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당신의 가슴속에, 머릿속에 영원히 넣어두세요”
뭔가 일이 풀리지 않고 답답할 때,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말상대가 없을 때에는 망설이지 말고 아난시의 집으로 가보십시오. 아난시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멀다면 아주 멀고 가깝다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이 다소 복잡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노력을 기울인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을 겁니다. 우선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십시오.
당신이 알려준 대로
내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을 때, 거리는 어두웠습니다. 다행히 막다른 골목 안의 이국적인 건물 앞에서 한 여자를 발견했습니다. 약간 중성적인 음성으로 땅과 하늘의 키스를 기원하는 긴 노래를 어제부터 부르고 있었다는 여자는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녀는 가장 열린 공간을 뜻하는 아, 음을 내다가 멈추고 나서 정말이지 단 한마디의 사설 없이 나에게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몸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다리로는 빨강 파랑 원색의 공을 굴리고 있다가 급하게 달려 온 듯한 키 작은 안내자까지 붙여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아난시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선 순간 조금 당황했습니다. 어느 예술품 수집가의 개인 박물관으로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벽면에 걸려 있는 온갖 신기한 형상과 이미지들을 감상하면서 키 작은 안내자를 무조건 따라갔습니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은은한 빛과 결(?)이 부드럽게 흐르고 로맨틱한 로즈메리 향이 기분 좋게 퍼져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안내자가 건네준 방명록에 이름, 나이, 직업을 적어 넣고 그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 누웠습니다.
안내자는 긴장을 풀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앉아 방 안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밀려드는 긴장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번쩍,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섰습니다.
난데없이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가슴을 양팔로 감싸 안고 방문 앞에서 우뚝 버티고 서 있는 한 남자를 향해 물었습니다. 아난시? 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예고도,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내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내 어깨를 밀쳐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리고 내 몸 위로 올라탔습니다. 끈적끈적한 혀를 길게 빼 내 목구멍 안까지 깊숙이 밀어 넣고 키스를 했습니다. 나는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올라와 내장이 파열된 동물처럼 몸을 뒤틀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혀는 점점 길게 늘어나 나의 식도를 타고 위를 지나 뱃속까지 꿈틀꿈틀 밀려 들어갔습니다.
시큼한 타액으로 순식간에 나의 표피 세포를 마비시키고 척수와 중추신경까지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문을 열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사방이 막힌 벽에 갇힌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갈 길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절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수치심에 사로잡힌 내가 취한 행동은 남자의 혀를 핥으며 가랑이를 벌려 노역을 하듯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수치심이 사라질 때까지.
푸른고리문어를 만나다
내가 난생처음으로 옷을 마구 벗어던지고 개처럼 헐떡이자 남자는 나의 몸 여기저기를 헤집고 비틀고 깨물며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팠습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남자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러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남자에게 고통을 호소하거나 그만 멈추라고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나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고통을 나는 은밀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내가 아난시의 집을 찾아온 목적, 한 줄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답답하게 막혀 있는 소설 ‘「푸른고리문어」를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푸른고리문어」는 소설 쓰는 과정을 성행위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입니다. 소설이 고통과 환희로 인해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스러운 작업임을 섹스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나는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한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기존의 작품들이 민망스러워 꺼리는 장면을 거침없이 표현하면서도 당당하게 문학성을 획득할 것. 그러니까, 작업 과정이 기존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외로운 게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작품 속에도 직접 이런 내용을 피력했습니다. 틀을 깨기 위해서는 설득이 필요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발정 난 수캐처럼 격렬한 섹스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설명이나 변명을 구구히 늘어놓지 않아도 되는, 포르노가 아니라 충분히 새로운 문학의 틀로 살아날 수 있는 성애소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줄 한 줄 문장을 만들어 나가며 나는 깊은 장애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한정하고, 속박하는 따위의 굴레들. 작가가 현실의 틀에 갇혀 비굴한 문장을 만들어내면서 어떻게 독자에게 기존의 울타리를 뛰어넘으라고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어제도 나는 하루 종일 집필실에 틀어박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내가 묘사하고 있는 섹스 장면이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문학적 표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얄팍한 의구심, 그리고 내가 섹스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 같다는 서글픈 단정./
그대로 아난시를 껴안고
나는 한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남자의 혀가 빠져나간 텅 빈 뱃속이 너무나 헛헛해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고, 남자를 조였던 가랑이가 차갑게 시려와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점점 더 손에 힘을 주어 남자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다가 남자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처음엔 이를 악물고 경미한 두통을 호소하듯 희미한 신음을 흘리다가 점차 입을 벌려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나중엔 통곡을 하듯 엉엉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남자는 그런 나를 익숙하게 다뤘습니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라고 속삭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울음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실컷 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따뜻한 남자의 품을 더욱 파고들며 말했습니다. 나의 애인이 되어 영원히 함께 있어줘요. 하지만 남자는 부드럽게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이럴 수가! 아난시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소설을 발표한 심정이었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소설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옷을 입고 나자 더욱 부끄러워 남자를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남자가 나의 몸을 돌려세우고 나의 얼굴을 들어올려 시선을 마주칠 때서야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남자는 나의 시선을 단단히 사로잡고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나를 당신의 가슴속에 머릿속에 영원히 넣어두세요.
예민한 독자라면 근자 「레이디경향」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자주 가던 식당의 주방장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는 미각보다도, 애인이라도 생겼는지 전에 없던 향수를 뿌리기 시작한 미스터 김의 체취를 맡는 후각보다도 종잡을 수 없는 감각이 필요한 영역일 것이다. 젊어진 편집장, 새롭게 보강된 스태프의 기운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불쑥불쑥 시선을 잡아끌고 귀를 쫑긋하게 한다. 지금 편집실에는 적당히 상쾌해서 기분 좋은 봄의 기운이 흐른다.
환상문학을 해온 소설가 이평재가 문예지가 아닌 곳에 처음으로 글을 보내왔다. 마치 자화상을 그리듯 2001년작 「마녀물고기」에 등장한 ‘거미인간 아난시’와 ‘푸른고리문어’를 불러온 작가의 글은 어딘가 수줍고 조심스럽다. 데뷔와 동시에 문제적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은 일탈과 파격의 작가가 이렇게 손을 내밀어왔다. 어쨌든 우리는 만났다. 반갑고, 어색하고, 난감한 순간을 지나 다시 쳐다보며 낯을 익히고 속정을 쌓아갈 것이다. ‘아유, 뭘’이라는 말 한마디로 첫 만남을 돌이키는 것조차 민망스러워할 만큼.
이평재 Profile
소설가 / 1959년 서울 출생 / 미술을 전공하고 화가로 활동하다 1998년 단편 「벽 속의 희망」이 동서문학상에 당선돼 데뷔 / 2001년 소설집 「마녀물고기」 동아일보 문학 뉴웨이브 선정 /
소설집 「어느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
■진행 / 장회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