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인기 비디오게임의 이미지를 활용해 이민세관단속국(ICE) 신입 요원 모집에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온라인 게이머 문화를 정치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 의회매체 더힐 등 현지언론은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비디오게임 이미지를 정치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단순한 유머나 밈(meme)을 넘어, 특정 문화 집단을 결집시키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6일(현지시간) 미 백악관 공식 X(구 트위터) 계정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게임 ‘헤일로(Halo)’의 주인공 ‘마스터 치프(Master Chief)’로 묘사한 인공지능(AI) 생성 이미지가 올라왔다. X갈무리
지난 26일(현지시간) 미 백악관 공식 X(구 트위터) 계정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게임 ‘헤일로(Halo)’의 주인공 ‘마스터 치프(Master Chief)’로 묘사한 인공지능(AI) 생성 이미지가 올라왔다. 별이 빠진 성조기를 배경으로, 군용 갑옷을 입은 트럼프가 에너지 검을 든 채 경례하는 장면이다. 게시글에는 미국 게임 소매업체 게임스톱(GameStop)의 슬로건인 “플레이어에게 힘을(Power to the players)”이 인용됐다.
이어 국토안보부(DHS)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 공식 계정이 비슷한 이미지를 올렸다. “침입을 막아라( Stop the Flood)”라는 문구와 함께 ‘헤일로’의 전투 장면을 차용해 ICE 모집을 독려하는 게시물이었다. 게임 속 외계 생명체에 이민자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국토안보부(DHS)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 공식 계정에 올라온 게임 이미지. X갈무리
영국 일간 가디언은 백악관에 해당 게시물에 대해 문의하자 쿠시 데사이 백악관 부대변인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게이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며 “그는 진정으로 ‘플레이어에게 힘을 주는’ 지도자”라는 답변을 보내왔다고 보도했다. 해당 게임의 제작사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게시물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가디언은 “다양한 연구에서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범죄를 적게 저지른다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자를 침략자로 묘사하며 (ICE 단속을) 국가를 구하는 영웅적 노력으로 묘사한다”면서 “백인 우월주의 메시지를 교묘하게 숨겨놓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트럼프 진영의 장기적인 ‘온라인 문화 동원 전략’의 연장선으로 본다. 트럼프와 그의 핵심 참모 스티브 배넌은 이미 2016년 대선 과정에서 게이머 커뮤니티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경험이 있다. 배넌은 과거 다중접속 온라인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가상화폐 거래 사업에 관여하며 게이머 문화를 익혔고, 이들 중 상당수가 ‘뿌리 없는 백인 남성’으로 구성돼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여성과 소수자를 공격하던 온라인 커뮤니티가 현실 정치로 전환될 수 있음을 확인했고, 이를 트럼프 캠페인 전략에 반영했다.
이후 트럼프 진영은 ‘밈 전쟁’이라 불리는 온라인 여론전술을 적극 구사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건강 이상설 같은 가짜 정보가 해시태그(#HillaryHealth)를 통해 확산됐고, 인터넷 밈으로 포장된 트럼프 지지 이미지들이 대선의 주요 선전 수단으로 활용됐다. 당시 일부 연구자들은 “트럼프는 밈을 통해 전통적 정치 언어 대신 감정과 분노를 전파했다”고 평했다.
라메시 스리니바산 UCLA 정보학과 교수는 가디언에 “이미 양극화된 청중을 분노시키거나 흥분시키는 이미지나 텍스트를 게시하는 선택은 증오심과 선동적인 콘텐츠를 게시하여 SNS에서 관심을 끄는 트럼프의 전략”이라며 “알고리즘에서 더 많은 선택을 받을 콘텐츠를 게시하는 것은 트럼프 팀의 전략이며 부정적 포퓰리즘의 예”라고 짚었다.
실제로 2020년 대선 패배 이후에도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을 중심으로 이런 전략을 강화했다. 2025년 재집권 이후에는 백악관과 연방 기관 공식 계정이 직접 밈 생산의 전면에 나섰다. 여기에 2022년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X)를 인수한 뒤 트럼프 계정과 각종 극우 계정을 복원하면서, 온라인 밈 정치의 기반이 한층 넓어졌다. 머스크는 스스로를 ‘게이머’라고 자처하며 게임 밈을 자주 게시했고, 플랫폼 내 혐오 발언 규제를 완화해 트럼프식 온라인 선전이 확산되는 환경을 조성했다.
최근에는 정부 공식 계정이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주제곡에 맞춰 ICE 단속 장면을 편집한 영상까지 공개했다. “다 잡아라”라는 문구와 함께 이민자 체포 장면이 삽입됐다. 논란이 일자 포켓몬 컴퍼니 인터내셔널은 “지식재산권 사용 허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BBC에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해당 영상은 여전히 삭제되지 않은 상태다.
미국 디지털 마케팅 전문가 마라 아인슈타인은 이번 ICE의 온라인 모집 캠페인을 두고 “절박하고 취업난에 내몰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이 마치 다단계 마케팅 같다”면서 “이런 종류의 광고는 사람들의 불안과 결핍을 이용해 ‘국가를 구한다’는 대의로 포장된 환상을 판다”고 지적했다. 결국 가장 취약한 집단이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말단 노동력으로 흡수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전략이 단기적 관심은 얻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정치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며 사회 분열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브리엘 발무스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게이머 문화와 극우 정치가 결합할 경우, 증오 표현이 정상화되고 민주주의의 토대가 약화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