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 앓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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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앓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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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3월이면 대학생이 되는 나의 딸
그 애가 겪게 될 사랑의 고통도 저리 힘들 것인가

오늘 사랑니 발치 수술을 받았다. 지난여름부터 나를 성가시게 했던 내 못된 사랑니. 지난 번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보여준 엑스레이 사진에는, 아래쪽에 두 개의 커다란 사랑니가 엉뚱한 곳에 뿌리를 박고서 무시무시하게 버티고 있었다. 의사는 하나는 제거를 해야 하지만, 다른 하나는 깊이 숨어 있어서 지금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 했다. 아직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니는 지뢰처럼 깊이 숨어 있단다.

[프런트 에세이]사랑니 앓는 계절

[프런트 에세이]사랑니 앓는 계절

내 나이 스물이 되던 해, 나는 나의 첫 사랑니를 뽑았다. 사랑니는 사랑을 알게 될 무렵인 스무 살 전후에 나오는 마지막 어금니라 지치(智齒)라고도 한다. 그래 그럴까? 이제 곧 3월이면 대학생이 되는 나의 딸. 그 애도 사랑니가 생겨 오늘 나와 함께 발치를 했다. 종합병원의 구강외과 복도에는 우리 말고도 스물을 갓 넘긴 듯한 청년 둘이 뺨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앉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자 무시무시한 통증이 몰려왔다. 끙끙 앓으며 견디고 있는데 딸애의 방에서 고통을 견디다 못한 아이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미음과 진통제를 먹이고 진정을 시키고 나 또한 진통제를 먹고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바라며 마감이 급박한 원고 때문에 노트북 앞에 앉았다. 딸아이의 흐느낌은 잦아들었지만, 나는 갑자기 ‘그 애가 겪게 될 사랑의 고통도 저리 힘들 것인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제 스물을 맞은 아직은 어리기만 한 딸아이가 부럽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사랑이 깊으면 뿌리가 깊은 사랑니처럼 아프다. 사랑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그것을 안다. 사랑의 아픔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듯이, 나는 이제 웬만한 고통은 드러내지 않고 삭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 누군가를 깊게 사랑한다는 것은 송곳으로 깊게 찌른 자상(刺傷)같은 것. 지금 나는 깊게 사랑하는 한 사람보다 열 명의 친구를 더 원한다. 그러나 누구나 첫사랑을 할 때면 열 명의 친구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 법. 오로지 자신의 인생이 단 한 사람하고만 연결되어 있는 느낌일 것이다. 오래전, 3월이 오는 길목에서 대학 입학을 앞둔 스무살의 나는 첫사랑의 예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바로 우리 눈앞에 보이는 한 쌍의 연인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걸음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이제 3월이 오고 있다. 3월. 학창 시절의 3월은 특별하다. 3월은 새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지만, 또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달이다. 이맘때면 늘 설레는 마음으로 3월을 기다리곤 했다. 며칠 전엔 나의 대학 후배가 될 딸아이와 함께 정말로 오랜만에 모교의 캠퍼스를 함께 걸었다. 캠퍼스는 나무와 숲이 많이 사라지고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내가 등을 기대 쉬곤 했던 본관 앞 목련나무는 그대로인 채 거목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나의 프레시맨 시절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3월이 되고 몇 번의 미팅도 시들해질 무렵에 나는 대학의 선배 언니를 따라 외부 동아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프런트 에세이]사랑니 앓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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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아리에서 나는 수많은 남학생들을 만났다. 여학교와 여자대학만 다닌 내게 그 청년들과의 만남은 혼란 그 자체였다. 우정과 사랑의 감정이란 게 도대체 어떻게 다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아지랑이처럼 마음을 어지럽혔다. 처음 가져보는 ‘이성친구’라는 존재 앞에서 한 번도 학습해보지도 못하고 검증받지도 못한 내 속의 감정들을 나는 감히 꺼내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했다. 누군가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면, 나를 좋아하는 걸까? 아닐까? 금세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얼굴부터 빨개졌다. 그러다 서서히 많은 남자들 중에서 내 맘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 한 사람으로 좁혀졌다. 한 살 위의 얼굴이 흰 금테 안경을 쓴 선배.

그러던 어느 일요일, 새내기 환영 나들이를 하고 돌아온 밤, 인근 동네에 살던 금테 안경 선배가 집에까지 바래다주면서 내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난 네 얼굴 보면 저앤 참 나랑 닮았구나 생각이 돼. 넌 그렇지 않니? 우린 전생에 오누이였을까? 부부였을까?”
이상하게 그 말이 내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집에 돌아와 나는 거울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둘이 흰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쓰고 웃는 모습이 아주 닮았다. 그 이후로 나는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처럼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내 짝은 누구니? 보여주렴.”
그러면 거기에 어김없이 그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아 운명이구나!’ 나는 그 순간,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보면 고개를 바로 들지 못했다. 그와 비슷해 보이지 않으려 금테 안경을 벗어버렸다. 나는 그해 봄 사랑니가 나느라 치통을 앓고 있거나 간혹 볼이 붓곤 했다. 우리는 몇 번인가 수줍은 데이트를 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사랑의 기쁨을 나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사랑니의 아픔으로 눌렀다. 그것은 나만이 느끼는 은밀하고도 특별한 쾌감이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일로 우리는 이별의 인사도 없이 서서히 멀어졌고 그는 동아리를 예고 없이 떠났다. 그게 내 인생에서 기록한 첫사랑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도대체 왜 헤어진 걸까.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걸까.

