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시인 함민복과 함께 떠나는 이른 봄 산책

프런트 에세이

강화도 시인 함민복과 함께 떠나는 이른 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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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수 정답게 노니는 콩새를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봄인가보다. 봄은 흔들림이다

바깥마당 고욤나무에 콩새들이 앉아 있다. 하나 둘 셋… 여섯 마리다. 콩새는 콩처럼 작은 새가 아니다. 참새보다 크고 비둘기보다 작다. 콩새들아, 봄이 왔다고 울음소리 한 옥타브 올라간 콩새들아. 거기 고욤나무가 너희들 미팅 장소냐. 격식을 좀 갖춰야 하는 너희들 레스토랑이냐. 아니면 내숭을 지나 낭만을 넘어 현실적으로 선택한 중국집이냐 순대국밥집이냐. 뭐라고? 우리 자기가 입덧을 하고 있다고? 그만해라 그만 울어라 콩새들아.

거긴 한평생 혼자 사는 달이 걸리기도 하는 곳이다. 혼자 사는 달 말없이 머물다 가는 달의 정거장이기도 하다. 너희들보다 큰 몸으로 고욤나무 잔가지 하나 흔들지 않고 지나는 달을, 혼자 사는 내가 익은 기침을 하며 우두커니 서서 바라다보던 곳이다. 내 추억의 식탁이다. 고욤나무 큰 가지에 묶여 있던 빨랫줄을 팔 올려 풀어 주었었는데.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 가지는 두 팔 정도 높이 자랐고 껴안으면 폭 안기던 몸통은 이제 굵어져 한 아름에 안기 버겁다.

내가 살아오며 제일 많이 바라다본 나무이며 내게 제일 많이 그림자를 베풀어준 나무다. 그 나무에 기대 달을 보며 고향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떠올렸고 쓸쓸함을 달랬었다. 그러다가 나무 그림자가 어떻게 어둠 속으로 들어가나 세 시간을 지켜보기도 했었다. 잔가지에서 점점 굵은 가지 순으로 어둠에 지워지다가 몸통이 어! 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내 유년의 추억에 대한 기억과 비교해보며 지켜보았었다.

고욤 익었다고 너구리가 사슴처럼 끽익-끽익- 울던 가을이 엊그제 같은데 겨우내 얼어 있던 고욤이 쪼글쪼글 녹아 달고 먹기 좋다고 콩새가 시끄럽다. 암수 정답게 노니는 콩새를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봄인가보다. 봄은 흔들림이다.

지푸라기 타는 냄새, 찔레꽃 향기, 소똥 냄새…
죽 이어지는 냄새의 스펙트럼
읽던 책을 접고 집을 나선다.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린다. 사방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고개 들어 어느 곳을 보든 새 몇 마리가 날고 있던 어린 시절 고향이 떠오른다. 이맘때쯤이면 이랴- 워- 어뗘뗘뗘- 밭 갈며 소 모는 소리 온 동네에 쩡쩡 울려 퍼지지 않았던가. 밭에 낸 두엄냄새가 낮게 깔리고 굴렁쇠를 굴리며 논둑길을 달리다가 멈춰서면 어지럽게 피어오르던 온 세상 아지랑이 아지랑이.
길을 건너 아랫집 비닐하우스로 향한다.

하우스 속이 보이지 않는다.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리고 톡톡 쳐본다. 습기들이 뭉쳐져 물방울이 되며 또르륵 흘러내린다. 하우스 속에 또 작은 하우스가 있다. 고추 어린 모종들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다. 모종들 보며 너희들은 어찌 요리 여린 것들이 자라 매운 고추를 맺느냐고 물어 볼 참인데 낭패다. 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보려다 어린것들 걱정에 문을 돌멩이로 고여 놓은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그만둔다.

다시 바닷가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아랫집 팬션 울타리로 심어 놓은 벚나무에 앉아 있던 참새가 난다. ‘참새의 얼굴을 / 자세히 보라 / 모두들 / 얘기하고 싶은 / 얼굴이다 /’ 박목월의 동시를 떠올리며 벚나무 쪽으로 다가가 길을 비켜선다. 팬션에서 산책 나온 젊은 연인이 속삭이며 지나간다. 벚나무에 새싹 눈이 맺혀 있다. 새 부리 같다. 새 발가락처럼 세 가락이다.
다시 걷다 방죽에 멈춰 서서 갈대들을 본다. 얼음 속에 박혀서도 머리에 씨앗을 이고 있는 한 허리 꺾이지 않는 갈대들. 이 땅의 에미들 같은 갈대들을 봄바람이 어루만져주며 지나간다.

제방에 올라선다. 훅 갯내음이 난다. 언 뻘이 빛나던 겨울 바다가 아니다. 콧구멍에 힘을 주고 갯내음을 맡는다. 냄새의 스펙트럼. 도시에서의 냄새는 비슷비슷하다. 타이어 타는 냄새와 음식물들 냄새가 어디를 가나 엇비슷하다. 시골은 그렇지 않다. 논을 지나면 지푸라기 타는 냄새, 고개를 넘으면 찔레꽃 향기, 소 울음소리 들리면 소똥 냄새, 죽 이어지는 냄새의 스펙트럼. 달리는 버스 창을 열고 입을 아 벌리고 맡아보는 봄 냄새들. 그 신나는 냄새의 사열.

