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한국에서 10대 남성이 동급생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판사의 판결은 충격 그 자체였죠. 당시 재판부는 1심에서 남성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2심에서 판사가 “그럴 게 뭐 있느냐?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을 지어줘 백년해로시키자”라고 발언했습니다. ‘법원 중매’. 이것이 성범죄 피해자를 보는 70년대 우리의 낡은 인식이었습니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60년대 이전부터 ‘재활 결혼’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납치된 여성이 순결을 잃었다며 ‘재활’이라는 이름을 붙여 성범죄자와 결혼시키는 악습 중 악습입니다.
이런 악습에 정면으로 대항한 여인이 있습니다. 프랑카 비올라는 지역 마피아의 아들에게 납치되어 일주일 넘게 인질 상태로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후 재활 결혼을 하자는 마피아의 제안을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의 이런 결단은 강간범이 피해자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범죄를 무화시킬 수 있는 법 조항을 폐지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랑카 비올라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방 알카모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포도원을 운영했지만 궁핍한 삶이었습니다. 15세 비올라에게 여기저기서 중매 제안이 들어오자, 부모는 밥은 굶지 않겠다며 그 지역 마피아 우두머리 돈 멜로디의 막내아들 필리포와 결혼을 주선합니다. 필리포는 예쁜 비올라가 마음에 들었죠.
두 사람의 약혼 일주일 후 필리포는 사고를 칩니다. 태생이 마피아 아들이니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예비 신랑은 절도 혐의로 기소돼 1년간 옥살이를 합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어디서 무얼 하는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올라의 아버지는 딸을 필리포와의 정략결혼에서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비올라의 자유는 짧았습니다. 1년 후 필리포가 근처에서 목격됐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석방된 필리포는 비올라가 다른 남성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납치 계획을 세웁니다. 어느 날 필리포는 마피아 일당과 농부의 집에 들이닥쳐 비올라를 납치하고 알 수 없는 장소로 데리고 갑니다.
여린 외모지만 마음은 강인했던 비올라, 납치 결혼이라는 상황이 눈앞에 놓였지만 절대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필리포는 비올라를 시골집에 8일 동안 감금하고 결혼에 동의하도록 강요합니다.
당시 실제로 시칠리아 법은 여성 강간에 대한 처벌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강간 피해자임에도 결혼 전 처녀성을 잃었다는 이유로 ‘도나 베르고나타(donna vergognata)’ 글자 그대로 ‘부끄러운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2차, 3차 가해를 가한 악습입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던 비올라는 결혼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풀려난 직후, 경찰서로 달려갑니다. 당시 통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용기있는 행동이었지요. 비올라는 자신은 마피아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납치와 강간 혐의로 그를 고소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경찰에서 진술서를 작성하고 필리포 무리를 고소하면서 그녀와 부모는 지속적인 마피아의 위협이 시달립니다. 자그맣게 농사를 짓던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인 포도원도 방화로 잿더미가 돼 버렸습니다.
당시 사회 통념을 거스르는, 그야말로 큰 화제를 일으킨 소녀의 발언은 지역 언론을 움직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탈리아 의회에서까지 거론되고 해외 매체마저 주목합니다. 당시 두 사람만 모여도 비올라의 재판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어떤 숭배자도 시칠리아의 프랑카만큼 사람들을 부르지 못한다”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해당 사건을 보도합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의미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낸 재판 결과는 비올라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필리포는 11년형을 선고받고 그의 공범 7명은 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66년 프랑카 비올라는 납치와 강간을 당한 후 범죄자와 ‘재활결혼’을 거부한 최초의 이탈리아 여성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이탈리아의 문화적 진보와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물론 금방 법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강간범이 피해자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범죄를 무화시킬 수 있는 법 조항은 1981년까지 폐지되지 않지만, 새로운 판례를 만든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결과였습니다.
비올라의 극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1970년 오르넬라 무티 주연의 <가장 아름다운 아내>라는 영화로 제작될 정도였습니다.
이후 비올라는 1968년 어린 시절 친구였던 회계사 주세페 루이시와 결혼합니다. 루이시는 10여 년 후 출소할 필리포가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그때 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10년을 사는 게 훨씬 낫다“라고 말하며 비올라에 대한 강한 애정을 전했습니다.
필리포는 어떻게 됐을까요? 10년 후인 1976년 감옥에서 풀려나긴 했습니다. 그러나 마피아 짓을 하다 2년 후 총에 맞아 객사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용기 있는 부부 프랑카 비올라와 주세페 루이시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부부는 이탈리아 전역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여성 인권과 해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했고 악습 폐지에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부부는 다복하게 자녀 셋을 낳고 그들의 고향인 알카모 마을에서 여느 가정과 다름없는 일상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