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옷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에세이

헌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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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식어보다 설득력 있는 솔직함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고민정 아나운서. 든든한 남편과 듬직한 아들,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채워가는 그녀의 감성 육아 에세이를 전한다.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에세이]헌 옷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에세이]헌 옷


날 울린 DJ의 한마디
“우리 이번 주에 당장 백화점 가자. 더 이상 남이 입던 옷 안 입힐래. 나도 좋은 옷, 좋은 장난감 사줄래. 내가 우리 아이 거지로 만든 것 같아 정말 속상해.”

눈물을 글썽이며 남편에게 하소연하듯 소리쳤다. 라디오에서 나온 사연 때문이었다.

‘전 30대 한 아이 엄마인데요.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난한 것도 아니에요. 하루는 꽤 잘 사는 한 친구가 자기 아이가 입던 옷과 물건들을 준다고 하기에 받는 입장이니 집으로 직접 가겠다고 했죠. 그런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사람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전화를 했더니 하도 답답해서 잠깐 나왔다며 기다리라는 거예요. 기다렸죠.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데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이기에 다시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그 친구가 공짜로 받으러 오는 주제에 그깟 1시간도 못 기다리느냐면서 다음에 다시 오라는 거 있죠.’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나 역시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친구도 아니네’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 사연에 대해 얘기하는 DJ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됐다.

“뭐 그런 친구가 다 있어요? 친구 하지 마세요! 그런데 사실 요즘에는 자기 애한테 남이 입던 옷 안 입히지 않나요? 엄마가 새 옷 사서 입히지.”

친구에게 함부로 말한 그 부잣집 친구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남의 옷 입히는 건 옛날 일이지 않나, 라는 그 대목에서 가슴속에 돌덩어리가 쿵 내려앉았다. 은산이의 옷장에는 내가 산 옷보다 친구의 아이들이 입던 옷이 3배쯤 많고 장난감 역시 대부분이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이다. 집에 올 때마다 뭔가 한 보따리씩 들고 오는 나를 보며 어느 날 남편이 농담조로 말했다.

“우리 너무 거지 같은 거 아니야?”
그럴 때마다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스스로 거지라고 생각하면 거지인 거야.”

기껏해야 1년밖에 못 입는 옷, 아이가 가지고 놀아줄지도 알 수 없는 장난감들을 몽땅 새로 사는 건 낭비라고 여겼다. 차라리 그 돈으로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에 쓰거나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아이가 더 컸을 때 꼭 필요한 물건을 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DJ의 한마디는 나를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이보다 돈 몇 푼이 더 소중한 스크루지 엄마가 된 것처럼 느껴지게 했고,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던 우리 모자를 거리의 부랑자로 내모는 듯했다. 갑자기 못난 엄마가 된 것 같아 가슴은 울렁거렸고, 엄마가 해주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하는 아이를 바보로 만든 것 같아 머리가 띵했다.

엄마표 시장표 패셔니스타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에세이]헌 옷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에세이]헌 옷

며칠 동안의 아이쇼핑과 남편의 위로로 나의 마음은 가라앉았다. 더 이상 ‘흥분 호르몬’이 분출되지 않을 때 가만히 생각해봤다. 내가 헌 옷과 헌 장난감 등 남이 쓰던 물건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이유를 말이다.

