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나요? 우리나라 창세신화

아시나요? 우리나라 창세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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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구비문학자 신동흔 교수가 들려주는 옛날 옛적에_첫 번째 이야기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들었던 구수한 옛날이야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시작되던 그 많던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라져가는 우리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신동흔 교수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매달 한 편씩,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나라 신화라고 하면 대개 단군신화나 주몽신화, 혁거세신화 같은 건국신화를 떠올리게 된다. 더 말할 것 없이 소중한 신화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건국신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돼온 민간신화라는 고귀한 유산이 있다. 가끔,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하면서 우리나라는 왜 그렇게 신화가 빈약하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창세신화 하나도 갖지 못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 겨레는 당당한 신화의 민족이다. 신비롭고 흥미로운 신화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해왔다. 그리고 그 속에는 창세신화가 포함돼 있다. 이제 그 사연을 만나보자. 함경도 ‘창세가’와 제주도의 ‘천지왕본풀이’에서 전해주는 이야기다.

아득한 옛날,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닌 하나였다. 서로 하나로 뒤섞여 있어 어디가 하늘이고 땅이라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거대한 신이 나서더니, 땅을 누르고 하늘을 잡아 올려서 둘을 갈라놓았다. 밝고 가벼운 기운은 위로 올라 하늘이 되고 어둡고 무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와 땅이 됐다. 본래 하나였던 하늘과 땅은 다시 합쳐지려고 요동을 쳤다. 그러자 거인 신은 세상 네 귀퉁이에 거대한 구리 기둥을 세워 하늘과 땅이 붙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늘과 땅 사이에 새로운 세상이 생겨났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

그때 그 시절, 세상은 깜깜한 암흑의 세계였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땅으로부터 낯선 푸른 생명체가 솟아났고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푸른 생명체는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앞이마의 두 눈에서 불처럼 뜨거운 빛이 솟구쳐 나오고, 뒷이마의 두 눈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쏟아져 나왔다. 거인 신은 푸른 생명체에게 달려들어서 눈을 뽑아 하늘에 던졌다. 앞이마의 두 눈은 해가, 뒷이마의 두 눈은 달이 됐다.

해와 달이 세상에 생겨나고 이제 생명이 태어나 살기 시작했다. 갖가지 식물과 동물들이 태어났고 그중 인간은 특별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존재였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늘과 땅을 가른 거인 신이 양손에 금 쟁반과 은 쟁반을 들고 하늘에 기원을 올리자 하늘로부터 금 벌레 다섯 마리와 은 벌레 다섯 마리가 내렸다. 지상의 이슬을 먹고 자라난 금 벌레와 은 벌레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됐고 그들이 서로 짝을 맺자 세상에 사람이 널리 퍼지게 됐다.

하지만 태초의 세상은 사람들이 편안히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늘에 해와 달이 두 개씩 떠 있으니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찌는 듯한 더위에 쓰러졌으며, 겨울이면 얼어 죽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해와 달 말고도 사람들을 핍박하는 무서운 존재가 또 있었는데 그는 신도 짐승도 아닌 인간이었다. 이름 하여 수명장자. 수명장자는 사나운 말과 소, 개를 아홉 마리씩 거느리고 세상에 군림했다. 사람들이 애써 거둔 것을 마구 휩쓸어갔지만 감히 그와 맞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나운 개들로 둘러싸인 채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질풍처럼 달리는 수명장자는 천하무적이었다.

이 기고만장한 수명장자는 하늘과 땅의 최고 신 천지왕에게도 도전했다. 하늘을 향해 “천지왕도 감히 자기를 잡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소리를 쳤다. 그 말을 들은 천지왕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다섯 마리 용이 이끄는 금 수레에 올라탄 채 번개장군과 벼락장군, 화덕진군과 풍우도사, 거기다 일만 군사를 거느리고 수명장자한테로 들이닥쳤다. 천지왕이 조화를 부리자 짐승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울부짖고 부엌에 걸린 가마솥과 솥뚜껑이 담장 밖으로 나뒹굴었다고 한다. 천지왕은 수명장자를 무릎 꿇리고 머리에 쇠 철망을 씌워 고통을 주었다.

