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란 제국에서 ‘이란 혁명’이 일어납니다.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원리주의에 입각한 신정 정치가 득세하며 이란 이슬람공화국을 탄생시킨 사건입니다.
마지막 왕비 파라 팔라비는 왕과 함께 이집트로 망명합니다. 왕조시대 서구 문화권과 비슷하게 자유로웠던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후 교리에 따라 사회는 보수성이 굳어지고 여성에게 가혹해집니다. 현재 이란 여성들은 외출 시 히잡을 써야하고 결혼하려면 처녀 증명서가 있어야 합니다. 또 이란은 여성 사형 최다 집행국이 되죠.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은 마지막 왕비 파라를 ‘폭정과 사치의 화신’이라고 비난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파라 팔라비 왕비는 올해 85세입니다. 워싱턴 D.C. 근처 메릴랜드주 포토맥의 작은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왕비 시절 과거의 영광을 회상하며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란에 남아있는 여성들의 처지를 걱정할 뿐이죠.
이란의 마지막 왕비 파라는 1938년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러시아 황제 로마노프를 섬긴 것으로 유명한 외교관의 아들입니다. 한 마디로 이란 귀족 명문 집안이죠. 파라는 숙녀의 예절을 익히며 자랐고 프랑스어, 역사, 문학을 배웠습니다. 당시도 이슬람교의 일부 여성은 히잡을 썼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파라가 히잡을 쓰는 것을 원치 않을 정도로 그녀는 진보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파라는 곧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파라는 유럽 최고의 건축학교인 파리 건축 연구소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1959년 이란의 왕이었던 샤 모하메드 레자 팔라비가 파리를 공식 방문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집니다.
파라는 이란 대사관에서 열리는 군주를 위한 축하 파티에 초대됩니다. 왕은 마침 세 번째 아내감을 찾고 있던 참이었죠. 첫 번째, 두 번째 아내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 즉 왕세자를 낳지 못하는 터였기 때문입니다.
파라는 단정한 모노톤 트위드 정장 옷깃에 동백꽃을 달고 대사관에 도착합니다. 화려하지 않은 차림새는 아름다운 외모를 한층 더 발산하도록 했고 겸손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치 빛이 나는 사람을 찾은 듯 모하메드는 파라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녀에게 학업 진도에 대해 물었고 파라는 왕에게 웃음으로 답했습니다.
왕과의 짧은 만남은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쌓인 학업과 여름 휴가를 준비하는 파라는 금세 잊어버리고 맙니다. 왕은 이미 모든 미래 계획을 세우고 파라에게 청혼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모하메드는 훗날 “파라를 본 순간 이미 마음을 정했다”며 그녀와의 인상적이었던 만남을 회상합니다.
모하메드는 천천히 섬세하게 파라에게 다가갔습니다. 해외 이란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명목으로 다시 파라를 초대합니다. 파라는 이것이 청혼을 위한 계획된 만남이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왕이 그녀에게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청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바뀔 것이란 것을 예감했습니다.
왕은 두 번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털어놓고 진정한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왕의 청혼을 받고 고민할 수 있는 여성은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곧바로 1959년 성대한 결혼식을 올립니다. 파라는 당시 디올의 디자이너였던 이브 생 로랑의 드레스를 입고 미국의 유명 보석상에게 공수한 325개 다이아몬드가 달린 티아라를 씁니다. 그 무게가 2kg에 달했다고 하네요.
화려한 결혼식이 끝났고 파라의 앞길은 파란만장해집니다. 두 왕비와 그들의 딸인 공주들의 질투와 시기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죠. 파라는 궁정에 남아 질투를 받는 대신 활발한 대외활동으로 바쁘게 일상을 보냅니다. 이란 여성의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해 팔레비 대학을 세웠습니다. 이란 최초의 미국식 대학이었습니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와 친구가 되어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프랑스와 이란 간 유물을 활발하게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과 국민이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왕위 계승자의 생산입니다. 1960년 20년 동안 기다렸던 왕실의 아들이 드디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출산은 고급 클리닉이 아닌 테헤란의 가난한 지역 한 병원에서 이뤄졌습니다. 왕실과 국민들의 친밀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이란 국민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파라는 왕자 둘과 공주 둘을 낳고 왕비의 지위는 하늘 높이 높아져 갔습니다.
후계자 생산에 성공해 주요 임무를 완수했으니 그녀는 더욱 활발하고 대담하게 대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명화를 수집하는 기쁨도 누렸죠. 그녀의 컬렉션은 현재 30억 달러(약 4조 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슬람 원리주의들에게 사치 왕비라고 비난을 받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아름답고 감각이 뛰어나며 여성 권리에 대해 힘쓰는 파라는 외신 기자들에게 ‘동쪽의 재키 케네디’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왕비의 여권 신장 정책으로 이란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자유롭게 자동차를 운전하며 그들의 자녀를 다른 나라로 유학 보낼 권리를 얻습니다.
1967년 왕은 세 번째 부인인 파라 왕비를 샤바나, 본격적인 왕후로 앉히겠다고 선언합니다. 세 번째 부인에게 주는 이런 영예는 7세기 이후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파격적인 일이었죠. 왕후는 왕이 사망했을 때 후계자가 왕위 계승에 적합한 나이가 되지 않았을 경우 통치자가 되는 권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파라 왕비를 눈엣가시처럼 보는 이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슬람 종교계 인사들입니다. 왕비가 서구의 방탕함을 들여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난했죠. 진보적인 왕비를 쓰러뜨리고 이슬람의 가치로 국민을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습니다. 1978년 이슬람 종교계 인사들은 원리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모아 궁정 앞에서 왕조의 퇴진을 요구합니다.
모하메드는 자신의 왕조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총탄을 발포합니다. 반 왕조 세력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이렇게 되자 군대도 왕을 배신하고 왕의 권력은 추락하고 맙니다.
1978년 12월 왕실 가족들은 긴급하게 나라를 떠났고 이집트로 망명합니다.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이들은 파라 왕비에게 왕을 독살한다면 아이들과 이란으로 돌아와 사는 것을 허락하겠다며 편지로 거래를 제안합니다. 파라 왕비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암 투병 중인 왕은 이듬해 사망합니다. 여러 나라로 떠돌던 가족들에게 비극이 이어집니다. 2001년 31세 딸 레일라가 런던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고 2011년 왕위 계승자였던 44세 알리 레자가 보스턴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파라 왕비는 자녀들이 이슬람혁명 동안 받았던 어린 시절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1979년 이후로 이란 땅을 밟아본 적이 없지만 이란의 운명을 걱정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왕조의 독재 정치가 나았을까요? 아니면 이슬람원리주의가 통치하는 지금의 이란이 나았을까요? 역사는 선악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역사의 해석은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란 여성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왕비가 교육에 힘쓰던 당시 대학에 입학한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보다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이란 여성들은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