[프런트 에세이]사랑니 앓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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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첫눈 오는 날, 시내에서 만난 여고 동창과 삼청공원을 산책했다. 눈 오는 삼청공원은 데이트 나온 쌍쌍의 청춘들이 팔짱을 끼고 다녔다. 그런데 바로 우리 눈앞에 보이는 한 쌍의 연인.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걸음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얼른 뒤돌아가고 싶었지만, 눈사람처럼 바닥에 다리가 붙은 것 같았다. 선배였다. 부연 안경너머로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던가. 그의 옆에 아주 예쁜 여자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그 첫사랑을 잊는 상징적 의미로 치과에 가서 사랑니를 뽑아버렸다.

그 이후 나는 동아리의 모든 남자들을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그 동아리에서 내게 사랑을 고백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끝내 ‘애인’을 만들진 않았다. 우정은 종종 사랑으로 끝맺기도 하지만, 사랑은 우정으로 바뀌지 않는다. 사랑을 잃으면 사람을 잃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 한 사람의 연인을 열 명의 친구와 바꾸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정신과 의사 별 거 아니더라. 네가 훨씬 낫더라
너 그동안 무료 상담해준 거 너무 고마워
몇 년 전부터 그 친구들을 간혹 만난다. 여자친구들도 몇 있지만, 저녁에 주로 만나는 모임이라 대부분 남자친구들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옛 추억을 얘기하거나 일상의 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 취미 이야기 등 화제가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40대 중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지만 사고가 날 일은 전혀 없는 안전한 모임이다. 이렇게 남녀가 모여 건전한 이성친구를 만들려면 한 20년이 걸리는가 보다.

그런데 이성친구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다. 여자가 40을 넘으면 남편보다 남자보다 여자친구가 더 좋은가 보다. 내게는 속을 뒤집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서너 명 된다. 학창 시절의 친구도 있고 글 쓰는 친구도 있다. 살수록 소중하고 귀중한 나의 보물들이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너무도 괴로운 신상의 일로 정신과 의사를 찾았다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그 문제로 내게 시시때때로 푸념을 하거나 수다를 떨곤 했다. 남의 말을 들어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 품앗이 아닌가.

“얘, 그동안 너무 고마워. 정신과 의사 별 거 아니더라. 네가 훨씬 낫더라. 너 그동안 무료 상담해준 거 너무 고마워.” 건전한 정신을 책임져주는 나의 여자친구들.

세상 모든 인연들이 요즘은 다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년 새봄이 오는 3월이 되면 새로운 막이 펼쳐지듯, 새 페이지가 열리듯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설렌다.


편집후기 / 봄비 내리는 날
[프런트 에세이]사랑니 앓는 계절

[프런트 에세이]사랑니 앓는 계절

인생의 기억 가장 첫 줄에 새겨진 사랑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에 누구나 한 번쯤 “우리는 도대체 왜 헤어진 걸까.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걸까”란 물음을 갖는다. 역시나 답은 몇 날 밤을 지새워도 처음과 같다. “사랑이 깊으면 뿌리가 깊은 사랑니처럼 아프다”는 작가의 말처럼 ‘자상’이 아물기 전까지 사랑은 두렵기만 한 존재다.

그러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다행’이란 단어가 생각날 때쯤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있다. 그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내 경우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첫사랑의 기억을 묻어두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주위 성공담을 들어보면 ‘괜한 짓’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 역시 ‘다행’이다.

봄에는 설렘이 있다. 가을에 만나는 그것이 ‘그리움’이라면 봄은 누군가를 기다리게 만든다. 봄에 만나는 ‘기다림’은 딱히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인연도 꿈꾸게 된다.

봄이 왔다. 꽃도 전과 다르지 않고 하늘도 더 없이 높다. 그날의 설렘이 다시 새록새록 하다. 자상 따위는 보란 듯이 감싸줄 새로운 인연이 기다려진다. 고운 님 오시는 길에 뿌려지는 꽃잎처럼 봄비가 내리는 날, 어쩌면 우산 틈 사이로 기다리던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만 같다.


Profile 소설가 권지예
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 / 1997년 「꿈꾸는 마리오네트」로 등단 / 2002년 이상문학상, 2005년 동인문학상 수상 / 장편소설 「아름다운 지옥」 작품집 「꿈꾸는 마리오네뜨」 「폭소」 「꽃게무덤」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산문집 「권지예의 빠리, 빠리, 빠리」


진행 / 김성욱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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