영생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병들고 늙고 죽는 인간으로 끝까지 나의 감정과 꿈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철이의 대답은 후자다.
인간 개조 모티프는 드라마 ‘엑스파일(X파일)’에도 등장한다. 우주인과 인간의 결합으로 하이브리드를 만들거나, 시즌 9 이후로는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낸다. 드라마 ‘프린지’에도 기계인간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세포 배양으로 태어나 하룻밤 만에 성인 크기로 성장한다. 불로불사는 아니지만 인간의 몸에 기생하여 더 오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영원한 인생을 원했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내려던 기원전 220년대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양한 작품들이 인간의 일부를 개조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펼쳐냈고 우주 어딘가에 인간의 몸을 기계로 완벽하게 바꿔주는 별이 있으리라는 상상력 아래 마쓰모토 레이지는 ‘은하철로 999’를 집필했다.
일요일 아침이며 아이들을 불러 모으던 ‘은하철도 999’도 피할 수 없던 것, 바로 왜색 논란이다. 일본 작품이니 당연히 왜색이 짙었을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고도 경제 성장 이전의 도쿄인 것만 봐도 그렇다. 당시 신문들은 아이들이 볼 만한 국산 애니메이션이 적다고 끊임없이 지적했다. ‘은하철도 999’의 작품성보다 일본에서 수입했다는 것이 못마땅하거나 불쾌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 시절 사랑받던 일본 애니메이션, ‘들장미 소녀 캔디(캔디캔디)’, ‘바람돌이’, ‘호호 아줌마’, ‘소공녀 세라.’(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과거 수 년간 논란이 돼온 일본색이 짙은 만화영화가 상당히 자취를 감추었다고는 하나, ‘은하철도 999’ 등 일부 프로에서는 아직도 일본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어린이들은 흥미와 재미에 이끌려 TV 앞에 앉음으로써 알게 모르게 특정국 문화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왕 수입해서 방영한다면 수입대상국이나마 다국화시키는 게 바람직하나 방송국 입장에선 위험부담 때문에 각국 제작사에 일일이 주문해서 원하는 작품을 들여올 수 없는 형편으로 중개사를 통해 들여온다는 변명” (매일경제 ‘티브이 어린이 프로에 외국 만화영화 판 쳐’ 1982년 7월 30일).
한겨레 신문은 비디오 대여점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가득한데 국내 제작 만화영화는 ‘달려라 하,니’ ‘아기공룡 둘리’ 등 두 개 뿐이라며, 국내 창작 만화 심의 신청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또한 30분짜리 만화영화 한 편의 제작비가 적게 잡아도 5천만 원 안팎인데, 같은 길이의 일본만화는 1백만 원이면 수입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 ‘우리 얘기 담은 만화영화 아쉽다’ 1990년 5월 20일)
경향신문은 “어린이 프로는 일반 프로와 달리 교육적이어야 한다”며 제작비 부담이 엄청나도 후세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최대한 투자하여 어린이 프로의 질적 향상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경향신문 ‘TV어린이 프로 개선돼야’ 1982년 3월 17일)
‘캔디캔디,’ ‘소공녀 세라,’ ‘닐스의 모험,’ ‘작은 아씨들,’ ‘소공자,’ ‘개구리 왕눈이,’ ‘호호 아줌마,’ ‘바람돌이’ 등 어린 시절 내가 보고 큰 일본만화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누군가는 ‘빨간머리 앤’을 사랑했고, 누군가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서 향수를 느낄 것이다. 당시에는 그 만화영화를 즐겨보면서도 왜 왜색이라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지, 그것을 수입해 왜색이라고 칠하기 전에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왜색이 가득하니 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왜색이 가득하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보고 소비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았더라면 일본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책감을 느끼는 일은 좀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누구나 일본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책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민감한 아이들은 왜색 짙다는 만화영화를 눈 앞에 두고 봐도 될지, 보게 된다면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할지 고민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 지는 알지 못했다. 당시는 일본문화 개방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던 시기였고,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일본의 문화들을, 그것이 비록 만화영화일지언정, 어떻게 보고 받아들여야 할지 정답을 알고 있는 이도 없거나 드물던 시절이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영생을 얻을 것인가, 나답게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기로에서 고민하는 소년 철이가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왜색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엄과 정의라는 보편적인 테마 때문이었다는 것을.
![[너와나의 소녀시대]은하철도999 왜색과 재미, 그 기로에서](https://img.khan.co.kr/lady/2022/05/20/l_2022052004000030600233861.jpg)
·김민정 작가는…
재일작가. 게이오대학 종합정책학부 졸업, 도쿄외대 종합국제학 석박사 수료. 도쿄에 거주하며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에세이를 발표하고 있다. 관심사는 ‘한일 여성사’와 ‘80, 90년대 한일 사회.’ 저서로는 ‘엄마의 도쿄’ ‘떡볶이가 뭐라고’, 공저 ‘소설도쿄’ ‘SF김승옥’, 한국어 번역서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시부야 구석의 채식식당’ ‘애매한 사이’ ‘가나에 아줌마’ ‘바다를 안고 달에 잠들다’, 일본어 번역서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가 있다.
육아하는 여성이 글을 쓸 곳이 마땅하지 않아 메일 매거진 발행을 시작했다.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편하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격일 메일 매거진 ‘김민정은 김민정이다’(월 구독료 8800원)에서는 소설 ‘남편을 버렸습니다’, 만화 ‘달링은 넷우익’, 80-90년대 한일현대사, 일상다반사 등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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