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니 ②

영화에 관한 정신과 의사들의 대화

‘오펜하이머’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니 ②

박성근 윤병문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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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정신과 전문의가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정신분석학적 시각과 정신의학 이론을 토대로 다각도로 분석해 보는 코너입니다.]

<오펜하이머> 보도 스틸

<오펜하이머> 보도 스틸

▶‘IQ는 높은데 EQ가 별로? ‘아카데미 휩쓴 오펜하이머①[영화에 관한 정신과 의사들의 대화] 에서 이어집니다.

박성근 : 오펜하이머가 자기애성 성격인 건 맞다고 봐. 대신 나는 다른 인물, 특히 스트로스도 자기애의 관점에서 바라봤어. 한마디로 말해 이 영화는 나르시시즘에 관한 영화라고 할까? 그러니까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둘 다 자기애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그럼 자기애가 과연 뭐냐는 근본적인 얘기부터 좀 해봐야겠지.

윤병문 : 자기애는 자기심리학이라는 학파에서 많이 얘기하죠. 처음에 프로이트가 말한 자아-이드-초자아로 나누어 분석하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은 학문이 발전하면서 자아심리학이라고 불렀죠. 대신 인간의 심리를 계속 연구하다 보니까 한 사람의 심리구조, 즉 자아의 구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주변 인물, 그러니깐 어떤 대상과의 상호작용도 중요하다고 본 거죠. 그러면서 대상관계이론과 자기심리학이 발전되어 왔고요.

박 : 그렇지. 자기심리학 이론으로 자기애를 설명하면 이 영화의 치밀하고 복잡한 구조가 이해돼. 좀 어렵지만 자기애에 대해 설명을 좀 해볼게. 갓 태어난 아기는 인지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에 세상엔 자기밖에 없는 것으로 느껴. 마치 엄마 배 속에 있을 때처럼 말이지. 근데 자기가 배가 고파서 우니까 먹을 것이 들어와. 엉덩이가 축축해서 우니깐 뽀송뽀송해져. 신기하지. 아기는 자기가 전지전능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 사실은 엄마가 다 해준 건데 말이야.

윤 : 차츰 엄마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이자관계, 아빠까지 눈에 들어오면 삼자관계가 되죠.

박 : 그렇게 인지하기 전까지 아이는 자폐적이면서도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걸 1차적 자기애라고 불러. 하지만 윤 원장 말대로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준 것이며, 자신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면서 아이의 자기애는 상처를 입어. 그걸 보완해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야. 아이가 옹알이를 하면 엄마가 너무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지. 걸음마라도 하면 온 가족이 박수치고 아주 난리가 나. 이런 걸 거울반사라고 부르는 데 이걸 통해서 아이는 손상된 자기애를 어느 정도 회복하게 돼. 또 다른 방식은 아기가 자기 주변의 대상을 전능한 존재로 이상화하는 거야. 우리 엄마는 요리도 잘 하고 우리 아빠는 힘도 세요. 그런 전능한 부모가 자기를 돌봐주니깐 아기 자신도 전능하다며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을 회복하게 되는 거지. 이런 거울반사와 이상화전이를 2차적 자기애라고 불러.

윤 : 그런 발달의 과정 어디에선가 문제가 생기면 자기애가 지나치거나 부족해질 수 있는 거죠.

박 : 그렇지. 오펜하이머는 1차적 자기애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스트로스는 2차적 자기애가 완성되지 못한 사람으로 보였어. 이게 무슨 얘기냐면 우선 오펜하이머는 태생적으로 잘난 사람이야. 집안도 유복했지, 어려서부터 똑똑했지, 탄탄대로였거든. 계속 인정만 받아왔을 테니깐 좌절이라는 걸 몰랐을 거야. 자기애 성격은 두 타입으로 나누는데 이런 경우는 오만한 유형이야. 흔히 보는 나르시시스트 환자들이 이런데, 꼭 과대망상증 환자 같아. 근거도 없이 그냥 자기가 제일 잘 났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며 살지. 또 다른 타입은 예민한 유형이야.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에 너무 민감하지. 이건 거울반사나 이상화전이 같은 게 부족해서 2차적 자기애가 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한마디로 칭찬을 잘 못 받고 살아온 것을 보상받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고 해.

<오펜하이머> 보도 스틸

<오펜하이머> 보도 스틸

윤 : 스트로스처럼 말이죠?

