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보기에도 참 다른 모녀다. 경쾌한 목소리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대화를 주도해가는 엄마를 딸은 조용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가끔 이견이 있을 때는 “그게 아니지” 하며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어놓는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열정적으로 일하며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금융컨설턴트 박윤희씨(48)와 그런 엄마가 롤모델이지만 엄마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대학생 딸 박정현양(21).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오던 모녀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건 지난해 봄이었다. 학창 시절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았던 모범생 딸에게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가 그 발단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새롭게 만난 박윤희&박정현 모녀
외국어고등학교 졸업 후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학교생활도 재미가 없었고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1시간이면 가는 학교를 뺑뺑 돌아 2시간에 걸쳐 갔다. 명문대를 나와 어디서든 인정받는 ‘잘난’ 엄마와는 말조차 붙이기 싫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지만 좀처럼 잡히지 않는 무언가에 하루하루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딸은 뒤늦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에는 나 자신이 너무 싫고 처한 상황도 정말 싫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과연 나에게 열정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웠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결국 엄마 아빠에게 재수라도 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박윤희씨 역시 사업의 고비를 맞아 힘든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고 힘들어하는 모녀를 지켜보던 남편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은 산티아고 여행길에 올랐다. 내적 영감을 얻기 위해 걷는다는 순례길, 서로를 향한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20km씩 40일을 걸어야 하는 고난의 길이에요.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처음으로 딸과 함께 길을 떠나며 느낀 서먹함과 까칠함이었어요. 아이에 관해 모든 걸 안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엄마의 독단에 주눅 들고 질린 딸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죠. 그동안 우리가 참 멀어져 있었구나 실감하게 됐어요.”
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상 비교 대상이었던 엄마와의 여행,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와 고생길이 훤했다. 드넓은 벌판을 가르는 단 하나의 길. 엄마와 부딪히고 문제가 생겨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치열하게 싸우고 화해하며 서로가 몰랐던 모습을 하나 둘 발견해갔다.
“여행 4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침대를 정하는데 정현이가 내가 아닌 다른 영국인 남자와 같은 방을 쓰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죠. 속에선 불덩이가 이글거렸지만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나뒀어요. ‘저 아이는 옆집 딸이다’를 되뇌면서요.”
정현이가 고집을 부린 건 일종의 독립심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엄마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어린애처럼 굴기 싫었던 것이다. 엄마가 보기엔 무모하고 엉뚱한 행동이었지만 딸은 길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걷는 게 너무 힘드니까 아이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딸도 이만큼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좀처럼 힘든 내색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인데 그동안 말 못할 고민이 많았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마냥 내가 보호해야 할 존재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를 보살펴주고 있는 딸을 보고 내가 그동안 정현이를 너무 어리게만 생각해왔구나 싶었죠.”
엄마가 한 어른으로 딸을 인정하게 됐다면 딸은 엄마를 한 인간으로 마주하게 됐다. 모든 일에 완벽했던 엄마도 실수를 하는 사람이었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마음의 거리를 좁혀갈 수 있었다. 둘 다 모르는 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나만 알고 있는 길을 딸이 쫓아오는 것이었다면 딸에 대해 잘 몰랐을 거예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일이 없었어요. 언제나 엄마가 옳고 아이는 따라오기를 바랐으니까요. 이제는 아이에게 유능한 엄마가 아닌 만만한 엄마가 되려고 해요. 딸이 걸어가는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없다는 걸 배웠고 엄마가 생각하는 만큼 아이들은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요.”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와 방식이 있다는 깨달음, 정현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얻은 것이다. 혼자 힘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갈 자신감도 생겼다. 무엇보다 엄마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하게 됐다는 게 값지고도 기쁘다. 어느 한쪽의 요구만으로는 소통이 성립되지 않는다. 아이와 통하고 싶다면 한 걸음 속도를 늦추라고 엄마는 말한다. 한 걸음 빠르게, 한 걸음 늦게, 속도를 맞추며 함께 걷는 길, 그 누구보다 인생의 든든한 힘이 되어줄 행복한 동행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