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플라스틱 카메라 하나가 있습니다.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다가 문득문득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낡은 카메라가.

“나는 앞만 보고 가겠어. 돌아볼 과거의 기억 따위, 나는 갖고 있지 않아.”
악바리가 되어 오늘을, 내일을 뛰어다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느새 여름이 성큼 와 있다는 것을. 아파트 단지 곳곳에 녹음이 우거져 있고, 잎사귀마다 싱그러움을 머금고 있는 포플러 나무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내려와 쉬고 있다는 것을.
그럴 때면 참 난감해지지요. 지금껏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거든요. 이렇게 서둘렀던 이유가 뭐지? 어디를 향해 뛰고 있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그럴듯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아, 저기 비어 있는 벤치가 하나 눈에 띄어요. 벤치에 앉아 우두커니 바라봅니다. 너무 익숙해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내 앞의 풍경들을.
딸기가 프린트되어 있는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나른한 여름 오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자장면 배달부의 오토바이가 성난 투우처럼 그 옆을 비껴 달려가고, 그리고… 비어 있던 공터에 낯선 천막이 세워져 있는 게 보입니다.
언제부터 저 천막이 저기에 있었을까?
천막 안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딱히 갈 곳이 없는 할머니들과 급히 끝마쳐야 할 일이 없는 할아버지들과 여름의 오후가 가져다주는 평온을 견딜 수 없는 주부들과 개구쟁이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느긋하게 바라봅니다. 이제 곧 무언가를 보여주게 될 무대 위를. 무대 위에서는 아직도 준비가 한창입니다. 무대 위에서 굉장히 꾸물거리며 준비를 하고 있는 서커스 단원들을 바라보다 나는, 아- 하고, 낮게 탄성을 내지릅니다. 맞아요. 나도 언젠가는 이런 자세로 이런 서커스 천막 안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그날 아버지와 난 우리집 최초의 카메라를 얻고 가슴 뛰었습니다”
“제가요? 정말 제가 당첨이 된 겁니까?”
그때 난, 일곱 살이었고,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어쨌든 그때도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들보다는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아버지였지요(마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 결혼이란 걸 하셨으니까요. 아버지가 막내 여동생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부녀지간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손녀딸로 보이기도 했답니다). 무대 위의 사회자가 아버지를 지명하자 천막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 아버지를 쳐다봤습니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쥐고서 나는 무대 위를, 거기 정중앙에 꼿꼿이 서 있는 우리 아버지를 바라봤습니다.
아, 우리 아버지가 무대에 섰다. 저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야!
까닭도 없이 어린 제 가슴은 두근거렸지요. 가물가물 흐릿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지만 그날, 그 서커스 천막 안에 어른은 우리 아버지, 혼자였을 겁니다. 사회자가 우리 아버지를 지명한 이유는 분명 그 때문이었겠지요.
“이걸 정말 절 주시는 겁니까?”
아버지는 사회자가 내민 검은 플라스틱 카메라를 받으며 물으셨답니다.
“그렇다니까요.”
사회자가 아버지의 손바닥 위에 카메라를 올려놨습니다. 아버지가 무대 위에 서서 나를 바라보셨어요.
‘둘째야, 아버지가 이런 걸 다 탔지 뭐냐.’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지 뭐예요.
짝짝짝.
서커스 천막 안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뿌듯한 표정을 하고 거기, 무대 정중앙에, 박수 갈채 속에 서 계셨던 겁니다. 우리 가족이 갖게 된 최초의 카메라와 함께.
“아버지는 찍히지 않는 카메라 한 대를 유산으로 남기셨습니다”
서커스 천막 안에는 이제 몇 사람 남아 있지 않네요. 밀폐된 공기와 한낮의 한산함이 빚어내는 쓸쓸함으로 천막 안의 분위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고 있습니다.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는 아까부터 계속 경품으로 받은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어요. 작은 행운에도 저토록 감사해하는 할아버지의 얼굴 위로 내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그랬지요. 아버지는 그날 약주도 조금 하셨지요. 서커스 구경 갔다가 운이 좋아 받은 플라스틱 카메라를 막걸리 집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아버지는 자랑이 대단하셨답니다. 막걸리 집 아줌마는 내일은 자기도 가봐야겠다면서 아버지가 경품으로 받은 카메라를 요리조리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나는 얼마나 우쭐했는지 몰라요.