박 : 맞아. 우리가 ‘자존심이 세다’는 말을 하는데 이게 두 가지 의미로 쓰여. 하나는 자존심이 강해서 자만감에 빠져있는 경우지. 다른 하나는 자존심에 상처받는 걸 싫어해서 누가 무시하면 버럭 하는 경우이고. 전자가 오펜하이머이고 후자가 스트로스야. 오펜하이머는 “대답이 별로였다”며 닐스 보어라는 위대한 인물한테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똑똑하면 많은 게 용서된다”는 말도 하고, 동위원소 수출 건에 대한 회의에서 스트로스한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심지어 자신의 재능을 몰라주는 교수를 독 사과로 죽이려 들기까지 하지. 상당히 오만해.

윤 : 반대로 스트로스는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하죠. 청문회를 통해 장관으로서 인정받길 기대했고요.

박 : 누가 ‘스트로스씨’라고 부르자 “제독이요”라며 정정해주지. 살아온 과정 자체가 오펜하이머와는 대조돼. 가난한 집안 태생이라 과학 공부를 그만두고 구두판매원이 되었는데, 오펜하이머가 ‘미천한 구두판매원’이라고 표현하니깐 발끈하지. 스트로스는 과민한 나르시시스트라고 볼 수 있어. 사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한 줄로 말하자면 오만한 오펜하이머한테 무시당한 과민한 스트로스가 복수를 하는 과정이거든.

윤 : 자기애를 지키기 위해서 둘이 힘겨루기를 한 것 같죠.

박 : 놀란 감독은 영화를 간단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 이 영화도 알고 보면 꽤 복잡해. 영화는 첫 장면이 중요한데, 오펜하이머 얼굴에 ‘분열’이라는 자막이, 스트로스 얼굴에 ‘융합’이라는 자막이 나오지. 사전적으로야 핵분열과 핵융합, 그러니까 원자폭탄 개발과 수소폭탄 개발을 뜻하는 거라지만, 사실 두 인물의 인생 과정을 보여주는 단어로 보이기도 해. 오펜하이머가 유수의 과학자들을 한데 모아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로브스 장군과 정치인들한테 이용당한 셈인 거지. 자기가 제일 잘 난 줄 알았는데 말이야. 게다가 청문회에 가서는 동료 과학자들의 배신도 이어지지. 자기애가 분열되는 거야. 오펜하이머가 블랙홀 설명을 할 때 이런 말을 해. “별이 클수록 소멸의 과정도 더 격렬하다. 중력이 너무 응축되면 모든 걸 집어삼킨다”라고. 자기애가 너무 커서 자아가 분열되는 결과가 되는 거지.

윤 : 반대로 스트로스는 융합이 되는 건가요?

박 : 이 사람은 자기애가 부족한 상태에서 계속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그러니까 거울반사를 받으면서 점점 과대해져 가는 거거든. 그 덕에 구두판매원에서 제독을 거쳐 장관후보자까지 올라간 거지. 하지만 끝없이 인정받길 원해. 그걸 안 해준 게 오펜하이머야. 반면에 아인슈타인은 스트로스에게 이상화의 대상이야. 가장 위대한 과학자니깐.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일을 두고 아인슈타인을 욕하는 게 아니라 오펜하이머를 의심하지, 이렇게 자기애를 키우기 위해 스트로스는 계속해서 인물과 권력을 규합해. 이런 말을 하잖아? “힘은 그림자 속에 머무는 거라고.” 융합이지. 하지만 이쪽으로 치우친 과민한 자기애도 결국엔 실패하지. 스트로스도 장관이 되진 못하잖아. 한마디로 적당한 자기애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만, 그게 지나치면 때론 적을 만들고 스스로 상처를 받게 된다는 거야.

윤 : 저는 여기서 오펜하이머가 이런 식으로 평가받게 되는 이유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를 표현하는 말이 원자폭탄의 아버지잖아요? 상징적인 아버지라는 거죠. 그 아버지라는 단어는 무의식적인 질서 같은 거예요. 비슷한 걸로 오펜하이머가 하는 말이 “난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하죠. 이것도 권위자를 상징해요. 그런데 그런 오펜하이머가 결국엔 몰락하잖아요?

박 : 그렇지.

<오펜하이머> 보도 스틸

<오펜하이머> 보도 스틸

윤 : 프로이트가 쓴 <토템과 터부>라는 책에서 보면 원시사회의 아버지가 나와요. 아들들이랑 대립하다가 아들들이 아버지를 죽이죠. 여자를 포함해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있던 아버지를 죽인 다음에 아들들이 보니까 너무 무질서해진 거죠. 그러니깐 이제 협정을 맺어요. 서로 경쟁만 하다가 조직체가 완전히 붕괴되는 걸 막기 위해서 죽은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요. 예를 들어 근친상간을 하면 안 된다는 터부가 만들어지면서 이제부터는 다른 여자는 포기하고 자기 여자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지죠. 결국 아버지는 죽은 뒤에야 권위가 세워지는 거예요. 권력과 힘이 있는 아버지는 경쟁자이지만, 죽고 나면 존경을 받게 돼요.

