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은 역사 속에서 세기의 거장으로 남을까, 권력형 성희롱 가해자로 남을까?
<새>, <현기증>, <사이코>의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여전히 영화 마니아들에게 사랑받는 거장이다. 그가 생전 한 여배우를 끊임없이 성추행하고 학대했다는 폭로가 터져 나온 적이 있다. 영화 <새>와 <마니>의 헤로인 티피 헤드런은 2016년에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티피>에서 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히치콕의 성희롱을 당했다고 말한다.
또한 히치콕을 거부하자 그녀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라 제대로 연기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히치콕은 1980년 80세를 일기로 고인이 되었기에 헤드런의 주장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티피 역시 헛소리를 할 인물은 아니었다. 티피 헤드런은 <워킹 걸>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은 멜라니 그리피스의 엄마이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다코타 존슨의 외할머니다.
헤드런의 자서전에는 히치콕의 디렉팅 능력을 높이 사며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존경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언급한다.
회고록에 따르면 히치콕은 그녀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로부터 원하는 연기를 얻기 위해 협박·통제하고 조종해왔다.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현장에서 촬영하지 않은 채 몇 시간이고 시간을 끌어 긴장감을 유발했다. 영화 <새>의 촬영 중에는 촬영용 가짜 새를 대신해 실제 새를 사용하면 더 사실적일 것이라고 배우를 설득했다. 실제 새의 공격을 받던 헤드런은 촬영 중 기절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히치콕 감독은 유독 금발에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를 선호했다. 그의 영화에는 금발의 여성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괴로워하는 신이 유난히 많다.
영화 평론가 사이에서 히치콕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부분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가 특정 여성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편다. 굳이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배운 변태’다. 히치콕 감독 특기인 공포라는 장르에서 여자주인공은 늘 위기에 빠졌고 비명을 질렀으며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이코>의 금발 미녀 재닛 리가 모텔에서 샤워 중 비명을 지르는 신은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그레이스 켈리도 <다이얼M을 돌려라>, <이창>에서 목이 졸리거나 토막살인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다른 배우와 티피 헤드런과는 차이점이 있다. 다른 여배우들은 히치콕과 작업을 하기 전 이미 유명 배우였고, 티피 헤드런은 히치콕에 의해 발굴된 배우라는 점이다. 히치콕은 다이어트 음료 광고에 나온 헤드런을 보고 에이전시를 통해 바로 캐스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히치콕은 자신보다 31살이나 어린 생짜 신인 헤드런을 영화 <새>에 파격 캐스팅하면서 1부터 10까지 다 가르쳤다. 현장에서도 연기를 엄격히 가르친 것은 물론 당대 최고의 영화 의상 디자이너였던 에디스 헤드에게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까지 포함한 헤드런 패션 전반의 코디네이션을 부탁하는 가하면, 직접 레스토랑에 데려가 와인 마시는 법과 상류층의 음식 먹는 법도 가르쳤다. <새>의 출연을 제안할 땐 금과 진주로 된 새 모양의 머리핀을 선물할 정도로 헤드런에게 공을 들인 것이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배우이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뒤틀린 욕망을 표출할 수 있었던 걸까?
티피 헤드런의 자서전으로 돌아와 보면, 히치콕은 영화 작업 내내 그녀에게 부적절한 말과 부적절한 터치를 시도했다. 어느 날 리무진에 단둘이 남게 되자 강제로 키스를 하려는 추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사장 루 와서먼에게 이를 얘기했지만 묵살됐다고 말한다. 당시 히치콕은 최고의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히치콕의 집착은 심해진다. <마니> 촬영 중 헤드런이 혼자 있던 탈의실에 히치콕이 들어와 강제로 옷 속에 손을 넣는 등의 추행을 한 것. 그녀는 “내 기억에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릴 끔찍한 순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헤드런은 충격과 거부감에 휩싸여 그를 밀어내 간신히 그를 물리칠 수 있었다. 히치콕은 “너의 경력은 끝났다”라는 말을 남기고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 히치콕은 <마니>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블랙리스트의 여파인지 알 수 없으나 <새>와 <마니>라는 불멸의 흥행작을 만들어냈지만다시는 히치콕 작품에 등장하지 못했다. 이후 간신히 조연이나 단역으로 배우 경력을 이어갔다.
티피가 히치콕과의 사건을 처음 입을 연 시점은 이로부터 10년 여가 지난, 아직 히치콕이 생존에 있던 1973년이다. 또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인 1984년에 도널드 스포트가 쓴 전기 <히치콕> 출간에 즈음해서도 히치콕의 악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그녀와 히치콕의 관계를 담은 HBO의 TV 영화 <더 걸>이 나오면서 이 사안은 공론화됐다.
히치콕의 시대를 앞선 기발한 영화 촬영 기법과 연출은 칭송할 만하다. 그러나 빛나는 이력이 있다고 그 이면의 그림자를 감출 수는 없다. 헤드런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히치콕은 내 배우 경력을 파괴했지만 내 인생을 파괴하진 못했다”라고.
■자료제공: 유튜브 채널 <지식 아닌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