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람 노릇만으로…’
”그냥 이것저것 다 떼어놓고 ‘인간답게’라는 큰 틀 안에서, 각자 지닌 고유성을 인정해주고 ‘사람 노릇’ 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는 없는 걸까”
쉰 살을 코앞에 둔 나이에 막내 노릇이라니
일찍이 집을 떠난 나 대신 실질적인 막내 역할을 한 바로 위의 언니는 때때로 말하곤 했다. “네가 내 언니라면 얼마나 좋겠니.” 아마도 ‘언니 노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언니네 집 앞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친절하다 못해 오지랖이 넓은 한의사는 그 뒤로 언니를 만나면 압력을 넣는다고 했다. “맛있는 반찬 좀 해서 동생 갖다 주고 그러세요. 무슨 언니가 그래요?”
성품이 워낙 찬찬해서 상추는 흐르는 물에 이쪽저쪽 살펴가며 한 잎씩 닦고 매실도 한 알 한 알 일일이 닦느라 좀 굼뜬 편인 언니와 달리, 나는 음식을 만들 때만은 손이 빠른 편이다. 단지 빠르다는 것 때문에, 언니는 내가 음식을 잘 만든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런 압력을 받는다면, 내가 언니라도 좀 억울하겠다. 전 같으면 언니를 적극적으로 위로했을 동생이 “그랬어?” 하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면 더더욱.
내 유형은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
40여 년도 넘게 쌓인 세월의 먼지에 파묻힌 ‘막내 노릇’을 새삼스럽게 꺼내 먼지를 탈탈 털게 한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면서, ‘막내’라는 타이틀도 벗어던졌다고 생각했는데. 몇 해 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내 삶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위기감에 ‘내가 누구인가’라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화두를 다시 집어 들던 한 시기와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무렵, 어느 종교신문에 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애니어그램 광고가 눈길을 잡아끈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박 2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신청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늦가을, 나는 서울 근교 도시의 수녀원으로 타달타달 걸어들어갔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강당으로 들어가니 앞에 커다란 도표가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람의 몸 형태를 그려놓고, 머리, 가슴, 배 부분에 각각 세 가지씩 숫자를 써놓은 것이었다. 1번 유형, 2번 유형, 3번 유형… 하는 식으로. 그걸 보는 순간 조금 실망했다. 또 유형화야? 혈액형은 물론이고 별자리, 태생지 따위로 사람을 유형화하는 것을 나는 경계했다. 거기엔 어떤 일반적인 지혜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밖의 것들에 대한 고려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때로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 하지만 돌아서 나갈 수도 없었다.
각 유형에 대한 소개를 한 뒤에, 자기에게 알맞은 유형끼리 그룹을 지어 토론을 하기로 했다. 나는 그동안 사람들이 말해준 ‘나’에 가장 알맞은 유형으로 갔다. 자신의 기분보다는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편이고, 남을 돕는 데에서 자기 존재 가치를 느끼는 유형. 그 유형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남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재주가 있다’는 대목에서 ‘어, 이건 나와 다른데?’ 하고 갸웃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유형이 내게 가장 잘 맞는 듯했다.
지금의 나를 알려면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봐야
1박 2일, 그 짧은 시간은 내게, 내가 그동안 무언가에 속은 채 살아왔다는 것을 확연히 일러주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 과정에서 치른 대가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내 방식으로 살았다는 자기 위안은 지니고 있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소소함으로 내려가면, 내가 원하는 것을 접고 남들이 원하는 바대로 따르며 살아온 셈이었다. “남들 다 멋 부리느라 참고 입어” 하는 말에 껄끄러운 옷을 참고 입었고, 남들이 대부분 즐기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내 취향은 “유별나다”는 말로 무시당했다. 어릴 적, 독립적이고 발랄한 아이였던 내가 어느 날부턴가 가까운 이들의 말에 눌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고분고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 지금의 나를 알려면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아야 했다. 그래서 지나온 나날에 인상 깊은 장면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잠귀가 밝던 나를 자주 깨우던 오빠 생각이 났다. 밤똥을 자주 누던 오빠는 곤히 잠든 나를 깨우곤 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부엌 뒷문으로 나가서, 축대 위의 옆집과 우리 집 사이에 난 좁은 통로를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자체는 왜식이어서 집에 붙어 있었지만, 본채와의 사이에 난 문이 없어서 그렇게 돌아가야 하는 거였다. 그 길은 겁 많은 아이가 혼자 가기엔 무서운 길이었다. 내가 그 집에서 산 건 초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일곱 살 때까지였고, 오빠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열두 살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내 기억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설마 일곱 살밖에 안 먹은 여동생을 깨웠을까.
