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 책을 읽는 것은 고역이다. 독서삼매경은 그만큼 공력이 있는 사람의 즐거움일 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결단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옛 어른들의 경구가 날씨에 눌려 물러지는 것은 아니다. 정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 수은주는 평년작을 웃돌고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으니. 역으로 이럴 때일수록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도를 넘는 분노를 자제케 하는 왕도인 셈. 결국 외부 상황의 변화에 내 중심을 잡게 하는 보약인 셈이다.
마침 이럴 때 반가운 이름이 있어 책에 눈을 돌린다. 한수산!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와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인간의 문제에 천착해온 작가 한수산(57)이 우리 근현대사의 피멍울로 남아 있는 피폭 한국인들의 삶에 대한 문학적 복원에 매달린지 15년만에 장편소설 '까마귀'(전5권)를 들고 미국에서 일시 귀국했기 때문이다.
제목의 '까마귀'는 1945년 8월 원폭이 떨어진 거리에 그대로 방치된 채 폭염에 썩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의 주검에 달려든 까마귀의 악다구니에서 따온 것. 1996년 '사랑의 이름으로' 이후 약 8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자 1999년 단편집 '4백년의 약속'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현재 1년 예정으로 미국 UC 버클리 대학 한국학연구소에 방문학자로 머물고 있지만 책 출간을 기념해 잠시 귀국한 한수산의 말처럼 ‘현실적으로 무력한 이야기꾼’이기에 그의 이야기 역사를 다시금 배울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이야기관데 글을 읽는 재미 또한 놓치지 않았을 테니.
그와는 달리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해온 전경린의 네팔 여행 에세이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도 기대되는 작품.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소설집 두권, 장편소설 다섯권, 어른을 위한 동화 한편 등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해 온 그녀였다. 이를 두고 우리 시대의 불꽃 같은 여성 작가란 이름도 얻었다.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이야기들을 잘도 만들어낸다 싶더니 속으로는 많이 지쳤던 듯. '지금 당장 어디로든 여행을 다녀와 달라'는 출판사의 제의를 받고 지난해 12월부터 한달여 훌쩍 네팔을 다녀왔다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번 출간된 네팔 여행 에세이다. 전경린에 있어서는 첫번째 산문집이다.
그 여행을 통해 수없이 많은 불편을 겪은 듯.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네팔의 남루한 현실에서 생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는 부분이 백분 이해되기 때문. 그들의 가난은 마음 아프지만 노는 것이 주가 되는 네팔의 천진한 일상과 비교할 때 우리의 일상은 사는 일의 형식과 문화를 너무 살찌워 오히려 삶을 박탈당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가슴을 뜨끔하게 한다.
더 더운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안도현의 여섯 번째 동화 '민들레처럼'이 좋을 듯 하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연어'를 비롯해 '사진첩' '짜장면' 등 어른을 위한 동화로 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던 시인이기에 검증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듯. 바람을 이용해 씨앗을 퍼뜨리는 민들레의 생태에 주목한 시인은 바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흔들어 내면의 바람으로 꽃씨를 날려 보내는 민들레의 여행담을 맑은 언어로 담아냈다. 그것으로도 만족을 못하는 사람은 금기를 사랑으로 승화 시켜 수많은 시청자를 사로잡은 '러브레터'가 어떨 지. 눈을 감고 작가 오수연의 필치를 따라 자신만의 아바타 ‘안드레아’와 또다른 사람을 꿈꿔보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우리 조상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현대어로 풀어낸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이 그것. 한문으로 쓰여져 현대 독자를 잃어버렸던 고전수필 64편을 쉽게 읽히는 일상어로 풀어냈다. 설총, 최치원, 이규보, 이수광, 박지원, 허균, 김시습, 이황, 이이 등 교과서 속에 등장했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문인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선조들의 해학과 풍류, 재치가 묻어나는 장르가 수필이다.
여름의 광기 어린 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광기로 맞짱 뜨는 보다는 한발 물러나 여유를 찾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런 현명함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장편 '까마귀'
총 5권인 이 작품은 크게 전반부의 하시마 탈출과 후반부의 원폭 투하 과정 등 크게 두 갈래의 서사적 얼개 아래 ‘지옥의 섬’ 하시마로 끌려간 남성들의 고난과 비극적 사랑, 하시마 탈출, 나가사키의 조선소와 지하터널,형무소 등에서 다시 일제의 ‘인간 총알받이’가 됐다가 피폭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과정을 속도감 있는 문체로 그렸다.
전5권/한수산 지음/해냄
민들레처럼
씨앗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찍어두는 점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40km를 넘는 거리를 여행한다는 민들레의 어린 꽃씨의 마음을 읽어냈다. 작가는 두려움을 이기고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어린 꽃씨의 비장한 각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서양화가 이종만씨의 시원스러운 삽화가 곁들여져 글 읽는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안도현 지음/이롬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백운 이규보는 ‘여색’이라는 글에서 “여색은 귀여워해줘도 나를 뿌리치고, 아무리 사랑해줘도 곧 내가 조심해야할 대상이 된다.”라며 경계했다. 허균은 ‘아내 숙부인 김씨 행장’에서 죽은 아내에 대해 “체온이 오히려 따뜻해서 차마 그대로 묻을 수가 없었다”라고 슬픔을 표시했다. 책은 ‘생활의 예지’, ‘오는 정 가는 정’ 등 모두 7장으로 나뉘어 있다.
강희맹 외 지음/송광성 번역/을유문화사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포카라의 훼아 호수 주변, 부처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 등 여정에 따라 3부로 구성됐다. 3부를 구성하는 57개 장을 ‘쉰일곱개의 불꽃접시’라고 부르고, ‘삶과 죽음과 애욕과 운명을 향해 활짝 열려진 네팔의 힘이 서린 접시들을 밤의 강물에 띄워 보낸다. 그 중 몇개가 당신의 수로로 흘러들기를 바란다’고 적고 있다.
전경린 지음/이가서
러브레터
그림과도 같은 영상, 한마디 한마디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대사로 상징되는 작가가 드라마에서 미처 전해주지 못한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담아 동명의 소설을 냈다. 각박하고 여유없는 세상, 아련하게 잊고 지내던 사랑의 감정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해줄 소설이다. 드라마에 빠졌던 사람들은 물론 드라마를 접하지 못한 독자에게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될 듯.
오수연/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