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숲을 이루듯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가정의 부재와 결핍을 거리에서 채우는 것은 여름날 더위와 갈증을 청량음료로 달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일가족 집단 자살이라는 우울한 보도와 기사가 심심찮게 TV 화면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다. 뿐만이 아니다. 존속살인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접할 때도 있는데, 극악한 인면수심 앞에서 망연자실 할 말을 잊는다. 갈수록 사건의 빈도가 잦아지고 강도가 더욱 세지고 있어 소식을 접한 이들의 불안심리를 가중시키고 있다.
현대인을 무한 욕망과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자본과 기술의 메커니즘은 가족 안에도 그대로 관철되어 각자는 저마다 섬으로서 유폐와 단절과 고립의 생을 강제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타자와의 진정한 교감과 소통이 부재한 불모의 현실은 가족이라고 해서 따로 피해가지 않는다.
집이 흔들리고 있다. 집이 흔들리니 집 속의 방들이 불안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웬 방들이 그리도 많은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노래방, 찜질방, 가요방, 모텔방, 대화방, DVD방 등등. 집 속의 방들이 제 역할을 못하니 사람들은 그 부재와 결핍을 거리의 방에서 채우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름날 더위와 갈증을 청량음료로 달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마시고 난 뒤면 더 큰 갈증을 불러올 뿐 근원적 해결책을 그것들은 제시해주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단절과 유폐는 이처럼 자본과 기술이라는 바깥의 현실에서 그 원인과 배경을 찾을 수 있지만 안에도 그 원인은 있다. 바깥의 현실이야 개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어찌 해볼 수 없지만 안에서 제공하는 원인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긴 하겠으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할 수 있겠기에 이에 몇 가지 소견을 밝히고자 한다.
“가족 구성원이라고 해서 서로 간의 간격,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억압으로 작동할 수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간격이 없다면 숲이 조성될 수 없다. 시인 안도현은 시 ‘간격’에서 나무와 숲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숲을 이루듯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개인과 개인이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 건강한 숲은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없다면 불가능하듯이 바람직한 사회도 개인과 개인 간의 간격을 필요로 한다. 이는 가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족 구성원이라고 해서 서로의 간격 즉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억압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이라고 해서 소유권을 주장하듯 함부로 대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미적 거리를 무시한 채 안하무인격으로 대한다면 그 가족은 자연히 서로가 불편한 관계가 조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이의 미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부부가 서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토란이라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귀한 음식의 재료가 되어 명절날 제상에 오르기도 한다. 국물의 구수한 맛과 영양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토란이라는 식물은 매우 독성이 강하다. 잘 다루지 않고 함부로 대하면 음식이 되기도 전에 주방에 독을 옮겨놓는다.
가족이란 토란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잘 다루게 되면 영양 만점의 귀한 음식이 되나 함부로 다루면 독이 되기도 하는 토란처럼 가족 또한 서로가 서로를 애정과 믿음으로 가꾸어나가면 그럴 수 없이 돈독한 관계가 성립되지만 그렇지 않고 함부로 대하다 보면 치명적 독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아프게 하는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는 것인데
가족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는가”
사랑은 의자와 같은 것이다. 이정록 시인의 시 ‘의자’에서 가족 간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그렇다. 가족이란 서로가 의자가 되어 편안하게 앉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일방적인 관계만 강요한다면 가족의 유대는 느슨해지고 결국엔 남만도 못한 관계로 전락할 수 있다.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부지불식간 얼마나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는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유형무형의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볼 일이다.
결혼식이나 생일날 우리는 국수를 즐겨 먹는다. 이는 이 음식이 결연과 장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끓는 물에 소면을 넣으면 그것들은 금세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낭창낭창 풀어지면서 서로의 몸을 포개 둥그렇게 둘러앉는다. 그것은 신혼 때의 풍경을 닮았다. 그러나 먹다가 남긴 면발은 퉁퉁 불어서 권태기의 부부처럼 볼썽사납다.
가정의 달이 지나갔다. 올해도 예년처럼 매스컴과 언론에서는 호들갑스럽게 가정의 달과 관련한 각종 행사와 미담과 불행한 사건들을 보도했다. 하지만 무슨 요식행위처럼 일회성 기념이 끝나면 잔치가 끝난 마당처럼 부산하고 어수선한 일상이 반복 순환될 뿐이다.
가정의 행복이 달과 날을 따로 정해 기념해서 될 일인가. 가정의 행복은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작지만 위안과 안식이 되는 나날의 일상을 늘 처음처럼 새롭게 살아내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과 재벌 아버지
“나는 만날 점퍼를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지는 않았어. 그래서인지 넥타이 매고 그럴듯한 회사에 다니는 게 아이들을 위해 좋을 줄 알았지. 그런데 아니더라고. 요즘 애들은 점퍼를 입어도 넥타인 맨 아버지보다는 외제차 몰고 다니는 아버지를 더 자랑스러워해.”
얼마 전,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한 선배가 사석에서 한 말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데도 사교육비에 허리가 휜다”는 그 선배는 부자 아빠가 되기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언젠가 명문대에 진학할 것을 확신했다. 그의 이런저런 희망 섞인 푸념을 듣고 있자니 최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보도된 두 사건이 떠올랐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이민 가정의 비극과 명문대 다니는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재벌 아버지.
사실 부자 아빠는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다. 한데 “잘 다루게 되면 영양 만점의 귀한 음식이 되지만 함부로 다루면 독이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한쪽을 택하라 한다면, 남들처럼 영악하지 못해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자꾸만 속는 아비와 공부 못하고 재주도 없지만 탈 없이 자라준 못난 자식이 더 애틋하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진행 / 김성욱 기자 ■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