제방엔 벌써 풀들이 푸릇푸릇하다. 겨울 동안 제방 쪽으로 바싹 당겨 매 있던 배에 나무 말뚝이 실려 있다. 부지런한 어부가 물 나간 뻘에 그물 친다는 표시로 꽂아 놓은 붉은 깃발 입성이 펄럭인다. 곧 저 배도 기지개를 켜고 퉁퉁퉁 엔진 소리를 내며 맘껏 흔들리리라. 봄은 흔들림이 아니던가.

꿩이 운다. 진달래가 튀어나올 것 같다
봄은 낳는다. 봄은 어머니다
집으로 돌아오다 고개를 넘는다. 동네 형님 텃밭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동네 형님 세 명과 동네 아저씨 한 분이 모여 섰다. 형님 한 분이 쪼갠 아카시아 나무를 손도끼로 다듬는다. 깎아 놓은 고추 말뚝이 수북이 쌓여있다. 타고 있는 모닥불에 나무 조각을 집어 던진다. 연기가 난다. 이놈의 연기가 왜 왔다갔다해. 힘 센 사람한테 간다고 하잖아. 힘 센 사람 찾기가 힘드나 왜 자꾸 왔다갔다하지? 아무래도 묵은 어른 것이 낫겠지요. 에이, 이 사람아. 힘 센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 똑바로 올라가는데요? 웃음소리와 농담이 불 쬐는 손바닥처럼 따듯하다. 달다. 말뚝을 깎던 형이 손도끼를 못탕에 탁 꼽는다. 우리 국수나 한 그릇씩 사먹고 등산이나 가지. 더 바빠지기 전에 다리 힘이나 기르자고. 그래야 어떤 농사든 짓지.

등산화를 신으러 다시 고개를 넘어 온다. 길가 밭에서 꼬부랑 할아버지가 고추 대궁을 태우고 매운 내에 코를 움켜쥐며 꼬부랑 할머니가 냉이를 캐고 있다. 꿩이 운다. 목에 무엇이 걸렸는지 꿔엉 꿔엉 운다. 진달래가 튀어나올 것 같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봄은 낳는다. 봄은 어머니다. 어머니인 봄이 내 머리 속에 시 한 편을 낳아주신다.


봄의 냄새
섬진강에 김용택 시인이 있다면 강화도에는 함민복 시인이 있다. 섬의 남쪽 끝 동막해수욕장 너머에 그가 홀로 사는 낡은 집이 있다. 짠내 나는 바닷가에 둥지를 튼 그를 두고 혹자는 ‘전원 시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실상 그의 처음 사정은 좀 달랐다. ‘강호에 병이 깊어’ 그곳에 갔다기보다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거기까지 찾아 들어간 것이었으니.

대산문화재단에서 지원 받은 창작지원금 500만원을 들고 그가 강화도로 흘러 들어간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보증금 없는 월세 10만원짜리 폐가를 얻어 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갑갑함을 못견뎌 종일토록 뻘밭을 휘젓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안빈낙도’까진 몰라도 그곳 어부들과 한가지로 바다에 나갔다가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리는 수완도 생겼다. 뻘밭을 바라보며 문명을 향해 반성어린 성찰의 시간을 갖고 그것을 시로 풀어 쓰며 시인 본연으로 돌아가는 일만큼이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 한잔 거나히 걸치는 일 또한 그에게는 익숙한 일상이다.

시인이 보내온 글귀들에 이른 봄내음이 물씬 배어 있다. 봄의 냄새. 때로 어떤 기억들은 냄새와 함께 뇌리에 남는다. 향긋한 꽃향기로 기억되는 봄도 좋지만 짠내 나는 초봄의 바다 냄새도 나쁘지 않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다소 치기 어린 동경으로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돌아치던 몇 해 전, 아마도 2002년 이른 봄이던가. 평일 오후, 그것도 초봄의 바닷가를 혼자서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다 곁에 앉아 고막이 터지도록 요란한 파도 소리를 듣다가 곧 청각이 마비가 됐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 상태가 됐다. 한 가지 냄새를 오래 맡으면 이내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고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떨구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깼을 때는 적이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해방감일지 불안감일지 모를 짧은 쾌감을 느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경건한 약속처럼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봄 좋은 줄 모르겠더니 해가 갈수록 봄이 좋아진다. 어딘지 짝이 맞지 않는 조합 같기도 하지만 봄바다로의 상춘도 더러 해볼 만한 일이다.

진행 / 박연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꿩은 목구멍에 무엇이 걸렸는지
꿔엉 꿔엉
야단이다

미련하긴 작년 봄에도 그래 놓곤
토해
붉은 진달래
노란 민들레

등 두드려주는 봄바람 믿고
상습적이라니까
고욤 따 놓았다가 먹으면 맛있는데…
항아리에 재워났다가 한겨울에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엄동설한에 새들이나 먹게 그냥 두고 새 울음소리나 듣지 뭐.


Profile 시인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 수도전기공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 / 1989년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 1990년 첫 시집 ‘우울 氏의 一日’ / 1993년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 / 1996년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2005년 네 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 / 1998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 상’ 수상 / 2005년 제2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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