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마리에의 삶은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가 1989년에 발표한 「인생의 친척」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구라키 마리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불행’을 경험하는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파란만장하고 기구하기까지 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타국 땅에서 죽는 불행한 인물의 전형이다.

마리에는 이혼하고 아들 둘을 키우며 사는데 한 아이는 정상아지만 한 아이는 장애아다. 이혼 후 두 아들을 자신이 맡은 이유는 아이들로 인해 이혼한 남편의 장래가 잘못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마리에는 그만큼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이 하필이면 이혼 전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별장 벼랑에서 자살을 한다. 세상은 더이상 살아갈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이 어린 두 아들의 판단이었다. 두 아들의 자살은 마리에한테는 일종의 천벌이었다. 한 아이가 정상인이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마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지켜야 할 의무는 오로지 엄마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엄마라는 사람들의 유전자가 가진 특성 아닌가. 그런데 아이들이 자살을 했다. 이때부터 마리에의 삶은 온몸을 친친 감는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결국 마리에는 마지막에 멕시코를 선택한다. 황량한 자갈 사막으로 표현되는 멕시코 농장은 마리에에게는 또다른 천형의 연장선상이다. 마리에는 농장에서 온몸을 던져 일하고, 인디오, 혼혈 여성들에 대한 연민으로 헌신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에는 마초에게 강간을 당한다. 마리에의 도움을 받고 살았던 농장 노동자들은 이 사실에 분노하여 마초의 무릎을 부셔버리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마리에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던가를 증명하는 사건인 셈이다. 결국 마리에는 과달라하라의 병원에서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가느다란 오른손으로 어린애처럼 브이 사인을 만들어 보이며 죽는다. 과연 마리에의 삶은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행복에 관한 어떤 오해
커다란 유리 항아리에 원하던 것들이 가득 채워지는 것이 행복일까?
살다가 언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세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 좀 말해주실래요? 라고 물었을 때 나오는 사람들의 대답에는 어떤 공통된 측면이 있다. 즉, 외부로부터 나를 향해 유입되어 들어오는 것이 많을 때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길 좋아하는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좋은 집을 샀을 때,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 말이다.

그러니까 행복이란 것은 커다란 투명 유리 항아리가 원하던 것들로 가득 채워져가는 것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행복이라기보다는 어떤 지복(至福)의 상태를 일컫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말의 개념을 이렇게 상정해놓고 보면 반드시 뒤에 따라오는 것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마음이다. 요즘처럼 빈부 격차가 극심한 상황에서 이렇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상황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누구나 선호하는 근사한 냉장고가 있다고 치자. 그럴 때 왜 남이 저걸 쓴다고 해서 나도 써야 하느냐는 문제 의식 없이 무조건 그 냉장고만을 원하는 태도는 필연적인 내적 동기 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행복이란 말에는 일종의 전염성, 비교우위 논리가 포함된 채 통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인용한 마리에의 삶은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그 고통을 받아들인 경우다. 고통을 도외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 열어 밖을 향해 분출했기 때문에 마리에의 몸에서는 땀이 흘렀고 눈물이 흘렀고 사랑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은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다 빠져나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황량한 멕시코 농장의 노동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러면 그녀는 불행하지 않다. 그러니까 브이 자를 그리며 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죽던 순간에 그린 브이 자는 어쩌면 ‘내가 나의 죄를 극복했다’는 마지막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당신만의 투명 유리 항아리 속 작은 행복
행복은 나에게서 밖을 향해 빠져나가는 것이 많은 순간에 찾아오는 느낌이다
최근에 들은 소식 중에 ‘도롱뇽 살리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 얘기가 흥미로웠다. 한국 특산인 도롱뇽을 살리는 것이 우리의 자연 환경을 포함한 유기체적인 생명을 유지 보존하는 길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어쩌면 모순된 현실에 대한 반어적 표현으로서 도롱뇽을 내세워 그런 운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많지 않은 월급에 여가를 즐길 여유도 없이 열심히 일한다고 한다. 과연 도롱뇽들은 그들의 수고를 알기나 할까. 그들이 도롱뇽이라는 파충 동물을 위해 분투한 땀과 시간과 노력을 알기나 할까. 그래도 그들은 그 일에 몰두하고 있었고 자신의 일에 대한 비전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걸 꼭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행복은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들어오는 것이 많은 순간보다 나로부터 밖을 향해, 상대를 향해 빠져나가는 것이 많은 순간에 찾아오는 느낌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깍쟁이처럼 굴지 않고 남을 향해 자기를 환히 열어 보이는 순간에 찾아오는 진심 어린 교감도 행복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상대를 향해 나도 모르게 너무나 열심히 다가가고 탐구하고 투여했을 때 찾아오는 느낌도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의 내부에서 땀 같은 것이, 사랑 같은 것이 마구 빠져나갔다고 느끼는 순간 즉, 타자와의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나뿐만 아니라 상대도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바로 행복한 상태가 아닐까.