‘우리한테도 이젠 카메라가 있다. 봄 소풍은 벌써 다녀왔지만 가을 운동회 때는 멋진 사진을 여러 장 찍어야지.’
어린 나는 마냥 행복했고,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제게 물으셨어요.
“그렇게도 좋으냐?”
그날 아버지의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그 저녁에 늙은 아버지와 어린 딸은 아주 잠깐 행복했습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나는 그 저녁의 아버지를 회상하곤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 플라스틱 카메라를. 어린 나는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카메라는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또 경품으로 받은 그 카메라를 집으로 가져오기 위해 아버지는 그날 비상금을 모두 내놓았다는 것을요. 아버지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냈다던 2만원. 아마도 그 2만원은 돈벌이가 없던 아버지에게는 애써 모은 비상금의 전부였을 겁니다.
우리의 카메라가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대단히 운이 좋았다는 사회자의 말은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저 유명한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처럼 지지리 복도 없는 사내에게 좋은 운수란 실은 불행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되씹어야 했던 아버지. 마지막 남은 잔의 막걸리를 쭉 들이켜고서, 아버지는 입가에 묻은 누런 막걸리를 훔쳐 닦으며 그저 껄껄 웃으셨지요.
이젠 그만 밖으로 나가야겠습니다. 벌써 아까부터 이 천막 안에는 저 혼자였어요. 모두… 왔던 곳으로 돌아갔겠지요. 자, 저도 이젠 돌아갈래요. 아버지는 어린 제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둘째야. 세상은 말이다, 자꾸 너를 속이지. 한 번 속을 땐 화가 나고 두 번 속을 땐 속은 내 자신이 밉기도 하지. 그렇다고 울분에 지면 안 된단다. 그럼, 정말 지는 거야.
내 아버지는 그렇게 내게 사진이 찍히지 않는 낡은 카메라 한 대를 유산으로 물려주셨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에세이
주목받는 젊은 작가 이명랑은 알려졌다시피 시장통의 식당집 둘째 딸이다. 자전적 성격을 갖는 그녀의 연작소설 「삼오식당」은 날고기처럼 펄펄 뛰는 시장 언어를 생생하게 살린 작품으로, 그 거침없는 입담과 해학은 이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명랑 소설의 진짜 매력은 그 능청스러운 익살과 해학의 끝자락에, 삶에 대한 유쾌한 긍정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가 보내온 에세이를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더불어 명치께도 이따금 지근거렸다.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서 운 좋게 얻은 카메라가 사실은 사진조차 찍을 수 없는 날림이었다는 걸 알고 난 뒤 아버지가 들이켠 막걸리는 어떤 맛이었을까. 남들처럼 영악하지도 못해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자꾸만 속는 세상사에 분하고 억울할 만도 한데 울분에 지면 안 된다던 아버지 말씀은 어떤 뜻이었을까.
어쩌면 삶이란,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하던 어느 시인의 덕담처럼 정직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당한 놈만 억울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바람 밑의 ‘풀’처럼 살 일이다. 들큰한 사람 냄새 나는 시장통에서 자식 낳아 키우던 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품은 그래서 더욱 가슴 짠한 여운을 남긴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고 했던가. 세상을 향해 울분하지 않는 그 지혜를, 더 늦기 전에 빨리 깨우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Profile
작가 이명랑.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불어교육과 졸업 / 1997년 문학무크지 「새로운」에 시 ‘에피스와르의 꽃’ 발표하며 등단 / 1998년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출간 / 2002년 젊은 문학인 창작지원금 수혜(문예진흥원) / 2002년 연작소설집 「삼오식당」 출간 / 2004년 5월 장편소설 「나의 이복형제들」 출간) / 2004년 현재 계간 「작가세계」에 장편소설, ‘키싱 피버’ 연재중.
진행 / 박연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