“민정아, 이것 봐라. 엄마가 백화점에서 비싸게 주고 사온 옷이야. 입어봐.”
“정말?”
“어, 옷이 너무 작네. 제일 큰 사이즈로 사온 건데…. 그래도 이건 통이 넓어서 맞을 줄 알았더니. 민정아, 이건 아무래도 살을 좀 더 빼고 입어야겠다. 그때까지 옷장에 잘 넣어두자.”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교 3학년 때. 5년 만에 두 아들 밑으로 막내딸을 얻은 엄마는 다른 딸들처럼 나를 예쁘게 입히고 싶어 하셨다. 당시 유행하던 나팔바지도 멋지게 소화하시던 엄마의 패션 스타일로 미뤄 짐작해보건대, 패션에 대한 감각이 없진 않으셨던 듯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살이 찌기 시작하던 나는 급기야 내 또래들이 입는 아동복이 맞지 않았다. 막내딸을 예쁘게 입히고 싶으셨던 엄마는 가끔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오셨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 역시 엄마가 사다주시는 새 옷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부분 맞지 않거나 너무 꽉 끼어 살이 불룩불룩 튀어나와 입고 나갈 수도 없었다. 동네 시장에서 사온 옷은 그래도 그럭저럭 입을 만한데 백화점 옷은 어찌나 작게 나오는지 백화점만 가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음주가무를 즐기면서부터 살이 빠지기 시작했으니 초등학생 때부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난 예쁜 옷이 아니라 몸에 맞는 옷을 사야만 했다. 비싼 옷에 대한 거부감은 그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맞는 옷이 없다 보니 엄마는 직접 옷을 만들어주셨다. 겨울이면 보드라운 털실을 한 바구니 사오셔서 손수 옷 한 벌을 떠주셨고, 여름이면 시원한 옷감을 사와 내 몸에 꼭 맞으면서 결점을 커버해주는 옷을 만들어주셨다. 그 옷들을 입을 때면 왠지 더 날씬해 보이는 것 같아 자신감이 생겼고 무엇보다 배가 튀어나오진 않았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하지만 두 오빠들은 이렇게 만들어준 옷을 싫어했다. 어릴 적부터 큰오빠는 여학생들로부터 팬레터가 끊이지 않을 만큼 준수한 외모라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게다가 불혹의 나이가 된 지금도 오렌지 컬러의 바지를 소화할 만큼 최신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엄마가 만들어주는 옷이 허접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큰오빠와 세 살 터울의 작은오빠는 큰오빠만큼 패션 감각이 있던 건 아니지만 둘째들이 보통 그렇듯 첫째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물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큰오빠에게는 작은오빠에게도 입혀야 하니 오래 입을 수 있도록 매번 비싸고 좋은 옷을 사주셨지만 작은오빠의 옷장은 대부분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비싸고 좋은 옷과 동네 시장에서 사온 싸고 막 입는 옷이 채워졌다. 그래서 항상 불만이었고 엄마가 옷을 만들어주실라 치면 자기만 매번 이런 옷 입는다고 투덜거렸다. 어린 마음에 나는 나대로 이런 오빠들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큰오빠는 왜 꼭 비싼 옷만 입으려고 하지? 내가 보기엔 시장에서 산 거나 백화점에서 산거나 다 똑같아 보이는데. 나라면 차라리 백화점에서 한 벌 살 돈으로 시장에서 여러 벌 사겠다. 작은오빠는 또 어떻고? 굳이 따로 옷을 사지 않아도 큰오빠 옷을 입을 수 있는데 왜 싫어하지? 물려받은 옷이니 안 어울리면 안 입으면 되고 옷이 더러워지거나 해지면 부담 없이 버려도 되니까 더 편하지 않나? 나도 차라리 누가 옷 좀 물려줬으면 좋겠네. 그러면 그중에서 내 몸에 꼭 맞는 것만 부담 없이 골라 입으면 될 텐데….’

옥탑방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
욕심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편보다 물려받는 물건에 대해 더 거부감이 없던 나. 며느릿감 1위로 꼽힌다는 아나운서가 옥탑방에 살던 시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던 것도 어릴 적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다.

“나중에 우리 둘이 여기에서 살아야 되면 어쩌지?”
“뭐 어때요? 난 좋은데. 화장실 있고, 부엌 있으면 됐지. 집 크면 청소하기만 힘들어요. 난 여기도 마음에 들어. 문만 열면 하늘이 온통 우리 거잖아요. 하늘이 울먹이는지, 어떤 모양의 구름이 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고, 양쪽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카시아 꽃향기까지 데리고 와 항상 숲 속에 있는 기분이거든요.”

연애를 하는 동안 지금의 남편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이 아닌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옥탑방에 살았다.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며 이른바 ‘옥탑방 붐’이라는 게 생기기 전 일이다. 두 사람이 겨우 다리 뻗고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방, 간신히 혼자 샤워를 할 수 있는 정도의 화장실, 아파트 현관 신발장 놓인 공간만큼의 부엌. 그게 전부인 옥탑방이었다. 요즘은 남자친구가 차를 가지고 있는지, 자기 소유의 집이 있는지가 연애의 조건이라던데 그땐 그 옥탑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고 해도 좋았다.

연애를 6년 했으니 콩깍지가 씌여 내뱉은 흰소리는 아니었다. 여름엔 너무 더워 모든 문이란 문은 다 열어놓고 더위를 즐겼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했지만 찬물로 세수 한 번 하면 금세 시원해졌고 항상 꽃향기, 솔향기가 불어와 마음속까지 상쾌했다. 이렇듯 난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옥탑방마저 사랑했다. 그에 반해 그 사람은 만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앞으로 살아야 할 집을 걱정했다. 천생 서울내기인 민정이가 번듯한 집을 원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작은 옥탑방이라도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었다.