그런 거라면 차라리 과감히 유리 항아리를 깨버리는 편이 낫다. 차라리 행복이란 말, 행복이라는 개념을 삶에서 지워버리고 ‘참을 수 있을 만한 단계’ 혹은 ‘참기 어려운 단계’ 등으로 상황을 다시 정리해도 좋겠다. 그리고 도롱뇽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처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를 던질 나만의 투명 유리 항아리를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행복의 내용도 훨씬 다양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행 / 박연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당신에게 맡긴 나의 ‘행복 통장’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헤르만 헤세의 달콤한 명령이다. 누군가의 이런 말도 있다. ‘행복을 즐겨야 할 시간은 지금이다. 행복을 즐겨야 할 장소는 여기다’. 삶의 의무이자 당위라는 행복. 그러나 정작 지금 나는, 당신은,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쓰는 ‘생활용어’가 되기에는 너무 말랑말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래서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어 기쁘고 넉넉하고 푸근한 상태, 즉, ‘행복’의 사전적 의미에 부합하는 어떤 순간을 맞더라도 ‘행복하다’는 말은 술술 쉽게 나오지 않는다. 기쁘다거나 기분 좋다는 등의 말로 대신할 뿐, ‘행복하다’는 표현은 보다 더 극적이고 특별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고 미뤄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행복’이라는 말은 일기장 속에선 꽤 자주 볼 수 있다. 목표했던 바를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이나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때의 충족감, 하다 못해 맛있는 음식을 한 입 베어물었을 때의 만족감까지 ‘행복’이라는 말로 쓰여진 걸 보면, 확실히 ‘행복’이라는 단어는 말이 아닌 글 속에서 좀더 자연스럽고 뿌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언제 나는 행복했던가.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외부로부터 이쪽으로 무언가 들어오는 것이 있을 때 행복감을 느꼈더랬다. 유입된 그 무엇의 가치가 높을수록, 크기가 클수록, 수가 많을수록 체감되는 행복지수도 비례 상승했다. 허탈한 건, 그런 기쁨의 순간이 대개 일회적이라는 점이다. 슬픔의 여파는 더 오래 지속되지만 기쁨의 기억은 그만큼 오래가지 않는다. 하루치 행복, 일주일치 행복, 한 달치 행복… 커다란 투명 유리 항아리에 무엇을 얼마나 넣어야 행복할까 고민하다 보면 더 큰 집, 더 큰 차, 더 비싼 그 무엇들에게 행복을 저당잡힐지 모른다. 자신의 안위에만 천착하는 행복감에는 일찌감치 한계가 그어진다고 할까.
행복에 관한 강영숙 작가의 제안은 이런 허탈함의 실타래를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 남을 향해 자기를 환히 열어 보이는 순간에 찾아오는 진심 어린 교감, 상대에게 바라고 받기보다는 이쪽에서 뭔가를 쏟아낸 후의 기쁨,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온전한 소통. 그것이야말로 진짜배기 행복이 아니겠느냐고 그녀는 말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소녀 시절 가슴 설레며 읽었던 어느 시의 제목도 바로 ‘행복’이 아니던가.
목사님의 뻔하고 지루한 설교 같아서 채 몇 장 못 넘기고 책장 어느 구석에 꽂아버렸던 버틀란트 러셀의 「행복론」을 다시 꺼낸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항상 성공에 놀라고 반대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실패에 놀라게 될 것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낮추면 상대는 높아지게 마련. 어쩌면 행복이란 건 서로가 서로에게 예치해둔 예금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내 행복을 갖고 있는 당신, 당신의 행복을 갖고 있는 내가 서로에게 그것을 돌려주는 것, 그 과정에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Profile
소설가 강영숙/1966년 강원도 춘천 출생/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데뷔/소설집 「흔들리다」(2002), 「날마다 축제」(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