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의 정부, 메리 마이어는 왜 의문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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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의 정부, 메리 마이어는 왜 의문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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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메리 마이어. 사진|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Boston

존 F. 케네디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메리 마이어. 사진|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Boston

메리 마이어(Mary Meyer)는 미국 예술가이자 사교계 명사입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정부로도 유명하죠. 그런 그녀가 케네디가 암살된 지 1년이 지나고 산책 중 단발의 총에 맞아 쓰러져 즉사합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케네디의 또 다른 정부로 지목됐던 매릴린 먼로의 죽음처럼 음모론만 무성할 뿐이죠.

메리 마이어는 192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잘나가는 부유한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저널리스트이자 사회 운동가였습니다. 미국의 대치동이라 할만한 교육열 높은 파크 애비뉴에서 자란 마이어는 진정한 미국의 귀족이며 공주였습니다.

엘리트 코스로 자란 메리는 바사 대학을 졸업한 후 CIA에서 일하는 고위 관리 코드 마이어와 결혼했습니다. 남편이 CIA에서 일하는 만큼 집을 비우는 일도 많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아내조차 몰랐습니다. 결혼 후 세 자녀를 낳았지만 양육과 가정 살림은 모두 마이어가 도맡아야 했습니다.

메리 마이어와 남편 코드 마이어.

메리 마이어와 남편 코드 마이어.

자유롭게 미술을 공부했던 마이어는 경력이 단절된 뒤 상실감이 컸습니다. 점점 남편에게 지쳐갔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1956년 크리스마스 직전 가족에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무너져가는 결혼 생활에 비극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마이어는 남편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혼한 마이어는 여동생 부부가 사는 워싱턴DC 조지타운으로 이사합니다. 원래 집안이 좋았던 마이어는 조지타운 근처에 사는 유명인사와 정치인, 예술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냅니다. 여기서 케네디와의 극적인 만남을 갖게 되죠. 바로 이웃집 남자로 말이죠. 두 남녀의 딴생각을 모른 채 가족들끼리 가까워졌습니다.

마이어와 케네디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는 특정되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은 1961년에서 1962년 사이라고 추측합니다. ‘돌싱‘인 메리 마이어는 공공연하게 대통령인 케네디와의 관계를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케네디가 암살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마이어가 사망한 후 발견된 일기에는 케네디와의 불륜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6년 경매를 통해 8만9천 달러(약 1억 천만 원)에 낙찰된 케네디의 연애편지.

2016년 경매를 통해 8만9천 달러(약 1억 천만 원)에 낙찰된 케네디의 연애편지.

또한 두 사람의 불륜은 백악관에서 나온 편지 한 통으로도 확인됐습니다. 케네디가 암살되기 한 달 전 그가 쓴 것으로 추측되는 러브레터가 발견됩니다. 백악관 편지지에 쓴 J라는 서명까지 딱 그의 것입니다. 케네디의 개인 비서 에블린 링컨이 보관하고 있던 보내지 못한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 주에 교외를 떠나 케이프나 보스턴으로 나를 만나러 오라”고 간청하는 편지였습니다. 케네디의 연서로 알려진 편지는 2016년 경매를 통해 8만9천 달러, 약 1억 천만 원에 낙찰됩니다.

게다가 1976년 미국의 대중지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마이어의 여동생 증언을 인용해 마이어와 케네디가 오랜 기간 바람을 피웠으며 백악관 침실에서 마리화나를 폈다고 보도합니다. 두 사람은 매주 두세 번씩 만나는 사이임이 밝혀집니다.

메리 마이어의 죽음을 알린 당시 기사와 관련 사진들.

메리 마이어의 죽음을 알린 당시 기사와 관련 사진들.

대통령과 함께 많은 비밀을 공유한 여인의 말로는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케네디가 암살된 지 1년 후인 1964년 마이어는 자신이 사는 조지타운의 강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근처에서 일하던 한 정비사가 도와달라는 여성 비명을 듣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두 발의 총성. 정비사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검은 모자를 쓴 흑인이 다급히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마이어는 현장에서 즉사합니다. 왼쪽 관자놀이와 등에 두 개의 총상이 있었습니다. FBI 법의학 전문가는 재판에서 “근거리 뒤쪽에서 총이 발사됐다. 상처의 정확성과 배치로 살펴볼 때 살인자는 총기 사용에 대해 고도로 훈련된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용의자는 있었습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약 5분 후 경찰은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레이몬드 크럼프를 발견하고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그러나 총은 발견되지 않았고 마이어가 꽤 많은 피를 흘렸음에도 레이몬드 크럼프의 옷이나 몸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를 물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무죄가 선고됐고 마이어의 죽음은 미궁에 빠졌습니다. 케네디와 밀접한 관계였던 그녀의 죽음. 청부살인이었을까요? 폭력성일 지닌 누군가에 인한 우발적인 살인이었을까요?

마이어의 죽음 이후, 그가 케네디의 내연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음모론이 더욱 확산됐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죽음과 케네디 암살이 연관됐을 거라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편집장 밴 브래드리의 자서전.

워싱턴 포스트 편집장 밴 브래드리의 자서전.

게다가 마이어의 여동생의 남편, 매부는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장이었습니다. 그는 처형의 죽음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회고록 <A Good Life>에 담았습니다. 그는 마이어가 살해당한 지 몇 시간 후 누군가 마이어의 집에 침입해 그녀의 일기나 기록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케네디와의 사생활이 담겼기에 사람들의 의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마이어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CIA 개입입니다. 마이어의 전남편 코드 마이어는 CIA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일각에서는 메리 마이어가 자신의 CIA 활동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암살을 지시했다고 추측합니다. 실제로 1977년까지 CIA에서 일하던 코드 마이어는 전 부인의 죽음에 대해 “나는 메리가 한 개인의 폭행에 의해 희생됐다는 경찰 수사 결과에 만족한다. 아내의 죽음에 다른 비밀이 있다고 믿는 언론계 의혹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는 케네디 암살 연관성입니다. 시기적으로 마이어 살해사건은 케네디의 암살 1년 후에 일어났으니 합리적 의심인 셈이죠.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사람이 마리화나 등 마약을 나눴던 사이라는 폭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마이어는 향정신성의약품 LSD를 사용했고 자기 주변에 영향력 있는 고위층 인사들에게 ‘향정신성 물질을 취하면 의식의 범위가 확장되어 모든 세계 분쟁을 종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마약 관련해 케네디와 나눴던 대화가 밝혀진다면? 글쎄요...

또 다른 추측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마약에 손을 댄 마이어가 마약 조직범죄에 연루되어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추측은 스토킹입니다. 실제로 마이어가 죽기 전 몇 주 동안 스토킹을 당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스토커에 의해 살해됐을 수도 있지만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거의 없기에 유력하지 않습니다.

이런 다양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마이어의 사인은 아직 미결로 남아있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그리고 수많은 비밀을 안고 있던 여인 메리 마이어의 의문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료제공: 유튜브 채널 <지식 아닌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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