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침묵을 잔칫날 돌리는 떡처럼 함께 나누는 삶

자주 뵙는 어른께 근황을 여쭈었더니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요즘 아주 쿨해.”
쿨하게 사신다는 뜻인데, 경쾌하고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에 어떻게 사시기에 그런 것인가 싶었다. 그분 말씀이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홀가분하고 즐거울 때가 없었다고 한다. 모든 짐을 버리고 이부자리 한 채와 간단한 식기만으로 사시기 때문이란다. 그것도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집 한 채 지어놓고 그 공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그분이 사시던 집은 내가 알기에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부촌이다. 그곳의 저택에 평생의 흔적이 묻어 있는 각종 문명의 도구들과 함께 살아오셨다. 그것들을 다 내버려두고 혼자서 가장 단순한 생활 도구만으로 살다 보니,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손님이 찾아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좀더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생명감으로서의 외로움이라고 하신다. 생명감을 지닌 외로움이라니, 자신의 감정의 한쪽을 떼어내서 이분은 새로운 생명을 만드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봄날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개나리의 가지를 꺾어서 아무렇게나 땅에 박아놓으면 거기서 꽃이 피듯이 말이다.
외로움을 손님으로 맞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사랑을 잃어서 슬픈 외로움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그런 외로움이 아니다. 그냥 혼자 있으니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있는 외로움. 그 외로움과 친해지니 책도 읽히고, 평화로운 풍경도 보인다.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기던 산속 나무들의 나이테가 떠오르고, 그 속에서 마음으로 자라고 있는 꽃도 보이고, 종종걸음을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이 보인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 외로움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저 침묵을 동네 잔칫날 돌리는 떡처럼 나누어 드시나 보다.
새가 둥지를 틀 듯 마음의 공간을 만들며 온기를 키우는 조촐한 삶
“한 두어 달 이렇게 살아보려구, 허허허… 놀러 오면 같이 함바집에 가서 삽겹살이나 구워 먹자구. 기가 막혀, 그 맛이.”

그 함바식당의 주인이 좀 괴상한 사람인 모양이다. 이분이 나름대로 난로 연구가인데, 우리나라의 북쪽, 즉 북조선은 추운 곳이어서 난로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분이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김일성의 난로와 구조나 외관이 같은 난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난로라! 듣기만 해도 온몸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아이템이다. 이 난로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히다고 한다. 추운 벌판에 컨테이너로 지어진 함바식당, 눈이 내리고, 김일성표 난로가 주석궁 같은 훈훈함을 전해주고, 바람이 불고, 다정하고 느린 사람들이 소주 한잔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 공간, 정이 강물처럼 흐른다.
‘그래, 정말 쿨하게 사시는구나’ 싶어 나름대로 상상력의 수리부엉이를 그 공간에 띄웠다. 달이 뜨고,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의 몸을 더듬는다. 생명이 탄생할 것이다. 신선하고 아름다운 생명이. 난로에서 불타오르는 온기는 바로 인간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에너지의 근원인 심장에서, 즉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이다. 불길이 살아 있는 인간은 따뜻하고, 그 인간 옆에는 자연히 사람들이 머문다. 그 온기를 느끼기 위해서다. 한겨울에 심장이 살아 있는 인간이 그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가 둥지를 틀 듯이 그런 마음의 공간을 선생은 지금 만드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락함을 버린 삶, 바보 같은 삶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느림의 미학
“올해는 좀 천천히, 좀 천천히 살아보려구 해.”
그 말씀을 나는 “올해는 좀 바보처럼 살아보려구 해”라고 해석한다. 요즘은 이상하게 천천히, 천천히를 너무나 빨리 말하는 것 같아 그 말의 신선함이 사라졌다. 시쳇말로 쥐나 개나 다 느림을 이야기하면서 실천을 못하고들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올해는 선생이 좀 바보처럼 사셨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바보란 무엇인가? 조금 모자란 사람을 폄하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바보들의 공간의 중심에는 느림이 있다. 바보는 약삭빠르지 않고, 바보는 일관성이 있다. 바보 온달의 우직함이 장군의 기개로 성장했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에디슨, 난로가 너무 가까워 몸이 더워지자 하인을 시켜 난로를 뜯어 옮겨버린 그 바보 같은 에디슨이 문명의 발명을 한다. 왜 자신이 잠시 뒤로 물러앉을 생각을 못했을까?