이런 마음은 결혼 후에도 유효했다. 결혼 5년 차가 됐을 때 우린 중국 칭다오에서 1년을 보냈다. 그동안 모은 돈도 있으니 작은 아파트를 빌려 살 수도 있었지만 대학교 기숙사를 택했다. 부엌은 언감생심이고 작은 화장실 하나 달려 있는 게 전부였다. 기숙사이니 작은 책상 2개, 싱글 침대 2개, 냉동고가 없는 작은 냉장고 하나 그리고 작은 옷장 하나가 방을 꽉 채웠다. 하지만 우린 옛날 옥탑방 느낌이 난다며 오히려 연애하듯 1년을 보냈다. 결혼 8년 차인 지금도 부엌에서 음식을 할 때면 어릴 적 소꿉놀이할 때처럼 그저 재미있다.
내 어린 시절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명문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강남 8학군에 살지도 않았다. 소녀들의 로망인 인형의 집이나 해외에서만 살 수 있다던 까만 피부의 인형은 친구 집에나 가야 만져볼 수 있었다. 공주님이 잘 것 같은 핑크빛 인형 침대며 금방이라도 맛있는 음식이 튀어나올 것 같은 주방놀이는 진열대에 놓인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에세이]헌 옷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에세이]헌 옷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모든 사물은 장난감이 될 수 있듯 집 안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은 기꺼이 나의 소꿉 장난감이 됐다. 앨범은 튼튼한 벽이 됐고, 필통은 나의 공주님이 눕기에 딱 적당한 크기의 침대가 됐다. 팔각 성냥갑은 근사한 거실 테이블이 됐고 엄마의 손수건은 화사한 카펫이 됐다. 나의 공주님은 항상 새로운 집에서 잠을 잤고 친구가 인형놀이하자며 놀러 와도 싸울 일 없이 함께 새집을 만들었다. 인형의 집이 있었다면 지겹다고 새로 사달라, 너무 좁으니 새로 사달라 하며 엄마를 무지하게 졸랐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소유의 장난감이 없음으로 인해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집 밖으로 나가면 나무며 꽃이며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 장난감이 됐다.

그래서일까. 어른이 된 지금도 난 집이 크지 않아도 금싸라기 땅에 있지 않아도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집은 어릴 때처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공간이지 깔고 앉아야 하는 돈방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을 품을 수 있고 산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 집인데 왜 한 곳에 구속되려 할까. 나무가, 하늘이, 바다가 나와 함께 사는데 그깟 사람이 만든 물건이 대수랴.

추억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헌 옷
얼마 전 두툼한 옷감이 좋아 은산이에게 자주 입혔던 청바지에 온통 볼펜 낙서가 가득한 걸 발견했다. 은산이가 어린이집에 가면서 하도 심심해하기에 남편이 은산이 손에 볼펜을 쥐어준 것이 발단이었다. 운전을 하느라 미처 신경을 못 썼는데, 도착해서 보니 은산이가 혼자서 바지에 온통 그림을 그려놨다는 거다.

만일 제값을 다 주고 산 옷이었더라면 분명 난 화가 났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달밖에 입지 못한 옷인 데다 즐겨 입히던 옷이라 아까운 마음에 남편에게도, 은산이에게도 인상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저 껄껄 웃어넘겼다. 바쁜 출근길에 정신없었을 남편과 혼자 뒷자리 카시트에 앉아 심심했을 은산이를 생각하니 볼펜 하나로 생긴 추억이 그저 재미있게 느껴졌다.

어차피 물려받은 옷이라 이렇게 지저분해지면 가벼운 마음으로 옷 수거함에 넣으면 그만이다. 뿐만 아니라 물려받은 옷들은 이미 여러 번 세탁해서 몸에 안 좋은 화학물질들은 다 씻겨 내려갔을 뿐 아니라 활동하기 편할 만큼 옷감도 부드럽다. 오히려 내가 사준 새 옷들은 혹시 지저분해질까 싶어 어린이집에 가는 날엔 입히지 않으니 새 옷이 상전이다.

장난감도 마찬가지다. 은산이가 재미없어 해도 혹은 망가뜨려도 상관없다. 안 그래도 아이에게 올라가지 마라, 나가지 마라, 뛰지 마라 등등 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장난감만이라도 찢든 부수든 하고 싶은 대로 놔둬도 되니 내 마음도 편하다.

지금의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시인의 아내로, 아나운서로, 물려받은 옷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어른으로 정해져 있던 게 아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로 인해 오늘의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릴 적 뚱뚱하지 않았다면, 옷을 물려 입던 작은오빠가 없었다면, 멋진 인형의 집이 여러 채 있었다면 지금의 나도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 10년 후의 내 모습도, 아니 당장 내년의 내 모습도 오늘 나의 결정으로 혹은 우연한 사건 하나로 달라질 수 있다. 어린 소녀가 시인의 아내를 만들었듯이 지금의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들 것이다. 그 기대감으로 오늘 하루도 두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응시한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2004년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2005년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부부가 됐고, 결혼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가 있다. (@kbsminjung)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원상희 ■의상 협찬 / 키시키시 by 디밤비·핑크라이닝 by 디밤비(1577-2969, www.dibam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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