여기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수명장자를 혼낸 천지왕은 인간 세상 구경차 백주 할멈의 집에 묵게 됐는데 그날 밤 할멈의 딸 총명부인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총명부인이 옥빗으로 머리를 빗는 소리에 반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였기에 그랬을까. 사흘 만에 하늘로 떠나게 된 천지왕은 두 아들의 탄생을 예고하고 박씨 두 알을 남겼는데, 예언대로 쌍둥이 형제가 탄생하자 총명부인은 그 이름을 대별왕과 소별왕이라고 지었다.

아버지가 없는 것을 슬퍼하며 자란 형제는 어느 날 출생의 비밀을 전해 듣고 박씨를 받아서 심는다. 박 덩굴이 하늘까지 닿을 듯 자라나자 형제는 덩굴을 잡아타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인 천지왕을 만났고 아버지로부터 무쇠 활을 전해 받는다. 대별왕과 소별왕은 그 활로 해와 달을 하나씩 쏘아 재난의 근원을 없앴다. 화살에 맞아 부서진 해와 달은 하늘의 수많은 별이 됐다고 한다.

해와 달을 조정한 대별왕, 소별왕은 그다음 이승과 저승을 주재하는 직책을 맡게 된다. 둘 다 저승보다 이승을 원했기에 한바탕 시합이 벌어졌는데 은 대야에 꽃을 누가 더 잘 기르나 하는 시합이었다. 대별왕의 꽃이 더 잘 자라났지만 승리는 소별왕이 하게 됐다. 소별왕이 밤사이에 꽃을 바꿔치기한 것이었다. 이승을 차지한 소별왕은 세상의 법도를 엄하게 세운 뒤 수명장자를 붙잡아다가 능지처참해 몸을 공중에 뿌렸다. 수명장자의 몸은 모기와 파리, 빈대가 되어 세상을 떠돌게 됐다고 한다. 한편, 저승을 맡은 대별왕은 저승을 새 생명과 안식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승에서 잘못된 일도 저승에 가면 다 바로잡히게 된다.

사연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뒤섞인 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하늘과 땅이 나뉘면서 가볍고 밝은 기운이 날아오르고 무겁고 어두운 것이 내려앉는 대역동의 상황은 또 얼마나 놀라웠을까. 사람이 생겨난 사연은 또 어떤가. 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은 특별히 선택을 받고서 신의 분신으로 태어난 존재다. 그래서인지 우리 신화에서 신과 인간은 거의 형제처럼 어울리곤 한다. 천지왕과 총명부인이 짝을 이루어 자식을 낳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 혹시 ‘벌레’라는 말에 마음 상할 필요는 없다. 그건 ‘원초적 생명체’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면 싸움이 있었다. 하늘과 땅의 신 천지왕과 인간의 지배자 수명장자의 싸움. 신과 인간의 싸움이니 보나 마나일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수명장자는 악당이지만 꽤 기개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세상의 지배자가 된 것은 아마도 최초로 사나운 동물을 길들인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천지왕 앞에서도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쇠 철망이 머리를 조이자 종한테 “도끼로 내 이마를 깨라”라고 외쳤다고 하니 배짱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천지왕의 아들 소별왕이 징치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모기와 빈대가 된것을 보면 참 끈질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소별왕과 대별왕 형제에게 눈을 돌리면, 저 하늘의 해와 달을 활로 쏘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신성한 해와 달을 쏘아 없앤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이 깃들어 있다. 자연의 악조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내면서 삶을 살아온 신성한 역사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능력이 더 뛰어난 대별왕 대신 소별왕이 이승을 차지했다는 것은 좀 아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꼭 그리 볼 것만은 아니다. 현세에서의 모순과 부조리가 뒷날 저세상에서 다 바로잡히게 된다니 말이다. 그것은 지금 이 세상을 그만큼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시나요? 우리나라 창세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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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신동흔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문학박사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나라의 민담과 신화, 설화 등 사라져가는 옛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민담전집1 한국편」, 「살아 있는 우리 신화」,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등이 있으며, 그의 홈페이지 (www.gubi.co.kr)를 통해서도 다양한 우리 옛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신동흔 ■사진 / 원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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