박 : 그러니까 오펜하이머도 몰락해서 힘이 없어지고 나니까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추앙을 받게 되는 거군. 아인슈타인도 그런 얘기를 하지. 어디 가서 강연한 뒤 연어구이나 먹고 훈장이나 받으면서 지내게 될 거라고. 실제로 그렇게 되거든.

윤 : 게다가 죽고 나니까 자신에 대한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거죠.

박 : 난 이 영화의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도 오만하다고 봤거든. 신이잖아. 그런데 윤 원장 생각은 사후에 이상화되고 심지어 신격화까지 된 거라는 거네. 근데 난 또 다르게 본 것이, 영화를 보면 오펜하이머의 단점들이 그대로 다 드러나. 이건 성웅 이순신 같은 위인전 얘기가 아니야. 머리는 똑똑할지 몰라도 성격적으로 결함도 많고 인간관계도 그다지 좋지는 않아. 자기애성 성격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타인에 대해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잘 느끼지 않는 거거든. 남편이 있는 여자를 꾀어서 임신을 시킨다거나 오래된 애인한테 그 사실을 무덤덤하게 얘기하고는 매정하게 차버리지.

윤 : 오늘이 끝이라고 하면서도 필요하면 또 언제라도 올 수 있다고도 하죠.

박 :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자폭탄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해. 그 잘난 오펜하이머도 사실 들여다보면 복잡한 면도 있다는 거야. 인상적인 장면이 청문회 때 발가벗은 채 앉아있는데 진이 나타나서 노골적인 성행위를 해. 그만큼 오펜하이머는 그 자리에서 수치심을 느꼈다는 걸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거지. 초반부에 오펜하이머가 “재판장님”하고 부르니까 청문회 위원들이 “우린 판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해. 삶을 재판받는 기분이었을 거야. 그리고 스트로스도 똑같았어. 장관 청문회에 들어가면서 “삶을 재판받는 기분”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를 단순히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융합, 컬러와 흑백, 오펜하이머의 시각과 스트로스의 시각을 대비하면서 한 사람의 입체성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

윤 :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오히려 오펜하이머가 무의식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원자폭탄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이 어떤 사죄의 행동을 하게끔 했다고 할까요?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거나, 더 중요하게는 초자아가 스트로스라는 대리인을 통해 자아를 벌준 것이죠. 그래서인지 청문회 자리를 재판받는 것처럼 느끼고, 검사의 공격에 그저 당하고만 있어요. 이런 심리는 사실 무의식적으로 면죄부를 받는 것이기도 해요. 어린아이가 컵을 깼을 때 엄마한테 크게 혼나고 나면, 깬 실수에 대한 잘못은 이제 다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것과 같죠.

박 :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네.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은, 여러 측면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영화인 것 같아.

<오펜하이머> 포스터

<오펜하이머> 포스터

Key Word : 성격장애(Personality Disorder)
성격장애란 성격상으로 문제가 심각하여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주는 경우를 말합니다. 총 10가지의 성격장애가 있는데, 이들은 특징적인 패턴에 따라 A, B, C의 세 군으로 분류됩니다.
A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괴팍하고 기이한 특성을 보이는데, 끊임없이 타인을 의심하는 편집형 성격, 세상에 무관심하여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분열성 성격,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하며 기행을 일삼는 분열형 성격 등이 포함됩니다. B군의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워 행동을 예측하기 힘든 특성을 보이는데, 남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피해를 주는 반사회성 성격, 대인관계와 정서상태가 수시로 변해 종잡을 수가 없는 경계선 성격, 감정 표현이 극적이며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연극성 성격,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믿기 때문에 남들을 무시하면서 늘 존경받기를 바라는 자기애성 성격 등이 해당됩니다. 그리고 C군 환자들은 소심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로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것을 두려워 해 인간관계를 꺼리는 회피형 성격, 자신감이 없어 누군가로부터 계속 도움을 받으려는 의존성 성격, 정리정돈과 완벽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강박성 성격 등이 있습니다.

박성근과 윤병문은 정신과전문의이다. 고려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3년 선후배 사이로 같은 대학병원에서 정신과전문의 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각각 마음과마음정신건강의학과 구로점과 용인수지점의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두 사람 모두 영화를 좋아한다. 네트워크 원장 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을 잡아 영화에 관해 수다를 떨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이 글이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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