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나>, <프린세스 다이어리>,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 등 신데렐라 스토리는 소녀들의 한때 로망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모든 공주나 왕비가 동화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공주로 태어나거나 혹은 왕자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꿈꿨지만 불행과 우울 속에서 살다 간 4명의 왕실 여성들이 있다.
탈출 감행한 두바이 ‘하야 왕비’
최근 아랍의 한 왕비가 자유를 선언했다. 460억 원이라는 돈을 들고 11살 딸, 7살 아들과 함께 탈출한 왕비는 영국 법정을 통해 왕에게 이혼 소송을 냈다. 세계적 갑부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 왕국의 셰이크 무함마드 국왕의 부인 하야 빈트 알 후세인 왕비가 그 주인공이다.
하야 왕비는 요르단 전 국왕의 딸이자, 현 국왕의 이복동생이다. 영국에서 성장한 그는 명문 옥스퍼드대를 거쳐 2004년 12살 많은 무함마드 국왕과 결혼한다. 그의 여섯 번째 부인으로.
탈출 이유에 대해 하야 왕비는 “단지 내 생명을 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무함마드 국왕은 “아내가 경호원과 바람을 피웠다”며 맞대응하며 이혼 소송 중이다.
하야 왕비에 앞서 탈출을 감행하고 망명한 왕실 여성이 있다. 무함마드 국왕의 첫 번째 부인의 딸인 라티파 공주다. 공주는 탈출 직전 남긴 영상에서 “왕실에서는 시간, 장소, 먹는 것까지 기록되는 ‘감시받는 삶’을 살았다”라며 “여자라는 이유로 중학생 수준 이상 교육은 받지 못했다”라고 호소했다.
두바이 지역 인권 활동가인 라다 스털링은 가디언지 인터뷰에서 “라티파 공주에게 가해진 국왕의 학대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하야 왕비도 자신이 절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무함마드 국왕은 6명의 왕비 사이에 23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야 왕비가 ‘안전 이혼’해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한 지붕 아래 세 사람 영국 ‘다이애나비’
1981년 7월 영국의 세인트 폴 성당 앞, 한여름 무더위에도 사람들은 20세기에 벌어지는 동화의 한 장면을 보기 위해 빼곡히 모여들었다. 동화 속 주인공인 다이애나는 상아색 비단 웨딩드레스를 입고 마차에서 수줍게 내려섰다. 그녀는 젊고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다이애나 스펜서와 찰스 왕세자의 결혼식에 대해 언론은 ‘동화 속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대서특필했지만 다이애나에게는 그 결혼식이 불행의 서막이었다.
다이애나는 평생 남편이 다른 남자의 아내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훗날 다이애나비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세 사람이 함께한 결혼이니 좀 붐볐죠”라고 자조적으로 말할 정도였으니.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남편의 불륜을 용인하면서 외적으로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통한의 결혼 생활을 보냈다.
질투와 배신감을 감추고 거짓된 삶을 사는 동안 다이애나비는 몇 차례의 자살 시도와 폭식증, 거식증에 빠져 피폐해져 갔지만 찰스 왕세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우여곡절 많은 결혼 생활은 15년 후 1996년 8월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년 후 1997년 8월 다이애나비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 대한제국 ‘덕혜옹주’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 덕혜옹주는 고작 8살이었다. 때는 삼일운동이 불같이 일어나던 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픈 국민들의 열망이 타오르던 시기다. 대중들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옹주를 중심으로 독립의 의지를 모았고 옹주의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런 옹주의 존재를 일본이 가만히 둘리가 없었을 터. 옹주를 인질 삼아 일본으로 데려간다. 그에게 일본식 의상을 입히고 일본식 교육을 강요했다. 그 뒤 1년 만인 1926년 아버지처럼 따르던 순종마저 서거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 양 귀인마저 죽자, 어머니 장례식 이후 덕혜옹주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병세는 날로 나빠져 조발성 치매를 진단받기에 이른다.