일관성이 있고 단순한 생각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성인 예술을 탄생하게 한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 예술이란, 사랑이란 이런 일관성과 바보 같은 마음이다. 이 바보 같은 사람들의 전형이 바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바보처럼 계산하지 못한다. 오죽 하면 사랑 때문에 죽어버리고 할까? 실연하고 한겨울에 한강다리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지는 인간들을 어찌 미워만 할 수 있겠는가? 사랑에 빠진 바보들은 제 몸을 아끼지 않는다. 저는 추워 죽겠는데 연인이 추울까 싶어 코드를 벗어주는 이 바보 같은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선생은 바보같이 온갖 안락한 가구와 식구, 그리고 편안한 교통편을 다 버리고 외로운 공간에서 두 달 정도 사신다. 바보 같은 선생이 부럽다. 바보같이.
천천히, 천천히 무엇인가 완전히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쿨한 것이다!
촛대에 초를 끼울 때는 그 초가 완전히 타버린 후다. 적당히 타거나 타다 말면 새로운 초를 끼울 수가 없다. 무엇인가 완전히,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쿨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단 한순간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하기 시작했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타인에게 기쁨을 준다. 선생은 아마 마음속에 촛불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그동안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여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계신 것 같다. 그분이 사는 공간은 파주의 해이리 마을이고, 그분의 집은 바로 음악실이다. 봄이 되면 그분의 음악실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악도 듣고 차도 마시고,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것 같다. 이 여백의 시간을 그분은 이렇게 사용하신다. 겨울이 깊다. 이 추운 날,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흐르는 생명의 물소리가 들린다. 마음에 품은 것이 많은 사람은 오늘의 시련을 견딜 뿌리가 깊은 나무다.
겨울 나무가 헐벗은 것이 아니라 단출한 것이고, 단출한 살림 도구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쿨한 것이며, 달의 반쪽은 빈 것이 아니라 완성으로 가는 도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 그리운 사람이여! 세월은 쫓아가지 마시고, 그 세월에 머물러 즐기세요. 가긴 어딜 갑니까?
안분지족(安分知足)에서 발견한 쿨한 삶

‘쿨’한 것이 세련된 가치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쿨하다는 건 아무래도 개인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 ‘나’ 혹은 ‘너’의 개념일지언정 ‘우리’와는 좀 멀다.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관해서라면 귀를 기울이지만, 애국심이니 사회 정의니, 가족의 사랑이니 하는 화두는 좀 ‘깨는’ 얘기 취급받기 십상이다. 사랑도 그 비슷한 양상. 상대에 대해 좀더 관심이라도 보일라치면 분위기는 바로 생뚱맞아진다. ‘당신 참 쿨하지 못하군.’ 영화든 뭐든, 뭔가에 감동받아 눈물 찍, 콧물 찍 하더라도 선뜻 동조자를 구하기 힘들다.
오히려 촌스럽다는 식의 ‘쿨한’ 반응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언제부터 쿨해졌을까? 쿨하다는 것의 실체가 뭘까? 좋아도 안 좋은 척하는 것? 관심 있는데 관심 없는 척하는 것? 슬픈데 안 슬픈 척 하는 것?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면서, 대체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리움의 시인’ 원재훈. 그가 최근 펴낸 에세이집 「내 인생의 밥상」을 재밌게 읽었다. 그가 풀어놓은 음식에 얽힌 추억담들을 엿보면서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정(情). 정이라… 쿨하다는 사람들의 금기사항 아니던가? 쿨한 것과 ‘쿨한 척’의 경계, 아니 쿨하다는 것의 실체에 대해 궁금증이 솟구칠 무렵, 그래서 시인 원재훈에게 숙제를 내기로 했다. 그가 보내온 에세이를 읽으면서 옛 성현들이 말했던 안분지족의 삶을 떠올렸다.
많이 가지려고 애쓰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 어쩌면 그건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느리게 살기, 느림의 미학과도 맥이 닿아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집착하지 않기’ ‘연연하지 않기’는 ‘쿨함’의 핵심이라던데…. 그렇게 따지면 ‘느리게 살기=쿨한 삶’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도 있겠다. 집착하지 않는 느린 삶 속에서 소소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꼭 그렇게 쌀쌀맞고 차가울 필요는 없지 않겠나!
이미지화된 ‘쿨함’이라는 건 영화나 드라마 속에나 있을 확률이 높다. 현실에서는 일종의 모방적 쿨함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건, 그런 피상적인 이미지가 쿨함의 실체는 아닐 것이라는 것. 쿨한 척하면서 ‘차갑게’ 살아가느니, 쿨하게 살면서 ‘정겹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삶이라는 연주에 명령어 하나를 내린다. 안단테(andante : 느리게)!
진행 / 박연정 기자 사진 / 지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