언니에게 물었더니 언니의 대답. “너를 그냥 데리고 간 게 아니라, 앞세웠어. 그리고 뒤에 또 한 명을 세우고 오빠가 중간에 껴서 갔어.” 그냥 오빠와 함께 간 걸로만 기억하던 나는 분기탱천했다. 세상에, 일곱 살짜리가 무섭지 않아서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을까. 겁 많은 오빠가 안쓰러워서, 저도 무서우면서 태연한 척하고 같이 가주었을 텐데, 그것도 모자라 그 캄캄한 골목에 동생을 앞세우다니! 뒤늦은 자기 연민까지 일 지경이었다.
사실 뭐, 남자로 태어났지만 겁 많은 게 오빠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뒤늦게 비분강개하는 것은, 오빠 또한 나의 개성을 인정하기보다는 내게 “유별나다”는 압력을 은연중에 행사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오빤 참 유별나게 겁이 많아” 하고 한마디라도 해보았더라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쬐그만 게 뭘 안다고…” 하는 말을 듣다 보니 그렇게 순한 애가 되었을 거라는 짐작에, 어릴 적에 못한 막내 노릇을 하느라 공연히 어깃장을 부려보는 것이다. 어릴 적에 아이답게 굴지 않고 애어른으로 지낸 사람이 나이 들면서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 위해 퇴행하는 경우가 있다는데, 아무래도 조금은 그런 것 같다.
어쩌면 ‘막내 노릇을 못한 막내’ 노릇을 해보고 싶은 건지도
제가 무슨 죽음 앞둔 이순신 장군이라고, 손주를 보아도 될 나이에 “내가 막내임을 다들 알아달라”며 어깃장을 부리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다 그만 웃고 만다. 어쩌면 나는, ‘막내 노릇을 못한 막내’ 노릇을 해보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른다. 자, 이제 그만, 뚝!
Profile 이혜경
소설가 / 충남 보령 출생 / 1995 오늘의 작가상 / 1998 한국일보 문학상 / 2002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 2004 독일 리베라투르상 장려상 / 2006 이수문학상 등 수상 / 1982년 ‘세계의 문학’에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하며 등단 / 소설집 「그 집 앞」 「꽃그늘 아래」 장편소설 「길 위의 집」
편집후기
재테크 관련 서적 베스트셀러 1위부터 20위까지의 책을 모조리 사들여 독파한 후 펀드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고, 자신의 이름 석자로 작지만 집 한 채를 계약했다. ‘여동생은 벌써 시집가서 딸 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데 당최 연애할 생각조차 없는’ 노처녀 맏딸이라는 틀을 툴툴 털고 나오자, 그녀는 요즘 소위 잘나간다는 경제력 백점, 능력 만점의 ‘골드미스’가 되어 있었다.
웨딩마치를 울리며 행진하는 신랑 신부를 바라보며 J는 진심으로 축하를 하고 있었다. 친구 중 유일한 ‘미스’라는 꼬리표는 이제 그녀에겐 어떠한 의미도 아닌 듯 보였다.
결혼식장을 나서는 길, J는 언제나 그랬듯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복학을 앞둔 막내 동생 염려며, 조카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엄마, 심지어 요즘 살이 많이 빠졌다는 제부 걱정까지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진행 / 강회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