덕혜옹주가 스무 살이 되는 해 강제 국권침탈 이후 일본은 영친왕에 이어 덕혜옹주까지 일본인과의 혼인을 추진한다. 덕혜옹주의 배우자로는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가 선택된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황실의 유일한 여성으로 상당한 경제력을 보유했던 만큼 소 다케유키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남는 장사’였다. 1931년 5월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 이듬해 딸 정혜(마사에)가 태어난다.
딸 출산 이후 덕혜옹주는 위안을 찾으려 했지만, 정략 결혼한 남편은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다. 홀로 낯선 땅에 의지할 곳 없이 남겨진 가슴 속 응어리로 심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심신 미약을 넘어 조현병 증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한다.
결국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다케유키는 백작 지위를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덕혜옹주를 도교 도립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한다. 그 탓에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서 다량의 브로민화 칼륨을 처방받고 조현병 치료에 근거가 없는 고통스러운 감전 치료를 수년 동안 받았다.
항간에는 소 다케유키가 생전에 남긴 시로 아내 덕혜옹주를 진정으로 사랑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이는 판타지에 가깝다. 마음이 아픈 아내를 두고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한 행동으로는 그리 예측하기 어렵지 않은가.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건너간 지 38년만인 1962년 51세가 돼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첫사랑 못 잊어 영국 ‘마거릿 공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동생 마거릿 공주는 여러모로 언니와 달랐다. 왕위에 대한 책임감으로 조용하고 엄숙한 언니와 달리 자유분방하고 사교적이라 항상 모든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더불어 굉장한 미녀였다. 영국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 칭송받았다.
언니인 엘리자베스가 필립 공과 혼인하자, 막 17살이 된 마거릿 공주는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진출하며 화려한 생활을 시작한다. 사교계 생활 중 마거릿은 사랑에 빠지고 마는데 그 상대는 조지 6세의 시종 무관이던 피터 타운센드 공군 대령이었다. 마거릿은 그와 약혼을 결심하지만 문제는 그가 16세 연상에 이혼남이라는 점. 왕실과 성공회의 반대는 불보듯 뻔했다.
일설에 의하면 언니 엘리자베스 2세는 하나뿐인 동생이 원하는 것이니 들어주려 했으나, 의회는 “마거릿이 피터와 결혼한다면 왕위 계승권은 물론 공주 작위와 재산도 모조리 포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특단의 조치로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피터를 아예 벨기에 무관으로 2년 동안 보내버렸으니 세기의 로맨스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첫사랑과의 결혼을 포기한 마거릿은 짧은 연애만 끊임없이 하고 좀처럼 결혼 소식이 들리지는 않았다. 이러다 마거릿 공주가 평생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냐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첫사랑 피터가 25세 연하의 벨기에 여성과 재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거릿은 큰 충격을 받고 약 한 달 만에 약혼을 선언한다. 당시 사귀고 있던 왕실 사진사 안토니 암스토롱 존스와.
두 사람의 성급한 결혼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남편 안토니는 양성애 성향이 다분했고 결혼 전부터 연애 관계가 복잡했다. 불같은 성격의 마거릿도 그의 사생활을 절대 참지 않았다. 결혼 5년 만에 두 사람은 거의 남남이 되어버리고 마거릿도 보란 듯이 맞바람을피우기 시작했다. 결국 마거릿의 열애 현장은 파파라치의 먹잇감이 됐다.
보도 이후 마거릿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결혼 18년 만인 1978년 두 사람은 이혼을 발표한다. 이 이혼은 헨리 8세 이후 영국 왕실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을 만큼 파격적인 소식이었다. 이후 ‘돌싱’이 된 마거릿은 믹 재거부터 갱단 두목까지 방황하듯 숱한 스캔들을 몰고 다니며 왕실의 문제 인물로 거듭난다.
그러다 12년 뒤 첫사랑 피터와 재회하기도 했는데 당시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79세였던 피터는 거동이 불편해진 노인이었지만 마거릿은 그를 보고 자신의 절친이자 샤프롱(시녀)인 남작 부인에게 아련한 눈빛으로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거릿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이는 끝내 이루지 못한 첫사랑 피터였다.
■자료제공: 유튜브 채널 <지식 아닌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